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 수필] 딸이 부러웠던 날
2016-04-25 [편집]본지 기자
정말 사내자식은 커갈수록 멋이 없다. 스무여덟 살, 알만큼 알 나이잖은가. 중국 대륙에서 기업을 한다, 어쩐다 하며 몇 년 용트림을 하더니 한국에 온다 어쩐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입국을 해서는 전화 한방에 "나 왔어요." 한다.
아들 녀석은 만나서도 씩 한번 웃는 것이 전부다. "우리 아들, 장래 목표가 무엇이지?"하고 물었더니 잡은 손을 뿌리친다. 대답 안 한단다. "얘기 해봤자 무조건 반대할 건데 뭐" 하고 낯에 찬 얼음 한 벌 깐다. "엄만 언제 자식 전도를 관심해 본적이 있어?"하고 입을 비쭉거린다. 세상에? 이건 너무 억울하다! 나 딴에는 여직 것 자식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그래서 홧김에 한마디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저 말하는 꼴 보지, 니 잘 났다, 잘 났어! 이제부턴 손 내밀지 말고 열심히 독립을 하거라."
아들과 헤어지고 걷노라니 길가에 피어난 봄꽃들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춘기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한 죄로 한국에 와 있는 몇 년 동안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아들한테만은 충성을 다했는데 어미 마음은 꼬물도 몰라주고 원망할 줄 밖에 모르니!?…아, 자식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부모는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할수록 마음이 허전하고 괴롭고 방향이 안 선다. 누구하고 말하지 않고는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들 가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글쎄 딸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겠니?” “아들놈들은 다 그래, 딸이 없는 사람은 섧어서 어디 살겠니!…” “말두 마, 우리 아들 얘기 하자면 끝도 없어!” “ 어디에 아들만 가진 엄마들의 모임은 없다니? 속 풀이라도 실컷 하게!” 저 쪽에서도 맞장구를 쳤다. 그날따라 딸이 더욱 부러운 날이 됐다. 딸이라면 엄마의 마음을 얼마라도 이해해 줄 것 같았고, 너무 살갑지 않더라도 아들처럼 무뚝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을 했다.
우리 아들이 태어나던 그 시대는 아들을 많이 선호하던 시대라, 나는 아들을 낳고 큰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할아버지가 3대독자인데다가 큰아버지 네와 삼촌네 모두 딸을 낳았는데 내가 덜컹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니!…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더니 지금은 시대가 180도로 바뀌어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지만, 아들 가진 부모는 며느리 눈치 보면서 손지손녀나 봐 준다고 한다. 세월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봤자 과거는 과거일 뿐, 그래도 현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아들이 강력하게 나오니 이제 더는 우리의 뜻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새벽 네 시까지 뜬 눈으로 새우며 고민을 해보기도 하였다. 내가 자식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하고, 우리의 뜻을 따라 주지 않는 아들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며칠 동안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이런 글을 보게 되었다. 모두 서울대를 나온 부모가 있는데 고3인 아들에게 2×2=4 의 공식대로 부모보다 더 훌륭한 대학에 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며 길거리 공연을 하고 다녀서 부모들이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아래에는 이런 평가의 글이 적혀있었다. “무슨 일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찍어주는 것이 가장 잘못된 진로지도 방식이다. 자식은 복제품이 아니라 각 자 운명을 타고 난 새로운 탄생이다. 시대는 계속 변하는데 부모의 시대에 비추어, 부모의 사고방식으로 만으로 자식의 미래를 고려해주는 것은 잘 못된 판단이다. 부모들에게는 변화관리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은근히 충격을 받았다. 가만있자, 혹시 나도 그런 부류의 부모에 속하지 않을까?…그래서 책장을 정리하듯 자식에 관한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솔직히 대학교 학과를 선정할 때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게 하였다, 한국에 왔을 때도 앞으로 어떤 분야가 전망이 크다며 억지로 그 회사에 다니게 했고, 중국에 갔을 때도 부모 말을 들으면 손해 없다며 부모가 나서서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 그 때부터라도 아들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아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우리는 우리대로 마음고생이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게 된 것 이다.
우리는 오직 부모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으로 자식이 무엇을 잘 해 낼 수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부모가 도와주면 무조건 빨리 달릴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꿈은 대신 꿔주지 못하는데 말이다. 부모는 그냥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잘해 준다고, 그 것도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의 전부가 아니었다. 진정한 부모의 사랑은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스스로 고기를 낚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 동안 자식을 위해 땀을 흘리며 희생한 것도 어쩌면 사랑이 아닌 집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욕심과 집착 때문에 나 스스로 마음의 무게를 가증시키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성인이 된 자식이 잘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며 지켜보는 것이 진정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도 깊이 깨닫게 된다.
이제 라도 뉘우치게 되어 다행이다. 복제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탄생의 사고로 바꾸니 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가벼워 졌다. 딸이 부럽다고 서운해 하던 나의 마음은 봄눈 녹듯이 사라진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아들의 멋진 모습을 그려 보며 미소를 지어 본다. 이제는 아들이 혼자서 알아서 인생의 바다를 잘 항행할 것이라 믿으면서 기다려 줄 것이다.
딸이 부럽던 날이 마침내 내가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날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