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이사

2016-07-03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스타킹 양말 한짝에 백위안짜리 인민폐 7만5천위안을 한 줄로 길게 넣고 허리에 두른다. 이틀간의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 브로커들한테 스타킹을 통째로 주고 떨어진 곳이 지금의 한국 땅이다. 짐이라 해봐야 휴대용 가스레인지 상자만 하다. 불법입국이니깐 짐이 크면 들통나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여행을 떠나도 책을 빼고는 간편하다.

거처는 이미 연락해 놓은 아는 언니네 집이다. 서울 강남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구룡마을 이란다. 비싼 탓에 미처 개발되지 못하고 화장실도 밖에 있는, 나무판자 밑으로 x을 떨구는 완전 촌동네다. 환상으로 부풀려 놓은 가슴을 미처 접기도 전에 그냥 쇠뭉치로 내려치는 숨 막히는 아픔이랄까...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시작도 하기 전에 허탈감이 괴롭혔다.

......

그래도 삶은 쉬지 않는다.

땅에 내려 앉을 것만 같은, 대낮에도 소굴같이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간다. 그 언니네 부부는 불편한 환경에서도 무척 즐겁게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위대해 보였다. 고향에 있을 때 빌딩같은 아파트에서 아주 잘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니. 인간의 적응력이란 한계가 어디까지 일까?

문제는 잠자리다. 부부는 윗목에 난 아랫목에, 불편한 잠자리다. 또 주방 겸 욕실로 사용하는 도저히 맘 놓고 씻을 수 없는 아직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어느 공동체 촌부락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하루를 일 년처럼 삼일을 보냈다.

두 집 건너에 96세 되시는 할머니 혼자 계신다. 운 좋게 그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할머니도 적적하지 않고 나도 돈 들이지 않고 발편잠을 잘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산송장이나 다름 없는 할머니는 아예 간섭도 귀찮아서 못할 형편이라 나한테는 통째로 떨어진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식당에서 하루 일하고 돌아오면 할머니는 잠에 곯아 떨어져 있고 출근할 땐 미동도 하지 않는다. 혹시 돌아가셨나 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면 갑자기 부연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는데 등골이 다 오싹해진다. ㅎㅎ~산 귀신이 더 무섭다.

스무날이 지났을까. 퇴근하고 누웠는데 잠긴 문이 스르륵 하고 열린다. 경악했다. 벌떡 일어서서

“누구세요?”

집이 갈라질 정도로 소리 쳤다.

“이집 아들이요.”

희미한 불빛에 어슴푸레 보이는 모습이 칠순도 더 되신 영감님이었다. 헌데 더 기고만장할 일은 뒤에 있었다. 그 영감은 바로 이불을 내 옆에 펴고 드러눕는 것이었다. 하긴 방도 코딱지 만해서 더 어디로 누울 자리는 없지만.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고 메스꺼움에 울렁거렸다.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구석의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서는데

“이 시간에 어디 가나. 나도 의정부 미군부대에 근무하는데 모친이 걱정되어 주일에 한 번씩 오는 거다. 불편하면 불편한데로 하루만 참지.”

그냥 나왔다.

당장 갈 데도 없으면서.

겨울밤은 길고 처량했다.

정거장으로 나왔다. 자정이라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겨울바람은 차지만 이미 얼어버린 마음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몽당 전화번호책을 꺼내들었다. 깨알같이 박아쓴 이름들이 나의 위로가 되어주질 못했다. 선뜻이 전화할 이름이 없었으니. 조바심이 났다.

남편친구의 마누라한테로 전화 했다. 모텔에서 청소 한다고 했으니 잠자리는 쉬울 것 같았다. 그쪽에서 빨리 택시타고 오란다. 감사한 일이다. 얼었던 가슴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풀렸던 기운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택시 잡아타고 ××파크텔로 달렸다.

모텔에서 쪽잠 2시간 자고 전철타고 1시간, 걸어서 반시간에 걸쳐 겨우 제시간에 출근했다. 하루 일하고 사장님에게 자초지종 이르고 월급 챙기고 그만 뒀다.

그리고 일자리 찾으러 원정길에 올랐다. 친구들부터 찾아 일자리를 알아보고 교차로에 나오는 구인구직란에 멍텡이를 그려가며 전화하고 면접 보고.

드디어 회사식당에 채용되었다. 당연히 숙식제공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밤에 자다가 다리에 쥐가 오를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다. 4개월이 지나자 남편도 한국에 들어 왔다. 역시 불법입국이었다. 모두 이잣돈이라 빚더미는 숨 쉴 구멍도 내주지 않았다. 남편은 시 외곽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식당에 놀러 와서 얼굴만 피뜩 보고 갔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하고 슬플 줄이야.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은 한 달 사이에 10키로가 빠졌다. 원래 약골이라 슬그머니 걱정도 되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둘이 함께 식당으로 취직 했다. 가게에서 손님이 다 빠지면 테이블 밀어놓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몸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너무나 행복했다. 처음에 한국 왔을 때 들렸던 그 언니네 부부의 느낌을 알았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도, 쌓아놓은 돈 낟가리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어도, 힘들고 궂은일에 지쳤어도, 정처 없는 보따리 신세였어도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겨나가는 최고의 삶을 가꾸어 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우린 온 몸을 바쳐가며 배웠다.

사랑은 위대하다.

남편은 가게 옆에 덩그렇게 내동댕이친 콘테이너 주위를 돌려가며 아이스박스로 틈서리 하나 없이 겹겹이 쌓아 줄로 단단히 동여매고 비닐로 한 벌 더 곁벌로 쳐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콘테이너를 조립했다. 구경한 사람들이 모두 다 놀랐으니깐, 사랑의 힘이 창조적인 에너지로도 진화될 수 있다는 불변의 법칙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살림집을 장만했다. 우린 그 가게에서 3년8개월 있었다. 그 사이에 빚을 청산하고 자진 신고하여 합법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돈도 모으고. ㅎㅎㅎ~

가게가 대박 났다. 사장님은 가게를 하나 더 오픈하면서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갔다. 점쟁이가 우리부부는 절대 내보내면 안 된다고 했단다. ~ㅋ 그 덕에 우린 이사를 또 하게 되었다. 사장님이 새로 개업한 가게 2층에다 아예 살림집을 차려 줬다. 전에도 그랬듯이 가게에서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이유로 우린 하루에 15~16시간을 일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오후 4시까지 일하고 2시간 잠자고 오후 6시부터 일 시작해서 저녁 11시까지 일했다. 처음에는 갈 곳도 없고 불법이라 자유도 없으니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냥 이대로 갈수는 없었다. 엄연히 사장님도 노동법을 위반했고 분명한 착취였다. 우린 봉급 인상을 요구했고 정상적인 노동시간을 제기하면서 따로 집을 구했다. 옥탑방이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그냥 단칸방에 화장실 하나 달린, 주방도 따로 없고 뒷문밖에다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하나 놓은 것뿐이었다. 요 하나에 이불 하나, 그리고 가림 옷 몇 가지, 그게 다였다. 그릇은 일회용~ㅎㅎ

퇴근길에,

싸게 싸게 활 오징어

두 마리 오천원에

소주 한 병 삼 천원에

샤워하고 마주앉아

세 잔 반씩 나눠서

하루 피로 날리고

사랑도 피운다.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린 옥탑방에서 1년을 보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체류만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의 변화는 컸다.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유흥업소들이 작은 현성의 밤을 불태웠다. 모두가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현금을 겁 없이 흥청망청 쓰는 것이 한국젊은이들이 카드를 긁는 것보다 더 흔했다. 우린 86평의 고층아파트를 하나 분양받고 상가1, 2층을 사서 식당을 차렸다. 둘이 함께 운전면허증을 따고 한번 멋지게 고향땅에서 삶을 빛내고 싶었다. 개업날 물이 터졌다. 위에서 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바닥은 하수구가 막혀 더러운 물이 질퍽했다. 부실공사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란다. 현실은 너무나 빗나갔다. 중국경제의 거품이 작은 현성에서도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가게를 접고 대충 수리하고 세를 내주었다. 3년을 근근이 지내고 딸을 중학교를 졸업시키고 나서 우린 다시 한국행을 하게 되었다. 이미 돈은 바닥이 났고 무엇 하나 해보려 하면 정상적인 업무는 실행이 안 되고 사람을 찾고 돈을 찔러줘야 하는 ‘꽌시’망에 진저리가 났다.

이번엔 언니의 초청으로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먼저 언니네 집에서 2달간 있다가 입식주방으로 된 단칸방을 맡았다. 유일한 가전제품은 남들이 버린 티비를 하나 주어놓은 것이다. 가스보일러가 아니고 기름보일러라서 한번 불 때면 장난 아니게 돈이 들었다. 한 겨울에도 샤워 할 때만 불 때고 전기요를 틀고 잤다. 화장실 물도 소변을 모았다가 내리면서 물을 절약했다. 일할 때 옷들은 중고품점에서 싼 값으로 구입했다. 적게 벌어도 절약하면서 정기적금을 꼬박꼬박 넣었다. 하루하루가 신이 났고 재미있었다.

일 년 후 방 두 칸, 입식거실, 주방 따로, 가스보일러로 된 2층집에 이사 들었다. 중고품점에서 세탁기, 티비, 냉장고를 장만하고 언니네가 새집 들면서 버린 옷장, 화장대, 티비다이를 끌고 와서 박아 넣었더니 그런 대로 훌륭해 보였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우린 함께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고 비자 변경을 했다. 장기체류가 허가 되였다. 남편은 힘든 노가다맨이지만 팀에서는 실력파로 인정을 받는다. 매일 새벽 일 나갈 때는 항상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힘든 일이 그리 즐겁냐고 잠꼬대로 중얼대면, 건강한 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왜 신나지 않겠냐며,

“오빠 돈 많이 벌어올게~~ 넌 그냥 푹 잘자고~~” 하며 방문을 살짝 닫는다.

나도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주방에서 일을 한다. 물론 12시간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멤버들과 진이 빠지게 일을 하지만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고 일을 재미로 하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에 길들여 진 것 같다. 물론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행동이겠지만 또 다르게 보면 현재에 만족하고 자그마한 일에도 행복해하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겠냐는 변명도 가져본다.

 

이 집에서 8년을 보냈고 올해는 9년째이다. 남편이 이사를 하자한다. 좀 더 큰 집으로. 책방도 하나 만들어 준다면서.

남편이 알아보고 괜찮다고 하는 1층 단독주택을 보러 갔다. 벨을 누르자 우리딸보다 어려보이는 앳된 새댁이 푸시시 덜 깬 잠을 달고 나온다. 아침 9시전이니깐 내 일만 생각하고 찾아 간 것이 미안할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안내 하는 데로 들어갔더니 거실도 엄청 크고 방 두 칸도 큼직하고 주방은 거실과 공용이라서 내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항상 입버릇으로 주방이 큰 집이 소원이라고 염불처럼 외웠던 것이다. 화장실도 통풍이 잘 되게 설계했고 크기도 알맞춤하고. 마음에 들었다. 호기심에 새댁보고 이 좋은 집을 왜 나가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2년 전에 신방을 차리고 오래오래 쭈욱 살아볼 양으로 리모델링도 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년 지나고 애가 있으면서 생활비도 점점 늘어가는 데다가 현대자동차에 출근하는 남편이 회사의 경기침체로 일을 많이 못하게 된 것이 주원인이며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가 벅찬 것이다. 새댁의 말을 들으면서 엉뎅이는 하늘공중에 쳐들고 머리는 바닥에 처박고 잠을 자고 있는 두 살 배기 애기가 눈으로부터 가슴으로 안겨온다. 그 큰 집에 꽉 박아놓은 물건들을 보는 내가 아파진다. 어쩜 저 물건들이 새댁의 얼굴에 그늘을 주지 않았나? 이 큰 집도?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너무 쉽게 가져버린 게 화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문제 , 가정문제도 되겠지만 자기문제가 큰 것이 아니겠나?

이사는 우리에게 그 어떤 계급장처럼 흥분과 에너지를 불러일으켰고 삶의 전환점이 되였다. 어쩌면 이사는 우리 인생의 역사를 고스란히 찍어두는 사서[史书]와 같이 아주 중요하다. 첨에 뚝딱 한번으로 모든 것을 갖춘 이사를 한다면 아마 그 속에 감추어진 격정과 행복과 재미들을 하나씩 꺼내어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사도 순서대로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면 삶도 점점 아름다워짐을 알아가지 않겠나. (필자 홍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