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탐방 7]한낙연을 찾아 수천리
2015-06-28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화로 -무한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귀국하여 곧바로 무한에 도착하였다. 그는 무창의 명월교순직회관에 있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동북항일구국총회는 주은래의 영도하에 있었는데 류란파가 서기를 맡았고 한낙연도 당조성원이였다.
당시 기관 간행물인 <반공>﹙反攻﹚잡지는 공산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고 일제침략을 반대하고 규탄하는 보도를 했고 발행부수도 최고 3천여 부에 달했다. 화가인 한낙연은 잡지의 표지그림을 그렸는데 대표적 작품은 <우리의 고향을 보호하자>, <노호하는 로구교>, <우리나라를 보위하자> 등이다. 한낙연은 또 '노예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 '전민항전'등 거폭의 유화를 창작하여 한구세관청사와 무창 황학루에 걸어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고무 격려하였다고 한다.
한낙연은 자주 장강을 건너 한구 의화로﹙怡和路﹚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 여작가이고 신문기자인 스미들리와 연락을 취하면서 전선구호 일꾼 양성사업과 팔로군에 보낼 약품 구입도 도와 주었다. 그밖에도 뉴질랜드 작가 루이애리﹑ 미국의 에드가스노 등 외국의 진보적인 인사들과 왕래하면서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
아열대습윤계절풍기후에 속하는 무한은 무덥기로 사천성의 성도﹑강소성의 남경과 함께 중국의 '3대화로'라고 불린다. 여름철 기온이 섭씨42°까지 오른다니 그 정도를 우리 동북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중경에 있는 박호만회장의 조카며느리의 소개로 동사자인 무한에 있는 판경리가 커다란 선물꾸레미를 들고 호텔로 찾아왔다. 꽤나 곱살하고 성질이 시원한 젊은 여성이였다. 그는 전문 차 한대를 내여 우리를 안내해주기로 하였다. 밖에서는 보슬비가 잔잔히 내렸으나 우리들의 심정은 기쁘기만 하였다.
우리는 국민혁명군3청유적지인 무한시무창구역현화로﹙悬华路﹚에 있는 무한시제44중학교를 찾았다.학교 학생기숙사 앞대문으로 들어가 운동장 바로옆에 있는 2층건물이 우리가 찾는 건물이였다.
건물 앞뒤는 아파트에 막히고 정면이 길 쪽으로 열렸는데 동으로 주조한 곽말약의 반신 조각상과 검은색 대리석 기념비가 깔끔하고 낮다란 울바자 안에 세워져 있었다. 전반 건물은 그 보존은 물론 주위의 환경도 아주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였다. 70여년전 한낙연이 드나들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던곳에 발길을 멈추고 그때를 상상하며 우리는 머리를 숙여 그의 혼이라도 위로 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무한의 명물 황확루가 자리잡고 있었다.아직 유람철이 이른데도 사람들로 붐비였다. 황학루는 호남의 악양루﹙岳阳楼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라고 불리운다. 황학루는 해발 61,7메터인 타산꼭대기에 세워졌는데 청나라 때의 통치루﹙同治楼﹚를 모방하여 설계하였다.학의 날개와 같이 건뜻 들린 60여개의 처마와 10만여 장의 황금색유리기와는 마치도 황학이 하늘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모양을 방불케 하는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과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비할 데 없었다.
점심에는 판경리가 찾아와 무한에서 꽤나 이름 있다는 식당에 우리를 청했다.고마운 것은 아예 술은 마시지 않고 음료를 주문한 것이었다. 모주석께서 즐겨 자셨다는 무창어도 맛보았다.
식당 한쪽에서 한창 결혼식이 치뤄지고 있는지 꽤나 분주했다. 옆에 앉은 판경리의 조수한테 요즘 남자가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쯤 드느냐 넌짓이 물으니 주저없이 1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이 아니겠지만 아파트를 사고 자거용까지 사고 결혼하는 시대이고 더구나 무한 같은 대도시는 집값이 어마어마하니 그럴 법도 할 것 같았다. 하여튼 요즘은 남자들이 살아가기가 무척 힘든 세월이니 세상 남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다가는 밥은 고사하고 죽물도 못 얻어먹는 신세로 되기가 어렵지 않다.
이튿날에는 성이 역씨라는 젊은 기사가 우리를 안내했는데 표준말을 잘하여 알아듣기가 퍽 쉬웠다. 비록 나이는 어린데도 어찌나 열정적이고 부지런한지 우리의 짐짝도 제가 먼저 건뜻건뜻 들어 주었다.양선희씨가 딸이 있으면 사위로 삼고 싶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우리는 기사의 안내로 한구세관청사에도 가보았고 동북항일구국총회가 있었다는 무창의 의화로﹙怡和路 지금은 상해로라고 고침﹚에도 가보았다. 자료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무창시 명월교 순직회관이라고 하였는데 명월교라는곳을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부근에서 헤매다 우연히 민간적으로 문물보호사업을 한다는 성이 범씨라는 선생을 만나 이야기 했더니 그는 우리를 데리고 청풍항﹙清风巷﹚으로 갔다. 자그마한 골목 어구에 청풍항이란 골목표식이 세워져 있었다.그의 말에 의하면 한자로 청풍명월﹙清风明月﹚함께 쓰이는데 청풍항이 있으면 꼭 명월항도 있다는 것이다. 里, 街, 巷, 弄은 모두 같은 뜻인데 지방마다 달리 쓴다. 범선생을 따라 한참을 돌았으나 명월항은 찾지 못했다. 부근에 낡은 집들을 금방 허물고 정리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십분 가능하다고 범선생은 말했으나 확정할 수는 없는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무창청도로7호에 있는 무한기독교청년회사무실에 들렸다. 한낙연의 부인 류옥하는 1938년에 이곳에서 일하였는데 로공부﹙劳工部﹚는 등유지﹙邓裕芝﹚가 맡았고 농촌부는 류옥하가 책임지고 호북、사천등곳에서 활동하였다.우리가 책임자를 만나자고 하니 비서가 손님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느낌으로는 우리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거의 한달 동안 사처로 다녔지만 처음으로 당하는 문전박대였다. 허나 방법이 없어 그곳에서 나와 무한팔로군판사처유적지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사오십 되어 보이는 싹싹한 성이 소씨라는 자료실 주임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조선족이라고 하자 그는 서랍에서 연변의 저명한 소설가인 김학철선생의 문집과 명함장을 내놓으면서 접대 이분이 다녀갔다고 말하였다. 김학철선생의 아들 김해양씨의 명함이었는데 아마도 조선의용군에 대한 자료수집으로 찾아온 것 같았다. 소주임은 우리의 말을 듣고 자기들한테는 그런 사진들이 없고 혹시나 무한시당사판공실에 찾아가보라며 당사판공실 팽주임한테 전화를 넣어 주었다.
무한시위 맞은 켠에 있는 사무실에 찾아가니 역시 마찬가지로 헛수고였다. 잠간 쉬는 사이에 자료실에 있는 1938년 신화일보를 들추어보았더니 조그만 '반공'잡지에 광고가 실렸는데 한낙연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이 두 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낙연의 유관자료들을 부탁하고는 한구 역전으로 나왔다.
한구에서 남경까지3시간 30분, 고속열차는 시속250키로 속도로 기분 좋게 달렸다.
상해미술전문학교
장강하류의 남안에 자리잡고 있는 남경은 우리나라 동부지역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북경﹑ 서안, 개봉﹑ 락양과 함께 중국의 5대고도라 불린다.
남경예술학원 전신은 상해미술전문학교이다.일찍 강유위의 개혁적인 입장을 전수받은 류해속은 1912년에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한낙연은 1921년3월에 이 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우등생으로 1924년1월15일에 졸업하였다. 그의 동기생인 로소비는 그의 인상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그는 산조각이였다.그는 항상 젊고 활발하고 강인하며 생명력이 남쳤다. 그는 키는 다소 작았지만 그리스 아폴로신 같은 남성미를 갖춘 아름다운 인체를 지녔다. 그는 항상 기마복을 입고 손에 채찍을 들고 다녔다. 그는 사교수단이 아주 좋았으며 사람을 정확하게 보는 안목을 지녔다."
1924년 1월25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일월 십오일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두 청년이 있다. 한 사람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본적을 둔 김복형군이고 또 한사람은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한 한광우﹙한닉연의 본명﹚군인데 중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4년의 과정을 항상 우등으로 지내고 이제 졸업한 것이다. 한광우군은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으로 가까운 시일안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국에 들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기사와는 달리 그는 처자식과 부모가 있는 고향 룡정으로 가지 못하고 당조직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하여 봉천으로 갔다.
그리고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락연의 동창생인 김복형군도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후 중국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안창호선생이 상해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비서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림시정부에도 관여하였다고 한다. 광복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 그대로 눌러앉은 김복형은 독립운동의 공적을뒤늦게 인정받아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고 한다.
2005년 8월15일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은 한낙연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표창장은 이렇게 썼다. "고 한낙연 위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 노력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이에 표창함"
남경예술학원으로 찾아가 정문에 들어서니 상해미술전문학교 옛대문을 복제한 기념건물과 여러 가지 특색 있는 모형과 조형물들이 자태를 뽑내 예술학원의 풍치를 한결 돋궈주었다.
예술학원력사연구사무실﹙校史办﹚에 들어서니 체격이 훤칠하고 얼굴이 동그랗고 젊었을 적엔 미인이었을 50대 마해평﹙马海平﹚주임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가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자 그는 우리학교에서 그런 인물이 나온 것은 참으로 자랑찬 일이라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도와 줄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한낙연의 이름이 들어있는 학적부의 당안 번호를 알려 주면서 상해시 제2당안관에 원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 혹시 우리가 필요한 자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면 우리를 데리고 댁으로 갔다.
초봄인지라 남경의 날씨는 차갑고 스산했다. 2층으로 된 방안은 조금은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예술학원선생의 집답게 아주 개성적이고 분위기 있게 장식되어있었다. 그가 내준 전문 예술학원 역사를 쓴 책에는 이렇게 썼다. "한낙연은 20년대 초에 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졸업 후 그는 혁명사업과 예술사업에서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마선생은 앞으로 학교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서 한낙연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그의 전반 혁명일생과 예술일생을 조명할 것이며 학교 내는 물론 대외적인 선전을 가강할 것이며 가능하면 7월에 룡정에서 열리는 세미나에도 참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식사까지 안배해주고 일행을 남경사범학원까지 모셔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였다.
남경사범학원의 전신은 남경금릉여자대학이었다. 남경금릉여자대학은 20세기초에 미국교회조직에서 련합으로 세운 대학이다. 대학 건물은 1922년에 시작하여 건설하였는데 미국건축설계사 머베이﹙墨痱﹚와 중국건축설계사 려언직﹙吕彦直﹚선생이 함께 중국전통적인 궁전식건축풍격을 모방하여 설계하였다. 금릉녀자대학유적은 2006년 국무원으로 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명명되였다.
1925년 한낙연의 부인 류옥하는 이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비록 당원은 아니지만 아주 지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이었고 한낙연에게는 훌륭한 혁명적 동지였고 반려였다. 또 아이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한낙연이 불행히 세상을 뜬 후에도 그는 여자 홀몸으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간고하고 이악스레 살아왔다. 특히 전례 없는 문화대혁명시기에 그도 여러 가지 모진 시련과 난관에 부딛쳤지만 여자의 연약한 몸으로 다 이겨 냈다.
1950년 나라에서는 그들 가족을 북경에 안치하였다. 1953년부터 류옥하는 외교부복무부의 파견을 받고 북경주재 쏘련,파란,알바니아등 대사관에서 영어교수를 하였다. 이 시기 류옥하는 남편이 남겨놓은 135폭의 유작을 분류하고 번호를 달고 규격과 년대를 밝히는 등등 기초작업을 진행하여 하나의 완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이 귀중한 유품을 무상으로 선뜻이 나라에 기증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낙연은 일생을 조국과 인민을 위해 분투하였다. 그는 한 개인인 것이 아니라 나라와 인민에 속한다. 때문에 그의 그림도 응당 나라의 것이고 인민의 것이다."
지금 중국국가미술관에는 류옥하가 기증한 한락연의 유작 135폭이 소중히 수장되어 있다. 류옥하는 돌아가는 날까지 오직 한낙연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었다. 그의 불같은 사랑과 헌신정신이 업었다면 한낙연은 아마 여러 가지 큰일들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기에 성공한 남성의 뒤에는 언제나 헌신적이고 현숙한 녀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국부라 부리는 신해혁명의 선구자 손중산 선생의 무덤인 중산릉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명효릉이 자리 잡고 있다. 명효릉 은 남경종산남쪽기슭의 독룡부에 위치해 있는데 명조의 개국황제인 주원장과 황후 마씨의 무덤이다. 무덤공정은 흥무9년 즉 기원 1376년 부터 시작하여 무려 30여년의 시간을 들여 건축하였는데 그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였다. 그 둘레만도 45리 되는데 현존해있는 고대 황제릉 가운데서 제일 큰 릉중의 하나이다. 명효릉은 그 기세가 웅위롭고 모양과 형태가 독특하다고 한다.특히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지하궁전은 그 신비한 색채로 하여 더욱더 수많은 해내외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다.
2003년7월3일 세계연합국 교육과학문화조직에서는 명효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