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탐방] 한낙연을 찾아 수천리 6

2015-04-30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보탑산  

1938년 무한에서 활동하던 한락연은 당시 중국혁명의 심장이었던 연안으로 갈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해 10월 주은래와 곽말약 등이 영도하는 국민혁명군제3청에서는 문화예술일군들을 조직하여 연안을 방문하였다.
 
한락연도 그중 한사람으로 연안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안여자대학에서 《항일전쟁시기 민족문화예술》이란 제목으로 강연도 하였다. 모택동은 요동초대소에 찾아와 한락연 일행을 접견하였다. 비록 짭은 만남이었지만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이시기 연안에도 많은 조선족열혈청년들이 있었는데 항일군정대학음악교수로 있던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한 정률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조선족으로서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두 사람이 연안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높지만 아직까지 그렇다할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연안은 혁명의 성지로서 수많은 진보적 청년들이 동경하고 불원천리하고 이곳에 와 진리를 탐구하였다.
 
12시20분 중국혁명의 요람 연안으로 가는 서안-연안행 버스는 정시에 출발 했다. 번잡한 서안 시내를 겨우 벗어나 한참을 달리니 벌써 서북지방의 특이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초봄이라서인지 산은 어딘가 모르게 처량하고 황폐해보였다. 그래도 드문드문 겨울밀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다락밭들이 계절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듯 그 모습을 자랑했다. 연안에 가까워 올 수록 황토골짜기는 더더욱 깊어지고 좁아졌다. 버스는 동굴 속을 빨려들었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오불고불 타래길을 숨차게 오르내리더니 우리를 연안시내에 내려놓았다.
 
연안은 보탑산﹑청량산﹑봉황산등 산으로 둘러 싸였고 연하가 동으로 감돌아 흘러간다. 동쪽 보탑산에 아홉층으로 된 연안의 상징-보탑이 있고 동북쪽 청량산에는 만물동과 사철 푸르른 소나무숲이 있다.
 
1935년 10월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로농홍군을 거느리고 2만5천리장정을 하여 섬북에 도달하였다. 그때로부터 연안은 중국의 심장으로 되여 중국혁명의 사령부로 되였고 승리의 발원지로 되었다.
 
우리는 한락연과 많은 혁명가들이 다녀갔던 역사가 깊은 연안교제호텔유적지로 찾아 갔다. 이 호텔 전신은 중화쏘베트공화국중앙정부서북판사처외교부 초대소로서 보안성에 있었다.
 
1937년5월 초대소는 중앙기관과 함께 연안성내의 대동문에 터를 잡고 이름을 섬감녕변구정부교제처로 바꾸었다. 에드가스노﹑스머트라이﹑ 노르만 뻬이쮼﹑ 루이애리 등 국제우호인사들과 위립황﹑ 진가경﹑ 로사﹑ 황연배등 유명 인사들이 선후로 이곳에 머물렀다. 교제처는 우리당의 외교사업과 통일전선사업을 위하여 중요한 역사적 작용을 하였다. 현재 교제처 유적에는 작은 회의실 하나와 황토요동 십여 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가로등이 명멸하는 산기슭을 찾아가니 봉황산삼림공원이었다. 화강석으로 다듬은 계단을 타고 절정에 오르니 첫눈에 불빛이 령롱한 보탑이 보이였다. 그 아래로 구불구불 채색띠 같은 연안시의 야경이 황홀하였는데 현대화도시로 향해 몸부림하는 오늘의 연안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길가에서 폭죽소리가 요란하여 살펴보니 상사집에서 상객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우리 곳 같으면 설명절이거나 결혼식 같은 기쁜 날에만 터치우는 폭죽을 이곳에서는 상사에도 터치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아직도 화장을 하지 않고 토장을 한다고 한다. 아마도 고원지대라서 쓸모없는 땅이 많은가 보다.
 
중국혁명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연안혁명박물관을 나와 일행은 연안시당학교 뒷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연안녀자대학 유적지를 찾아 갔다. 연안중국여자대학은 1939년7월20일에 세워졌는데 우리당에서 전문 여성간부를 배양하기위해 세운 첫 번째 여성고등학교였다.왕명이 교장을 맡았는데 두기에 거쳐 근 천오백여명의 학원을 배양하였다.
 
1941년8월 중공중앙에서는 여자대학과 택동청년간부학교 그리고 섬북공학을 합병하여 연안대학을 설립하였다.
 
유적은 연안의 전통적인 땅굴요동이었는데 여러 칸이 남아 있었고 일부 곳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부쩍 호기심동해 연안당학교에서 퇴직했다는 황선생의 요동집에 들어가 보았는데 칠팔평방미터되어 보이는 방안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하였다. 이전에는 누런 황토가 그대로였는데 지금은 새하얀 도료를 칠하여 방안이 훨씬 환하다며 황선생은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는 덥지 않은 것이 요동방의 우점인데 황토고원지대 토배기들인 자기들은 아파트를 비워두고 양주가 이곳에서 산다며 자랑스레 말하였다.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그곳을 나와 조원과 양가평도 둘러보며 로일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모습들을 체험했고 중국혁명을 위해 바친 그들의 업적을 되새겨도 보았다. 그러면서 연안의 어느 곳엔가 남아있을 한락연의 숨결과 발자취를 위로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중경에서 삼협까지
 
다음 목적지인 중경까지 가려고 서안기차역전에 나가니 발을 옮겨 디딜 자리도 없이 붐비였다. 인구가 많다는 우리나라 실정을 이번 걸음에 제눈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계획생육정책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절실히 느꼈다.
 
중경은 장강상류에 위치한 가장 큰 종합적공업도시로서 서남지구 수륙교통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뿐만 아니라 중경은 항일전쟁시기와 해방전쟁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이 혁명투쟁의 업적을 쌓은 유서깊은 곳이다.
 
중경역에 내리니 중경시정부부문에서 사업하는 박호만 회장이 누이 아들인 김용걸씨가 우리를 마중하고 호텔까지 배치해주었다. 중경시당안국에 한락연에 대한 자료가 있으면 도움을 주라고 미리 연락까지 해놓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전 번에는 직접 중경시 도서관에 찾아가 우리가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 복사까지 하여 보내 주었다.
 
아침을 먹고 중경시당안관에 찾아가니 리씨라는 부관장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무한이 함락후 1938년 9월말 동북항일구국총회는 상급 당의 결정에 좇아 중경으로 옮겼다. 그해 10월에 동필무의 지시로 새로운 당조를 세웠는데 한락연은 그중 한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사업가운데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경상적으로 주은래﹑동필무﹑등영초등 남방국 지도자들에게 회보하고 지시를 받았으므로 항일운동과 통일선전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미국 콜롬비아대학 사회 학부를 석사로 졸업하고 귀국하여 《여성청년회 전국협회》에서 항일구국사업을 하던 광동 처녀 류옥하와 결혼하였다. 우리는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고 중경촌17호에 있던 《염가로점》﹙阎家老店﹚유적과 《반공》잡지편집부와 인쇄소사진들을 부탁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금의 重庆市两路口路5号에 있는《송경령옛집전람관》바로 옆에 있는 《시얼둔호텔》자리가 바로 《염가로점》자리임을 확인하였다. 그러고도 이국장은 우리를 안내하여 주공관과 중경대한민국림시정부 유적도 참관하였다.
 
저녁에는 김용걸씨 부부가 중경의 특색음식인 마라탕﹙麻辣烫﹚으로 우리를 접대했다. 그의 부인은 비록 한족이었지만 그 생김새나 몸가짐과 태도가 우리 조선족 여성들 못지않게 공손하고 예절 밝았다. 용걸씨는 자기가 기초훈련을 잘 시킨 덕이라고 우스개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 거리에 나오니 산간도시인 중경의 야경이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평원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립체감으로 《천하제일 야경》이라는 이곳 사람들의 말이 과언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중경에서 무한까지는 배를 이용해야 한다. 장강에서 배를 탄다니 모두들 흥분했다. 청장고원의 겔라다인동설산에서 발원하여 도도히 동으로 흐르는 장강、중화민족의 수천 년 역사와 혼이 서려있는 인류문명의 요람 장강、그 누군들 이 위대한 강을 흠모하지 않을 손가!
 
길이가 8키로인 구당협은 삼협 중에서 가장 짧고 좁은 협곡으로서 그 경치가 가장 웅위로운 장관을 이룬다. 구당협구의 강북 쪽에는 녹음이 우거진 백제산이 있고 산머리에 붉은 담을 두른 백제성이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삼국시기 류비는 륙손에게 대패하여 백제성에 퇴각하여 거의 죽게 되였는데 림종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국사와 아들을 맡겼다고 한다. 류비는 기원223년에 이곳에서 운명하였다. 후에 리자성、장충헌등 많은 역사명인들도 이곳에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백、두보、백거의 등 시인들이 이곳을 다녀가며 시를 지어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가작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 리백의《아침에 백제성을 떠나서》이다.
 
채운속의 백제성을 아침에 떠나서 천리길 강릉땅을 하루에 돌아왔네
원숭이 울음소리 량안에 구슬픈데 돛배는 어느덧 만첩청산 지났어라
 
2등창이라 하지만 발동기소리가 온밤 요란하였다. 스피카에서 구만계﹙九湾溪﹚를 유람한다고 안내하였다. 늦게 일어난 통에 모두들 차려놓았던 만두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배를 내렸다. 체면이고 뭐고 가릴 새 없었다. 굶으면 량반이 없다는 속담이 꼭 들어 맞는다.
 
이물에 룡두를 조각한 좁고 긴 배에 두줄로 올라 탔다.이곳 풍경 역시 삼협의 여느 풍경과 같이 좁고 험악하고 깍아지른 듯 하였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조금은 스산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신비한 매력에 사람들은 절로 감탄하였다. 안내원 아가씨가 왼편의 높고 아츠란 벼랑을 가리키며 저곳에서 사람의 관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바라보니 과연 낮은 동굴처럼 보이였다. 전날 소삼협의 안내원아가씨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먼 옛날 삼협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관을 벼랑에 있는 동굴 속에 넣었다고 한다. 더 높은 곳의 벼랑의 동굴일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하였다.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는 것 은 어떻게 무슨 물리적 방식으로 사람의 관을 그처럼 높은 곳에 넣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또 한 가지 신비한 이야기는 한 젊은 여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원숭이더라는 것이다.
 
신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덧 삼협 땜에 이르렀다. 무려 7년이란 시간을 드려 건설한 삼협 땜은 갈주패 땜을 이어 장강에 건설한 수리와 발전과 항해 및 유람을 겸한 또 하나의 종합적인 수리시설이다. 삼협 땜은 일찍 손중산선생 때부터 구상하던 방대한 수리공사였는 데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거쳐 당대에 완공하였다. 이민수 100만이상이고 건설비용이 수백억이니 그 방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삼협땜 건설과 함께 수만톤급의 배들도 중경까지 거침없이 오르내릴 수 있으니 장강은 황금수로의 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었다. 삼협 땜은 바햐흐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과 행운과 기회를 가져다줄 삼협땜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보며 우리는 의창시로 달리였다. 의창은 갈주패와 삼협땜의 건설에 힘입어 오늘 전반 호북성에서 무한다음으로 실력이 강한 도시로 자리매김되었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의창을 지나 우리는 무한을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