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 실화 2]그곳에는 나의 혈육들이 있다.
[서울=동북아신문] 남남북녀(南男北女)
나는 지난 2000년부터 2006년 사이 요녕성 심양시에 있는 어느 무역회사에서 담당경리로 취직해 있었다. 중국산 소상품을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하고 북한의 그림과 수예품, 그리고 건강식품을 수입해서 중국내에서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북한무역대표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고 북한식당에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 시기 북한에서는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중국으로 많은 무역회사와 식당들을 진출시켰다. 그 중에서 북한식당들은 한국고객 뿐만 아니라 중국고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높은 수익을 올리었다. 심양시에도 수정관, 평양관, 모란관, 동명관, 묘향산 등 일여덟 개 되는 북한 식당들이 영업중이었는데, 식당을 찾는 대부분 손님들은 주로 중국에 놀러온 한국 관광객 및 사업차 방문한 기업가들, 중국진출 한국 기업들의 파견 근로자들, 그리고 중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라도 잠시나마 분단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고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서로 공감하기도 하였다.특히 한국인들에게 북한식당이 크게 인기를 끈 최대 강점은 중국식당이나 한국식당과 달리 미모와 교양을 갖춘 북한 출신 아가씨(접대원)들의 서비스를 직접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 같이 평양예술대학 등 전문대 이상의 학력과 미모를 갖춘 20대초반의 여성들이다. 노래와 춤 같은 기본기는 다 갖추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이 같은 자격기준 외에 최고의 출신 성분이었다. 부모들이 당 고위 간부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 북한식당의 음식 맛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메뉴도 엇비슷하다. 식당마다 가격 차이는 있지만 동해 털게찜과 소라신신로 등과 평양냉면, 평양온반 , 불고기, 회냉면 등이 이들 식당들의 특색 있는 요리로 인기를 끌었다.
저녁공연시간은 보통 7시30분에서 1시간동안 노래와 장구춤, 가야금, 기타 공연 등을 하는데 북한 노래와 한국의 흘러간 옛 노래, 중국노래를 번갈아 부른다.
우리 회사에서도 한국에서 손님만 오면 북한식당에 가는 것이 첫 순서였다. 우리 회사에 30대의 김 이사(理事) 총각이 있었는데 외모는 그리 출중하지 않지만 고려대 북한연구과 출신이고, 아버지는 어느 그룹의 회장이시다. 훌륭한 조건을 가진 김理事는 한국에서도 결혼상대를 많이 고르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던 그가 실물로 북한아가씨를 처음 보면서 그들의 공연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가 하면, 다른 환상적인 세계에 매혹된 듯 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갈 때마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얌전한 스타일이였다. “미인”이라는 말에 낯을 살짝 붉히기도 한다. 천상 우리 조선여인들의 수줍은 모습이다. 그 모습에 반했는지 김理事는 그 아가씨에게 황당하게도 공개 청혼을 하였다. 그 것도 아마 문화적 차이이리라! 대답을 줄 리가 없는 아가씨는 또 한번 살짝 낯을 붉히면서 평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근 2년을 그 북한식당의 단골이 되었던 것 같다. 그 후 김理事는 자주 심양으로 출장을 왔으며 올 적마다 접대원 아가씨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들을 그득 갖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김理事는 한국에서 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중국으로 왔었다. 꿈에 그 아가씨가 나타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철없는 듯 한 사랑에 속으로 서글픈 웃음을 지었지만 정열에 넘치는 정성어린 그 마음에 내 마음이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혼자소리로 대한민국 남자들의 사랑에 대한 지극정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그 식당으로 가서 지배인의 귓속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것은 비밀이기도 한데 그 아가씨가 이튿날 평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理事에게 살짝 귀띔해주었다. 그날에도 지배인은 그 아가씨에게 우리 테이블을 담당서빙을 하게 하였다. 지배인이 저 쪽에서 뭐라고 얘기해 주더니 그 날 그 아가씨의 표정은 예전보다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편이었는데 그 날은 상대방의 농담도 너그럽게 잘 받아주었다. 식사중 공연이 시작되자 그 아가씨가 노래를 불렀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 대도 헤어진 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아가씨의 노래 소리는 무대아래에 있는 고객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 통일을 소망하는 우리 민족 마음의 불씨에 부채질 하는 듯하였다. 무대아래에서는 한 총각이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도 영화에서나 보던 슬픈 사랑을 연출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이것이 진정 분단의 아픔이고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
식당을 나오면서 김理事는 진지하게 그 아가씨에게 “우리가 통일 되는 날 평양이나 서울에서 만나자! 그 날까지 나 결혼 안하고 기다릴게!” 라고 충동적으로 말을 했다. 아가씨는 아무 말도 없이 얼굴만 붉혔다. 남쪽은 남자가 북쪽은 여자가 멋지고 이쁘다는 말에서 생겨난 남남북녀, 이들 남남북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안타깝기만 했다. 분단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혈육의 아픈 이별뿐 만아니라 젊은 세대들의 사랑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다. 그렇게 11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몇해 전에 나는 한국에 입국하여 체류하게 됐다. 어느 날 우연히 김理事를 만났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서울에서 결혼해 이제는 쌍둥이 아빠가 되었단다. 내가 “그 때 그 언약은 어쩌고?” 하고 놀려줬더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지만 아직도 가끔씩 그 아가씨를 떠올리게 되면 마음이 설레인다며 웃었다. 통일이 되는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 그들의 러브 스토리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않겠지?... 그들의 재회가 무척 궁금해났다. 언제 그날이 올지 마음이 안타깝기만 했었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