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밋빛 꿈이 깨어지기 까지

[김명수 대필]

2006-04-25     동북아신문 기자

국제결혼 피해여성 중국동포 (이희애) :
(한국인: 천승연)모두 가명임. 

나는 2003년 2월 10일 한국인과 국제결혼한 사람의 소개로 중국길림성 화룡에서 천승연씨를 처음 만나 알게 되었다.

화룡에 사흘에 머문 천씨와 교제하던 중, 그의 달콤한 말과 예의 바른 행동거지에 나의 마음은 움직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부동산중계업을 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었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나는 황홀한 기분에 그만 그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였고, 혼인까지 약속했었다. 당시 그는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었다.

그가 귀국한 후, 우리는 전화로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꾸준히 연락을 해왔었다. 중국에서 건강검진 및 혼인등기를 하기 위하여 같은 해 6월에 두 번째로 중국길림성 북경으로 왔었는데, 그는 호텔에 일주일 머물면서 나와 혼인등기를 마쳤었다.

혼인에 관한 모든 서류를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려던 2003년 7월, 우리는 중국북경에서 다시 만났으며 함께 보름을 지내면서 한국 입국비자를 받고 12일 북경 항공기편으로 인천공항에 입국하게 되였다.  

나는 근심을 많이 했었다. 서로가 다른 문화 환경에서 생활해 오다보니 마찰은 피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빠른 시일 내에 한국문화에 적응해서 남편을 잘 받들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야지 할 것이다!

그런데 결혼 2개월도 못돼 남편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할 줄이야?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언어폭행을 서슴없이 감행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자신을 위로 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행패는 갈수록 심해졌었다. 술을 마셨건 안 마셨건, 성질을 부릴 때면 두려워 옆에 있을 수가 없었다.(물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잘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입국 3개월 후부터 나는 발산역근처에 있는 남편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4개월간 일하면서 노임을 전부 남편한테 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 돈을 도박장과 술집에 흥청망청 써버릴 줄이야?

남편은 술만 마시고 오면 고함치고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퍼부었고, 폭행까지 서슴없이 했었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시어머님은 그럴 때마다 참으라고 위로해 주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만취상태에서 생리 때마저  부부관계를 강요하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감행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리중이라고 말하면 그는 화를 내며“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 무슨 생리를 이렇게 오래하냐?”하고 이부자리마저 다 적셔놓곤 했었다.

식당에서 하루 열두 시간 일하고 지친 몸으로 귀가하면 그는 끊임없이 성관계를 강요했고, 욕구를 다 채우고 나면 또 도박판을 찾아갔었다. (그는 도박판에서 돈을 빌려주고 즉시 이자를 받는 노릇도 했었다.)

남편의 그런 부당한 대우 때문에 나는 한국생활을 적응하기 힘든 것은 물론, 결혼생활마저 지속하기 어려워 났었다.
남편은 쩍하면 이렇게 떠벌리었다.“살기 싫으면 이혼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위장결혼을 하듯 돈을 주면 국적 취득할 때까지 내가 같이 있어줄게!”하고.

그래도 멍청한 나는 남편이 아마 돈 쓸 일이 있어 저럴 것이라 판단하고 노임을 받는 데로 전부 바치곤 했었다. 혼인 2년6개월간 준 돈은 일천삼백만 원, 그런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성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세 식구가 살았는데 어머님 때문에 나한테 뭐든 함부로 할 수 없었든지, 2004년 10월에는 분가를 요구했었다. 나는 남편의 분가요구에 따를 수 없었다. 세집 얻을 돈도 없거니와 혼자서 남편의 주정과 행패를 감당하기 무서웠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도 분가를 하면 두 사람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의 난폭한 성격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2005년 1월 말에 남편은 분가할 비용을 마련하라고 했다. 나는 마침 중국에 다녀와야 할 사정이 있어 중국 다녀온 후에 보자고 했다. 그러니 남편은, 죽여 버리겠다, 다리 분질러놓겠다, 고 갖은 욕설을 퍼붓더니 폭행을 들이댔었다.

당시 나는 밀려오는 심각한 공포심 때문에 온몸이 차가워지면서 굳어졌고, 급기야 경련을 일으켰었다. 그제야 남편은 놀라고 당황해서 내 몸을 주물러주었다.

남편은 끊임없이 악성프로그램을 되풀이 했었다. 먼저“널 위장결혼으로 신고하겠어, 이혼하고 중국으로 쫓아 보낼 거야!”하고 협박을 하고, 외국인등록증을 빼앗고, 그리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집요하게 강요하곤 했다.

2005년 9월초, 중국을 다녀온 나는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으로부터 빨리 집으로 들어오라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었다. 내가 화장실로 간 사이 친구가 전화를 받고 이렇게 말했었다.

“곧 들어갈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어쩌다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데 옆 사람까지 불안하게 왜 이래요?”

나는 7시까지 귀가하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을 탔었다. 그때까지 남편은 핸드폰에다 대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어댔었다. 집에 가서 행패를 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2005년 9월 14일,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까닭 없이 나를 욕을 먹고 폭행을 했었다. 정말 치욕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중국 간 사이, 한번은 정씨 성을 가진 음성메세지가 날아와 남편의 의심을 사기 시작했었다. 확인해 보니 내가 모를 사람이었다.

남편은 화가 나면 이성을 잃고 때와 장소, 사연의 진위여부도 가리지 않았었다. 그러니 남편한테 인격대우를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

그날 6시간동안 남편의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나는“목욕적인 음성메시지를 남긴 그 사람을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여 찾아보자”고 했었다.

허나 남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누명쓰고 치욕스러운 폭행까지 당한 것 때문에 나는 머리가 깨질듯 아팠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나는 남편이 의심하는 내 친구의 오빠와 상면할 굴욕적인 자리를 갖게 되였었다. 친구오빠가 성낼 것은 뻔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오히려 친구오빠가 오리발 내민다고, 당장 자기한테 사과할 것을 강요했다.    

9월 21일 아침, 나는 도저히 참을 소 없어 나는 남편과 함께 경찰서를 찾아가 신고하였다. 그런데 경찰은 신고할만한 사유가 못되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남편의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 때문에 나는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수면제를 복용하여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어지럽고 귀에서는 윙하는 환청소리가 들리기까지 했었다.

10월 14일, 직장 근처에 있는 한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더니 신경쇠약으로 혈압은 65~80, 심장, 위장, 간장 등 신체균형이 깨졌는데 원인은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이라고 하면서 한약을 써보라고 했다. 하지만 약값이 비싸 한약을 쓸 수 없었다.

2005년 11월 27일 저녁 4시,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되였는데 친구는 국적문제가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한테 언제면 국적이 나오느냐 물었더니 남편은 대답은 고사하고 욕설을 퍼 붓더니 급기야 주먹행세를 했었다. 

11월27일, 나는 최충신정형외과의원을 찾아가 지난 밤 폭행 때문에 아픈 몸을 치료 받았다. 다음날인 11월 29일 아침 6시, 남편은 전화번호를 바꾸라며 약 40분간 욕설을 퍼부으며 야단을 쳤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을 하다보면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었다. 저녁 11시에 퇴근하여 귀가한 나는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또 욕을 먹게 되었다.“그 자식이 너의 애인이니? 그 자식하고 살았어?”하고. 

남편 마치 의처증과 정신분열증 증세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정신질환자 같았었다. 남편이 폭행을 감행할 때마다 나의 혈압은 급격히 저하되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심한 두통과 어지러움 증이 나고, 정신이 흐려지면서 자살충동마저 일어나곤 했었다.

2006년 2월 12일 4촌 여동생이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며 원고의 집으로 놀러왔었다.
남편은 전화로 시장에 들려 김치와 깻잎, 그리고 수인고추를 사오라 했는데 말소리가 잘 안 들려 되물었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사촌동생 앞에서 이렇게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이 미친년아, 싸가지 없는 거지같은 년아! 한국에 온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말투를 고치지 못하였냐? 이 센스가 없는 년아.”하고.

이에 사촌 여동생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골을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2006년 3월 17일 저녁, 남편은 내가 도망을 못가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도록 이불을 덮어씌운 채 폭행을 하였고, 다음은 순서대로 또 자신의 변태적인 성적욕구를 강제로 채웠었다.

나는 더는 이대로 살 수 없었다. 우리의 결혼을 꼼꼼히 돌이켜 봐야 했었다. 내 욕심이 과했기에? 한국 사람이라고 너무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초부터 내가 너무 얕잡아 보였기에? 혹, 정말 내가 센스 없는 여자기 때문에?…어쩌면 남편이 내 인격을 짓밟기 전에 자기 스스로 인격을 낮추고 짓밟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더는 굴욕적인 삶을 살 수 없지 않는가? 자기 인격을 당당히 찾아야 했다.

이튿날아침, 나는 이혼소송을 하러 문밖을 나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