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 실화] 그곳에는 나의 혈육들이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흑룡강성 벌리현, 그 곳 현성에서도 30키로나 떨어진 산 아래 오붓한 마을 후춘이란 고장이다. 일백여 세대가 사는 마을에서 우리 집은 제일 앞줄 동쪽으로 있었다. 앞을 내다보면 삼면이 넓은 벌이요, 뒤를 돌아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야산이 보인다. 봄이면 들에는 민들레며 미나리이며, 쑥 같은 자연산 나물들이 많이 돋아나고, 산에는 자연산 도라지, 더덕, 취나물, 고사리, 모기 버섯, 소나무 버섯 등 자연산 건강 식물들의 낙원이다. 그 옛날, 그 어느 때인가부터 조선(북한)에서 건너와 이 곳에 정착한 우리 선조들이 개척해 놓은 땅이다. 그야말로 광개토(廣開土)이다.
나는 60여 년 전에 찍은 나의 부모님의 색 바랜 결혼사진을 보면서 가끔 아련한 추억을 더듬어보게 된다. 부모님의 말에 의하면, 조선후기 산이 너무 많은 함경도와 평안도 유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찾아 청나라의 봉금령을 어기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건너와 만주 땅을 개척했다고 한다. 강 사이의 작은 섬으로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목숨을 걸고 도강을 한 것이다.
고향이 함경북도인 작은 할아버지도 다른 유민들과 함께 자주 만주땅을 넘나들었다. 작은 할아버지가 만주땅에 터를 닦을 의향을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할아버지는 작은 할아버지를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열일곱 살인 아버지를 따라 보내셨다.
그 후, 어느 해인지 자세히 모르나 아버지는 군대에 갔었고, 거기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3년 군복무를 마치고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배치를 받으셨다. 성격도 소탈하시고 미남이시던 아버지는 그 곳에서 하얼빈사범대 출신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여 1956년에 득녀하셨다.
그 때만 해도 도시생활이 더 힘들었던 시기여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땅 넓은 시골마을로 내려가자고 설득했단다. 그리하여 산도 있고 넓은 벌판이 훤히 내다보이는 후춘이라는 시골마을로 내려갔다. 큰오빠, 둘째 오빠, 나 그리고 동생 모두 그 곳에서 태어나 자란 정든 고장이다.
후춘에서 중국어도 능통하고 활동가인 아버지는 마을 일을 보며 늘 외교를 다녔다. 사범대 출신인 어머니는 우리 오남매를 키우면서도 아버지의 내조를 등안시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류들을 직접 챙겨주기도 하고 회의 자료 같은 것들을 써주기도 하였다.아버지는 조선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떠나 혼자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였지만, 그 만큼 조선에 있는 혈육들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였고 생활에 대한 열정이 높았었다. 어릴 적 기억에, 아버지는 손수 사진액자들을 정리해서 정연하게 걸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가끔씩 조선에서 보내온 혈육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그 쪽 혈육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슴에 훈장을 빈자리 없이 가득 달고 찍은 큰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면서 전쟁에서 네 번이나 생사고비를 겪으셨다는 이야기, 원래 벌리현 정부에서 비서로 계셨던, 글씨도 멋지게 쓰시고 그림도 잘 그린다는 삼촌의 이야기와, 사할린으로 시집을 간 예쁜 고모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어려웠던 6,7십년 대었지만 아버지는 조선에 계시는 혈육들에게 이불감이며 옷감들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중국공산당원이라서 마음대로 조선을 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이렇게 또한 편지왕래로써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며 언제 어디서든지 혈육들이 함께 모여 살 그날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부모형제들과의 상봉을 그리며 30여년을 마을 일들을 돌보며 열심히 사시던 어버지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눈을 감기 전에 조선에 있는 부모형제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때 18살이던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후에 꼭 조선에 있는 내 혈육들을 찾아 아버지가 이루시지 못한 꿈을 이루리라 마음먹었다.
그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평양에 계시는 삼촌께 그리운 정을 듬뿍 담은 편지를 보냈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지에는 뜨거운 혈육의 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삼촌의 답장에는 우리 가족의 족보도 함께 적혀있었다.중국이 개혁개방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80년대 초에 언니와 큰 오빠는 북한을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교직에 있었고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가지 못했다.) 직접 만나 보니 마음이 또 다르더라고 얘기했다. 갈 때 친척들에게 나눠줄 선물도 많이 가지고 갔지만, 판매할 생각으로 가져 간 물건들도 일부는 더 나누어줬다고 말했다.
북한 식당이 처음 중국으로 진출했을 때, 나는 북한아가씨들의 공연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거센 파도마냥 밀려오는 듯하였다. 마치 혈육을 만난 듯 반가웠고, 이런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었다. 역사가 만들어 놓은 비극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오늘까지 겪고 있는 백의민족이 안타까웠다.
그때로부터 나는 자주 북한식당에 드나들게 되었다. 나는 요녕대 단기어학연수 상담을 담당하였는데 북한유학생 학부모의 청탁으로 중국어강연대회에 참석할 북한유학생에게 요녕대 석사학생을 지도교원으로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그 강연대회에서 그 유학생이 일등을 할 줄이야. 유학생학부모는 감사의 뜻으로 그 유학생아버지의 생일파티에 초대하였다. 거기에는 20여명에 달하는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대표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사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생일상을 굉장히 잘 차렸다. 여러 가지 과일과 떡, 그리고 순대로 장식을 한 생일상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김치, 더덕무침, 모듬 튀김, 가자미 식혜, 소고기 볶음, 평양냉면…
눈에 익은 우리 민족의 음식들이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풀어주는 듯 테이블을 장식하였다. 술은 많이 마시면 나쁜 점이 있는 반면에 어색함을 풀어 주고 속심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우리는 서로 권하고 건배하면서 동일한 문화의 추억을 더듬어 갔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오락이 시작되었는데 주인공 아저씨와 서빙 아가씨가 어느새 단장을 하고 나왔는지, 이 도령과 춘향의 역을 하고 <사랑가>를 불렀다. 같은 노래도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더욱 감칠맛이 나고 애잔하게 느껴졌다. 나도 뒤질세라 북한노래를 열창하였다. 내 원적이 함경북도 회령군이라는 말을 들은 사모님들은 김정숙 어머니의 고향이라며 나와 이야기도 곧잘 나누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크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반주에 맞춰 각자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역시 우리 민족의 끼를 속이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9살짜리 남자애가 부른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 노래 소리는 마치도 통일을 소망하며 외치는 우리 민족의 목소리만 같이 들렸다.
동족으로서 문화의 뿌리는 같지만 분단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문화와 생활환경의 차이로 생각과 습관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또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이 됐다.
그 후에도 나는 자주 북한 대표사모님들과 식사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명절도 같이 쇠곤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한국은 자본주의이지만 민주주의 사회이며,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갈망하고 있으며, 조선(북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남북이 통일 되어 그 지혜를 합치고 지하자원을 잘 활용한다면 그 역량력이 거대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들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을 겨눈다는 것은 우리 후대들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인가고 말했다.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맡겨진 미래 과제중의 하나이다.
나는, 꺼져가는 통일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정치를 떠나서 이렇게 문화와 예술의 공간에서 동질성을 찾아 소통을 잘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놓인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언젠가 북한의 대외무역대표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국장님은 50여세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고, 나머지 네 명 일행은 40대 초반으로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국장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조국이 이렇게 경제가 어려워진 주요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아마도 주 원인은 미국의 대북금융제재 때문이지 아닐까요? 조선도 중국처럼 경제개방을 한다면 발전 속도가 엄청 빠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 말을 들은 국장은 중국에서 이렇게 말하는 조선족은 처음 본다며 감동되어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북한에 있는 우리 혈육들의 이야기며, 북·중 무역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많이 나누었다.
북·중 변경도시마다 무역항목이 다르다. 농산물수출입을 위주로 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각 종 생활용품과 의류무역을 하는 회사도 있고 석탄을 수입하는 회사, 관광업을 위주로 하는 회사도 있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잘 협력해나갈 것인가를 호상 교류하기도 하였다.
대화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다. 즉 서로가 뜻이 통해야 오해가 없다. 그리고 경청하는 자세부터 가능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화 속에서 동질성을 이끌어 내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에 그 중의 한 남자가 농반 진담 반으로 나에게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북한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존칭어로 "선생님"이라 불렀다. 나는 나의 혈육들을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사람을 뜨겁게 포옹해 주었다. 대외무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라고 응원해 주면서.
정치는 민감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경제는 부드럽게 흘러가 충분히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활성화와 소통을 통해 우리는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빨리 열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