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일 수필]어머니, 나의 어머님

2016-09-08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세상살이에 지치고 외롭고 쓸쓸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 대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가슴속 뭔가가 치솟아 목이 메게 한다. 그 때마다 누렇게 빛바랜 옛날 사진 같은 어머니 영상이 떠오른다.

안방에서 괴팍한 할머니가 담배 대를 길게 빼물고 끝없는 잔소리와 담배 연기를 함께 내 뿜을 때면 어머니는 침침한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눈물 훔치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그 비참한 모습이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한 것이며 ‘모든 여자의 삶은 원래 저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시집을 왔다. 작은 키에 말수가 적은 착한 시골 처녀였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 곳이 꽃밭이든, 사막이든 모든 것을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때 우리 집은 할머니, 고모, 삼촌, 누님 모두 열 식구였다.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놓고 괴팍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모자라 나의 심부름까지 하다 보면 식구들과 함께 편안히 앉아 밥을 먹을 때가 거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식구들은 방아쇠 당긴 총알같이 튀여 나가 각각 흩어지고 밥상에 남은 것은 밥풀 뭍은 빈 사발과 아무렇게나 내던진 수저뿐이었다. 밥그릇은 모두 텅 비이 있고 당신의 몫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밥을 챙기는 사람도 없고 말 한마디로라도 미안함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도 이런 현실을 숙명인 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갈 때 책을 집에 놔두고 왔다. 부랴부랴 집에 들어서니, 침침한 부엌에서 무언가를 먹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던 사람처럼 황급히 손에 쥔 것을 감췄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맛있는 것을 혼자 드시는 줄 알았다. 뭘 맛있게 먹느냐면서 다가서자, 어머니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손을 밀치고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집 식구들이 먹고 난 생선뼈를 핥아 먹고 계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침에 내가 국에 말아 먹다 남은 퉁퉁 불은 밥이 조금 있었다. 순간 밥상의 하얀 날카로운 생선뼈가 비수마냥 날아와서 가슴에 꽃이는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엄마! 엄마는 생선이 비린내 나서 안 먹는 다고 했잖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당황해서 어 찔 바를 몰라 했다.
"아니, 살이 많이 붙어 있길래 아까워서……"
 
왜소하고 초라한 이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그대로 찢어지는 것 같다. 불쌍한 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할까? 지금도 어머니가 궁색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음침한 부엌에 옹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하얀 생선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지고 눈물이 난다. 지금 같으면 생선을 한 트럭이라도 사서 대접할 수 있으련만.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학교에서 학부모회의에 어머니를 불렀다. 그때 비록 “독서 무용론‘이라고 해도 내가 졸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가한 어머니는 옷차림은 너무 촌스러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어머니는 주눅 든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어색한 발언까지 몇 마디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머니를 나무라며 다른 어머니들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시집가서 잘사는 너 누이랑 너만 바라보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하단다.”라며 도리어 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때 나는 의아한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뭐!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아버지에게 물리적 폭력을 당하면서 인습에 순종하고 가난과 모든 고통을 참으며 오직 우리를 위하여 살아오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남존여비’의 철저한 희생자인 어머니가 행복 하다니. 어머니 정말 고맙고 미안 합니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오래 누워 계시다 임종 할 때 어머니를 불러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자, 어머니도 눈물이 비 오듯 흐느끼며 울었다. 마지막 이별 앞에서 두 여인은 뜨거운 눈물로, 지나간 갈등과 괴로움을 모두 씻고 서로 용서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패하면서까지 슬프게 울었다. 그것은 단지 세상과 작별한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평생 싸인 울분을 토로하는 처절한 절규이고 흘러간 세월 속에서 고부간 쌓인 고운 정 미운 정의 징표였다.
 
자연계에서 천적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쇄약해지는 것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깻잎같이 좁은 얼굴은 주름투성이로 변하고 허리는 90도로 굽었다. 그렇게 혹독한 세파가 스치고 지나간 얼굴에서도 손자들과 손잡고 놀 때면 웃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개혁개방 이후,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졸업 때 학습 성적이 전 학년 에서 1등을 했다.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어머니는 깊이 숨겨 둔 천에 싸고 또 싼 돈을 꺼내 손자가 제일 잘 먹는 것을 잔뜩 사들고 왔다. 손자의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시며 주름살 깊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평생 고생하면서 갈구하고 소망하던 것을 무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여덟 시간 후에 돌아 가셨다. 임종 때 얼굴에 회한도 슬픔도 없는 조용한 표정 이었고 주름이 많은 눈귀에는 웃음이 보이는 듯 했다. 어머니는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찾는 그런 비법이 있었다. 나를 진통으로 분만하시고 진한 젖으로 키운 어머니, 나의 어머님! 감사합니다. 하늘 아래서 부디 행복 하소서.
 
어머니 유해를 화장하여 살던 시골에 모시고 돌아 올 때 논길을 지날 때이었다. 문뜩 나의 눈에 토종우렁이가 들어 왔다. 토종 우렁이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는 어미 속을 파먹고 껍질만 논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런 후 빈 껍질은 맑은 물과 함께 저 멀리 하늘 아래로 조용히 흘러갔다.
 
남태일, 부천시 원미마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