『삼국유사』로 보는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1)
[서울=동북아신문] 본지는 오늘부터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김정룡 소장의 장편학술 논평을 싣는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1.『삼국유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영토를 잃은 민족은 회생이 가능하지만 역사를 잃은 민족은 희망이 없다.”『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말씀이다.
유태인은 2천 년 동안이나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로 지구촌에 흩어져 살았어도 민족이 소실되지 않고 존재했으며 끝내 자기들의 나라 재건에 성공했다.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역사를 지켜온 덕분이었다. 실제로 유태인은 그들의 역사이자 그들의 종교이며 그들의 종교이자 그들의 역사였다. 세상에서 이렇게 역사와 종교가 일치한 민족은 유태인밖에 없다. 또 유대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인『탈무드』는 어느 나라에서 살든 무릇 유태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래서일까, 하여튼 유태인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약 배달민족이 2천년 동안, 아니 200년 동안이라도 나라를 잃었다면 재생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배달민족은 자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민족은 기록에 굉장히 약한 민족이다. 역사서다운 역사서『삼국사기』는 1145년, 야사이긴 하나 해방 후 한국학계의 중시를 받고 있는『삼국유사』는 1280년 출간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는『춘추』를 제쳐놓고『사기』에 비하면 1200년 뒤쳐져 있고 일본의『고사기』와『일본서기』에 비해도 600년이나 떨어져 있다.
늦게나마 출간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이 두 사서에 대해 갑론을박이 자자하다.
먼저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부터 살펴보자.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한 목적은 그가 왕에게 올린 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여러 역사서의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고 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데 거울로 삼으려 한 것이 최종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12세기 당시 상황에서 그때의 지식인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민족주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취한 철저한 사대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모처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필요성을 자각하였지만, 지나친 중국 의존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되었든『삼국사기』는 후세 사학자들이 고대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참고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는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사를 크게 정사와 야사로 나누는데 이른바 왕조중심의 역사를 기술한 것을 정사라 하고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것을 야사로 취급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삼국사기』를 정사,『삼국유사』는 야사로 취급한다.
왕조중심의 정사도 중요하겠으나 신화를 포함한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야사가 매우 중요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정사인『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데 비해 야사인『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지금 우리 겨레가 주장하고 있는 배달민족 조상을 단군으로, 최초 국가를 조선(고조선)이라 하는 것은『삼국유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달민족의 고대 신화, 민속, 경제, 종교, 풍속 등 여러 분야의 역사를 담은 사서는『삼국유사』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사서인『삼국유사』는 오늘날 제대로 된 번역서조차 없는 상황이라 서글프고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을 시도한 학자는 이병도 선생이며 1943년이 최초였다. 그때는 일제강점기어서 이 책의 번역서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병도 선생은 1956년 재출간했다. 그 후 지금까지 십 수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이 책의 편역, 번역, 역주에 매달려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필자가 보건대 전부 이병도 선생의 번역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절대다수가 베껴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 선생의 번역에 비해 어휘사용과 문법을 포함한 문맥이 더 어색한 것도 있다.
번역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그나마 넘어갈 수 있으나 번역이 원문에 비해 엉뚱한 뜻으로 번역되어 있거나 명사와 동사를 구분 못하거나 한문 어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저자가 전하려는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이 뒤죽박죽이 되어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 못할 번역이 수두룩하다. 번역이 이토록 수준이 낮기 때문에『삼국유사』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폐단이 존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번역이 이토록 엉망이지만 대한민국교육부 관리들과 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필자는 우리민족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에게『삼국유사』제대로 된 번역본이 한 권도 없다는 말을 했더니 ‘금시초문’이란다. 아마 절대다수 사학자들이 이 분처럼 모두 ‘금시초문’일 것이다.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당신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가? 당신의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현주소이다.
이병도 선생을 포함해 왜 수많은 사학자들이『삼국유사』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한국 사학자들은 보편적으로 한문에 밝다. 문제는 한문에는 밝으나 한어에는 까막눈이다. 가령 현대한어 즉시의 뜻인 ‘立刻’을 세워서 조각하다, ‘老虎’를 늙은 범, ‘開胃’를 위를 짼다는 등 전부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뜻이 엉망이다. 우리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중국말 속담 ‘車到山前必有路’를 수레가 산에 이르려면 반드시 길이 있어야 한다로 번역하니 한심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삼국유사』에서 등장하는 한어를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어 어휘들이 제대로 번역 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삼국유사』권3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下榻’라는 어휘가 있는데 이병도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이 이를 ‘말석’이라 번역했다. ‘下榻’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그 뜻은 ‘머물다’이다. 하정룡 선생이 유일하게 ‘머물다’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은 ‘절간에서 잠시 머물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겠습니다.’인데 나머지 분들은 전부 ‘이 절간의 말석에서 기다리겠다.’고 오역하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 진열되어 있는『삼국유사』역본 십 수 권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첫머리 번역부터 중구난방이다. 예를 들어『삼국유사』첫머리가 ‘敍曰’로 시작되는데 역자마다 제각각으로 번역했다. 이병도 선생은 ‘敍曰’을 현대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문 ‘自敍’라고 달았다. 최호 선생은 ‘서(敍)한다’, 하정룡 선생은 ‘차례를 정하여 말하기를’, 이재호 선생은 ‘서술해 말한다’, 최광식 선생은 ‘서문에 이른다’, 최광식 선생과 백대재 선생 공역에서는 ‘서에 이른다’고 옮겼고 신태영 선생과 임명현 선생은 아예 ‘敍曰’을 무시해 버리고 번역하지 않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 편역에서는 ‘머리말’로 옮겼다. 이 중에서 ‘머리말’로 옮긴 것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고 ‘敍曰’을 무시하고 옮기지 않아도 무방하다.
임명현 선생의『삼국유사』편역에서는 첫 구절에 등장하는 ‘仁義’를 ‘人義’로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물론 뜻을 모르고 한 일이 아니고 실수로 인한 오류라고 하지만 첫 구절부터 오류가 발견되면 이 책을 읽을 맛이 삽시간에 도망가고 만다.
또 첫 머리에 등장하는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이 구절의 번역도 중구난방이다. 고전연구실 옮김 신서원 편집부 꾸밈으로 된『삼국유사』는 “무릇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문화(예악)로서 나라를 창건하며 도(인의)로써 교화를 베풂에 있어서 괴변이나 폭력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어디서나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다. 여기서 예악을 문화이고 인의를 도라고 옮긴 것은 오류이다. 괴력난신의 ‘怪’를 괴변이라 옮기는 것 오류이고 ‘力’을 폭력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오류이고 ‘神’은 도깨비가 아니다. 이 문장에서의 괴력난신은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즉 공자 같은 성인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로서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라는 말씀을 남겼듯이 그 어떤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 않았다. 또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출판본인『삼국유사』는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과 의를 가지고 백성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고 나머지 편역본, 번역본, 역주본 전부 똑 부러지게 정확하다 싶게 맞게 번역한 것이 없다.
이병도 선생의 지적처럼『삼국유사』는 불교지식을 비롯해 난삽하고 난해한 용어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병도 선생은 자신의 번역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후대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를 들어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병도 선생은 “예의와 풍교가 보통사람들과 달랐다.”라고 옮겼는데 후학들이 이 구절 번역을 전부 이병도 선생의 이대로 베껴내고 있다. 전체 대한민국 사학자들 중에 혹은 한학자 중에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참으로 비극이다. 필자는 이병도 선생의 역주본을 처음 접하고 이 번역이 무슨 뜻인지가 이해되지 않아 교보문고에 가서『삼국유사』모든 편역, 번역, 역주본을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전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 역주를 시도한 이병도 선생이 이 어휘의 뜻을 모르고 옮긴 번역을 후학들이 역시 모르고 그대로 베껴낸 결과였다.
대저 禮儀風敎란 무슨 뜻일까? 당시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에 비해 달랐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가령 불교가 유입되면 중국식 명칭을 따라 불교라고 그대로 따라 불렀다. 유교도 마찬가지였고 기타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신라에서만은 독특한 시각을 갖고 중국식 명칭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즉 당시 신라 사람들은 무릇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뿐인데 저마다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성격에 따라 풍교 앞에 달리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가모니가 창안한 종교(풍교)라는 뜻을 따라 ‘釋氏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 禮儀風敎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답이 아주 간단하다. 즉 유교에 있어서 ‘禮’가 가장 중요한 바이블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유교를 禮敎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를 중시하는 종교(풍교)라고 인식하고 자기네들의 식에 따라 ‘禮儀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삼국유사』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을 마땅히 “유교지식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뛰어났다”고 번역해야 한다.
자아~,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옮기지 못함으로 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어휘 번역의 오류인 것이 아니라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즉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로서는 가장 문명이 앞서 있는 중국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부르므로 하여 주체성과 정체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서양문물이 동양에 불가항력적으로 밀려드는 근대화 시기 중국의 구호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구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인데 비해 조선의 구호는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이렇다고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삼국유사』의 재해석을 통해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혀내어 청소년들에게 민족적인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해야 할 마땅한 책무이다.
요즘 온 나라가 어수선한 정국에 더욱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2. 『삼국유사』는 ‘불법체류’ 신세
도가에 한의학(중의학), 풍수학, 명리학 등 3대 학문이 있다. 이 3대 학문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출제될 만큼 중시 받았다. 그러다가 근대화시기 불어 닥친 ‘양학’이 광복 후 ‘동학’을 밀어내고 ‘권위’ 자리에 올랐다. 이런 환경에서 그나마 유교학설은 하도 뿌리 깊어 생존해 있었던데 비해 도교학설은 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의학은 간신히 겨우 연명할 정도로 무대에 다시 명함을 내밀게 되었고 풍수학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명리학은 아직도 뒷골목에서 쉬쉬할 만큼 공명정대하게 대로에서 떳떳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의학, 풍수학, 명리학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현주소에 대해 어느 유명 학자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로 비유했다. 한의학은 시민권을 획득했고 풍수학은 영주권을 부여받고 있는데 명리학은 아직도 불법체류자로 취급받고 있다.
필자는 이 우스갯소리 비유를 보면서『삼국유사』가 떠올랐다.
광복 후 특히 산업화시대부터 대한민국에서 활보할 수 있는 학자들은 소위 구미권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다. 동양학자들은 양학자들에게 밀려 있었다. 동양학자들의 지위가 이럴진대 우리 전통‘한학(韓學 : 필자가 지어낸 말, 전통한학의 대표적인 서적으로서 필자는『삼국유사』를 꼽는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설명을 좀 해야겠다. 필자는 동양학이란 말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한국학계에서 말하는 동양학은 중국, 조선, 일본을 비롯한 동아세아의 학술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중국학(漢學)이 절대적이다. 조선시대 성리학, 이한기의 기철학, 이제마의 사상의학 등 ‘우리 것’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내세우지 못하는 두루뭉술한 표현인 동양학이라 말하고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 분명 조선특색이 있는 조선화가 있는데도 이것을 내세우지 않고 역시 동양화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한다.
동양학이란 어휘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필자는 국학이란 표현을 지지하지 않는다.
국학이란 말은 일본이 중국문화의 그늘에서 흘러오다가 중국에 비해 한 발 앞서 양학을 받아들여 좀 잘 나간다하는 시점에 이르러 자기네 것을 중국과 구분 짓고 차별화를 강조하며 폼 잡아보려고 창안해 낸 것이 이른바 국학이란 개념이다. 국어란 표현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제영향을 받은 한국이 국학, 국어라는 표현을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것’을 무엇이라 표현할까? 필자는 국학 대신 ‘朝鮮學’, 혹은 ‘韓學’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국학이란 개념은 얼핏 보면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기실 애국주의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되면 인간은 편협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국학이란 개념은 스스로 경계가 뚜렷한 협소한 범위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韓學’이란 개념을 선호한다.
양학, 漢學, 韓學 을 상기 비유와 연관 지어 말하자면 양학은 시민권자이고 漢學은 영주권으로 남아 있고 韓學은 ‘불법체류’ 신세이다.
대한민국 산업화시기부터 현재까지 서양의 과학, 철학, 정치, 경제, 문화, 문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서적 역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들 서적들의 번역이 비교적 잘 진행되고 있고 독서시장도 폭 넓게 확보하고 있어 ‘양학’은 시민권자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복 후의 漢學은 조선시대에 비하기에는 어림도 없고 또 비록 ‘양학’에 첫 자리를 내주었으나 중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경전, 도가 계열의 주역, 황제내경 등 번역수준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 사서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번역은 엉망일까?『삼국사기』가『삼국유사』에 비해 번역이 조금 낫기는 하지만 역시 오류투성이다.
이에 관련하여 필자는 전 청화대학교 교수였던 정인갑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다. 정인갑 교수 왈, “중국역사를 보면 당나라까지의 문헌들이 ‘문언문(文言文)’으로 되어 있다. ‘문언문(文言文)’을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천자문 풀이 식의 역법(譯法)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송나라 초기부터 문헌에 漢文 일색이 아닌 漢語 구두어(지금의 표현에 따르면 백화문)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이 구두어들이 천자문식의 번역으로 하면 뜻이 엉뚱하게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삼국사기』가 1145년이니 송나라 중기여서 김부식도 구두어 한어표현을 일부 사용했고『삼국유사』는 1280년이니 송나라 말기에 해당되므로 구두어가 더 증가되었다. 그래서 한국한학자들의『삼국사기』번역에 오류가 많고『삼국유사』의 번역이 더욱 오류투성이다.”
한문만 알고 한어를 모르는 한국 한학자들의 번역이 얼마나 엉망이냐면, 『황제 소녀경』에 남자가 처음 여자와 운우지정을 나눌 때 남자가 너무 긴장하면 여자의 음부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다는 뜻인 한어 ‘摸不淸孔道’를 한국도교학회 최창록 교수는 우리말로 '깨끗하지 못한 것을 만지다'로 옮겼다.
번역에는 譯도 중요하지만 注도 매우 중요하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주석을 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전이라면 주석이 더 중요하다.
먼저 번역부분부터 살펴보자.『삼국유사』에 수많은 편 말미에 ‘讚曰’이란 어휘가 등장한다. 하정룡 선생은 ‘讚曰’를 한국어로 ‘찬에 이른다.’로 옮겼고 다수 역본들을 살펴보니 ‘찬에 이르기를’ ‘찬한다’ 등등 중구난방이다. 문제는 중구난방이라 허더라도 독자들이 그 뜻을 쉽게 이해하면 되지만 수많은 독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머리를 가로 흔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병도 선생은 ‘讚하노니’라고 옮겼는데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다른 역자들에 비해 나은 편이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讚曰’ 뒤에 노랫말 혹은 시구처럼 찬양하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시적감각이 드러나게 ‘찬양 하노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하나의 어휘 번역을 통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옮긴 역자나 알아보지 일반 독자들은 특히 비한문세대(非漢文一代,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 젊은이들은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번역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인데 전달이 엉망인데 누가 읽겠는가?
한문이나 한어에 밝지 못한다면 상식적으로 사고해도 옳게 옮길 수 있건만 상식을 떠난 번역들이 나타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삼국유사』기이권제일(紀異券第一)30 진흥왕 편 첫 구절 원문은 다음과 같다. 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被法衣而逝. 이 구절을 이병도 선생을 비롯해 절대다수 역자들이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 태후는 바로 법흥왕의 딸이요, 입종갈문의 아내로 죽을 때는 머리를 깎고 중 법의를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옮겼다. 여기에 엄중한 번역오류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족보가 개판으로 번역했다. 즉 법흥왕은 진흥왕의 아버지이며 전대인 제23대왕이었다. 누구의 여자라는 것은 그 남자의 처 혹은 애인 혹은 뜻을 같이하며 같은 길을 걸으며 사업을 함께 하는 ‘혁명적인 동지’를 의미할 때도 있다. 예하면 국민의 당 박선숙 의원을 언론에서는 ‘안철수의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이었던 강금실 씨를 ‘노무현의 여자’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누구의 여자라고 할 때 그 남자와 부부관계이거나 애인 혹은 굉장히 친한 친분이 있는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지 절대 누구의 딸이 아니다. 또 태후는 왕의 어머니를 뜻한다. 대왕대비는 왕의 조모(할머니)이다. 연산군의 시절 인수대비가 곧 그의 할머니였다. 진흥왕이 즉위할 때 나이 15세였고 어려서 태후가 섭정했다면 그 태후는 진흥왕의 어머니이다. 역자들의 번역에 따라 ‘法興王之女子’를 법흥왕의 딸로 번역한다면 세상 웃기는 일이 발생한다. 왜냐? 법흥왕은 진흥왕의 아버지이고 법흥왕 여자가 그의 딸이라면 그 여자는 진흥왕의 누이로서 진흥왕과 그 여자는 오누이 관계가 되는데 그렇다면 누나 혹은 여동생이 진흥왕 즉위 시 섭정했다는 뜻이 된다. 이는 정말 어처구니없이 상식을 벗어난 번역이고 또 신라 왕족의 족보를 뒤죽박죽으로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니 이런 번역본이 어떻게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삼국유사』기이권제일(紀異券第一)3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 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제25대 진지왕은 문란하고 음란하여 집정 4년 만에 폐위되었다. 그가 집정 중에 사량부 백성신분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그녀를 도화랑이라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수작을 걸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여자의 지켜야할 것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남편이 있는 여자가 어찌 다른 남자를 따를 수 있겠나이까? 비록 제왕의 위엄이라도 절대 정조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殺之何?”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이병도 선생부터 절대다수 역자들이 “너를 죽이면 어찌하려느냐?”고 옮겼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한문 번역도 틀린 치명적인 오류이다.
중국어 ‘之’는 다수의 경우 우리말 조사 ‘의’와 같다. 그러나 사람을 가리킬 때는 3인칭이다. 즉 ‘나’가 일인칭이고 ‘너’가 이인칭이라면 ‘그(타)’는 3인칭이다. “殺之何?”에서 ‘之’는 ‘너’가 아니라 ‘그’이다. 그럼 ‘그’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도화녀의 남편이다. 즉 왕은 네가 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너의 남편 때문이라 하는데 그럼 내가 그(남편)를 죽이면 나의 요구를 승낙할 것인가? 이런 뜻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취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의 남편을 죽이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는 남자가 어디 있는가?
중국문언문에서 ‘너’는 ‘之’가 아니라 ‘汝’이다. 2년 후 도화녀의 남편이 죽었다. 그러자 왕이 찾아 가 ‘汝昔有諾, 今無汝夫可乎?’란 구절이 있는데 연속 두 번이나 ‘汝’가 등장한다. 번역하면 ‘네가 예전에 나와 언약이 있었고, 지금 너의 남편이 없으니 나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겠지?’이다.
『삼국유사』십 수 종의 역본들을 살펴보면 주석이 제대로 이뤄진 것이 단 한 권도 없다. 그 중에서 그나마 이병도 선생의 주석이 가장 나은 편이고 나머지는 미흡하기 그지없다.
『삼국유사』기이권제일(紀異券第一)1에 ‘河出圖, 洛出書, 而聖人作’란 구절이 있다. 이를 이병도 선생은 ‘河水에서 圖가 나왔고 洛水에서 書가 나와서 聖人이 일어났다.’ 옮기고 주석까지 달았다. 즉 ‘中國古代 伏羲 때에 河水에서 龍馬의 圖가 나오고 夏禹 때에 洛水에서 神龜의 書가 나왔다는 傳說에 依據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쯤의 주석은 가장 잘 된 해석이다. 나머지 역자들은 다수가 ‘하수에서 도를 내고 낙수에서 서를 내어 성인이 일어났다.’고 옮기고 어떤 역자는 아예 ‘하에서 도가 나오고 낙에서 서가 나와...’ 이렇게 옮기고 주석이 없으니 독자들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 구절을 해석하면 이렇다.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서가 나왔다는 것은 황하와 낙수는 중국인의 발상지이자 중국문명의 발원지이다. 그림과 문자가 합쳐 도서라고 하는데 도서는 문명의 상이이다. 도서관이 문화의 상징이자 문명의 상징이 된 것은 이로서 비롯된 것이다. 도와 서가 중국문명의 상징이고 이 문명은 황하와 낙수에서 발원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삼국유사』가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잘 반영한 정말 훌륭한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의 수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적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역주가 문제인 것이 한몫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삼국유사』를 ‘불법체류’ 신세라고 표현한다.
<다음에 계속>
김정룡 프로필
중국 용정 출생, 장춘대학 일본어 학부 졸업
연변일중 일본어 교사
연길시 관광국 국장 역임
현재 중국동포타운신문 주필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재한동포민속문화협회 회장
서울시 공무원 대상 <중국동포문화이해교육> 강사
출간작품
칼럼, 수필, 수기, 400여 편 발표
2011년 장편역사소설 <황제와 소녀> 출간
2015년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천국의 그늘>과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멋 맛 판>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