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탐방] 한낙연을 찾아 수천리 5
김동수 전 용정시조선민족민속발물관 관장
2015-03-05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심수현 당안국 왕국장이 차를 몰고 우리를 뻐스역까지 바래주었다. 아름다운 산간도시의 아침은 조용하고 더없이 쾌청하고 가슴 터질듯 시원하였다.
버스는 시가지를 벗어나 어느새 좁다란 골짜기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다.이곳은 구릉과 산이 엇갈린 지형으로서 땅굴집이 있는가하면 층계식으로 된 다락밭도 있고 한참은 꽤나 넓은 벌도 보이였다.올해 가문 기온에서도 밭에서는 파릇파릇 겨울밀이 살아나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원곡﹙垣曲﹚역부근 간이점에서 대충점심을 먹고 우리는 맨츠﹙渑池﹚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당시 한락연은 무한을 출발하여 서안과 락양을 거쳐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지만 우리는 반대로 그의 흔적을 따라 남하하는 중이다. 길은 점점 나빴다. 오래지 않아 황하를 건는다니 마음은 저도 몰래 흥분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하류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서 자고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전을 벌리었다.
버스가 먼지가 뽀얀 좁다란 황토길을 빠져 나가자 눈앞에 시막의 오아시스 같은 넓고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구역은 소랑저호수﹙小浪底﹚상류구역으로서 황하가 이처럼 맑다는 것이었다. 늘 머리속에 싯누런 흙탕물로 기억되던 황하의 맑은 물에 손을 잠그니 차거움보다는 끝없는 감동의 물결이 마음에 차넘쳤다.
당지 사람들이 황하대교라 부르는 좁고 긴 다리를 건느니 곧바로 하남성맨츠현 남촌나루터 였다. 한락연은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산서성경내로 들어갔다. 당지 백성들은 옛날 나루터 자리는 소랑저호수건설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없다고 하였다. 부득불 우리는 관광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나루터와 남촌마을 어귀에서 한락연의 자취를 느껴보고 사진을 남겼다.
맨츠현성까지 100원을 주기로 하고 우리는 작은 봉고차를 탔다. 도중에 수석관이 있어 잠간 들렸다. 뚱뚱한 여주인의 말에 따르면, 전부 황하석이라 하는데 그 진가는 딱히 알 수 없었으나 모양이나 문양 색갈이 매우 아름다웠다. 사실 나 역시 수석애호가였다. 몇 년 전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두만강이나 해란강등 주위의 강들을 찾아다니면서 수석을 주었다. 물론 안휘성의 링삐﹙灵璧石﹚석 같은 진귀한 기석은 없지만 나름대로 수석을 찾아 다니느라면 수석의 3대미﹙자연미﹑ 유일미﹑ 영구미﹚를 만끽하게 된다.
심수현에서 출발하여 고도 락양까지 무려 6섯 시간을 차에 시달려 모두들 지쳐 있었다. 두 여성은 피곤한 기색이 역역하였는데 원래 몸이 약한 경숙씨가 더 피곤해하였다.
1939년 '반공'잡지 제5권 제6기에 한락연은 '서안으로 부터 진남까지'라는 통신을 발표하였는데 이렇게 쓰고 있다. "23일 9시 우리는 락양 금곡원역에 도착하여 친구의 도움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오후에는 제1전구 위사령장관과 참모장을 만나 보았다.---24일 5시반에 금곡원역을 출발하여 7시반에 맨츠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바로 우리가 주숙을 정한 호텔앞거리가 금곡원거리였다. 거리에서 노인들을 찾아 물어보니 지금의 락양 기차역을 이전에는 금곡원역이라 불렀다고 한다. 더 확인해보려고 기차역에 찾아가 당반이라고 간판을 건 가무실을 노크했다. 우리가 한락연에 대해 말하자 그들은 참 대단한 사람이고 너무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50~60년대 금곡원역의 사진을 선물하였다. 기쁜 심정으로 거리에 나와 금곡원거리라고 씌여 있는 도로표식을 사진에 담고 다음 목적지인 팔로군락양판사처유적지를 찾아갔다.
1937년 '7,7사변'이 폭발한 후 일본제국주의는 전면적인 침화 전쟁을 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창의 하에 국공량당은 제2차합작을 하고 광대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였다. 1938년 11월 국민당정부와 협상하고 우리당은 제1전구사령부 소재지인 락양에 팔로군판사처를 건립하였다. 일찍 류소기﹑ 주덕﹑ 팽덕회등 우리 당의 지도자동지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다.
1942년2월 국공관계가 악화되면서 락양의 형세가 긴장되자 판사처를 철소하였다. 판사처유적지는 원래 청나라민가로서 당지 사람들은 '장가대원'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곳은 하남성급문물보호단위로서 1987년부터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는데 락양시의 중요한 애국주의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전람실에는 제1전구사령이였던 위립황이 모택동﹑ 주덕 등 동지들과 함께 찍은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이 전시 되어 있었다.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한 것은 한락연과 각별한 사이였던 루이﹒애리와 그가 타고 다니던 차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다.
뉴질랜드 사람인 애리는 1927년에 중국에 와서 중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여건과 생활을 목격하고 중국국제 기아원 조회를 도와 주었다. 1932년을 전후로 호북송에서 수재민 원조를 도왔고 30년대 중반에 그는 이미 많은 외국의 진보적 인사들을 알게 되였고 홍군을 지원하는 지하공작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를 세워 합작사를 위해 젊은 기술인원을 육성하였다. 그가 설립한 학교들은 배려학교﹙培黎学校﹚라고 불렀다. 한락연은 애리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와 거래하면서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
한락연의 유작가운데는 적지 않은 배려학교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반영한 그림들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우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후에 애리는 많은 중요한 자료들과 사진 그리고 친필원고를 한락연의 부인 류옥화녀사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락양에서 우리가 주숙을 정한 곳은 로구역이고 락양시 정부는 락하를 건너 새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구역은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곳곳에 나무가 우거지고 녹지가 펼쳐지고 거리가 탁 트이어 그야말로 현대화원도시였다.
일행은 락양시 지방지사무실로 찾아가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산서성에서도 그렇고 하남성에 속한 이곳에 와서도 당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모두들 한락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고 우리가 지금 한창 한락연의 자료를 발굴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하북﹑ 산서﹑ 하남성과 섬서일대를 답사중인데 그들의 도움을 청하자 그들은 한락연이라는 인물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놀라운 표정들이였다. 그들은 자료를 뒤적이더니 락양시 해방로 아니면 방점로 부근에 지광루라는 옛건물이 있는데 가능하게 우리가 찾고 있는 위립황사령부유적지일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택시기사가 안내해주는 대로 먼저 방점로에 도착하니 락양시박물관이였는데 새 건물을 짓고 한창 이사중인 것 같았다. 대문 접수실에 있는 로인과 우리가 찾고 있는 지점을 물었다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500미터나가 해방로 입구에 있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십자로 두 세개를 건너 해방로와 중주중로 교차지점 동남쪽에 우리가 찾고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현대식건물에 둘러싸여 큰길에서는 근본 찾아볼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을 꺾어 들어가니 4합원식 옛 건물이 나타났다. 틀림이 없었다. 나와 박회장은 더없이 기뻤다. 사무실을 노크하니 50살 쯤 되어보이는 깔끔한 여성이 우리를 맞아주면서 이곳은 지금 락양시백마사한위고성문물관리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도 박물관에서 문물사업을 한다고 나의 신분과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는 열정적으로 차물까지 부어주고는 '락양서공병영'이라는 소책자까지 선물하는 것이었다.
락양서공병영은 민국3년﹙ 1914년에 착공 1916년에 완공 ﹚에 중화민국총통이던 원세개가 세웠고 그후 오패부가 확건하였다. 1937년 《7.7사변》후 장개석은 이곳에 항일제일전구사령부를설치하였다. 1939년 위립황이 제일전구사령으로 위임되였다. 위립황은 연안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사령부 동쪽에 연안동굴집을 모방하여 푸른색벽돌구조로 된 시음서실﹙惜阴书室﹚이라는 책방을 건설하였다. 1940년 5월 주덕총사령은 두 번째로 이곳에와 위립황과 항일의 대사를 상론하였다. 지금 유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명명되었다.
밖으로 나와 일찍 이곳에 찾아왔던 한락연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이 근방에서 한생을 살았다는 79살 진중문 로인을 만났다. 사합원 서쪽 켠에 한 200년쯤 되어 보이는 큰 나무 한그루가 름름하게 서있었는데 가지에는 얼핏 보면 우리 지방의 줄열콩 껍질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로인에게 물었더니 조각수﹙皂角树﹚라고 하는데 열매를 물에 담근후 그물에 빨래를 하면 거짓말같이 때가 잘 진다고 하였다.
세월은 흘러 흘렀어도 나무는 오늘도 도심의 난잡하고 좁다란 골목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꿋꿋하고 억세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역사의 견증자로 남아 있었다. 락연이의 얼을 담은채…
락양에서 백마사와 룡문석굴을 보지 않으면 한일 후회하며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은 백마사에가 향을 올려야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리지 그렇지 않으면 촌보난행이라는 택시기사의 우스게를 남기고 기차를 타려고 락양역에 도착하였다. 40분 넘어 줄을 서 서안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으려고 하니 표가 없어 우리는 부득불 버스를 탔다. 삼문협시를 벗어나자 눈앞에 황하가 나타났다. 북으로 부터 남으로 흘러오던 황하는 이곳에서 90도로 방향을 꺽어 동으로 흐르면서 하북평원의 광활항 땅을 적셔주고 있다. 섬서성 화인현 경내에 들어서니 도로 왼쪽에 웅기중기한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서악 화산이 였다. 어렸을 때 재미나게 보았던 '화산을 지혜롭게 탈취'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저녁 7시30분 버스는 우리를 서안에 내려놓았다.
고도-서안에서
1940년 한락연은 섬서성 보계에서 체포된 후 서안태양묘문특종구륙소와 섬서성국민당성당부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한다. 이 두 곳 유적지외에도 양호성공관과 서안팔로군판사처유적지는 우리가 서안에서 답사해야할 곳들이었다.
전날에 약속한대로 섬서성당안국 판공실 당주임이 차를 보내왔다. 우리는 먼저 서안시주체거리와 보은거리사이에 있는 태양묘거리를 찾아갔다.
거리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꽤나 나이 먹어 보이는 로인들과 물엇으나 태양묘문집산리13호에 특종구류소가있었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서안시지방지사무실로 찾아가 사업일군이 내여주는 유관자료를 들췄으나 헛수고였다.
우리는 림시로 방향을 바꾸어 먼저 양호성장군의 기념관을 찾았다. 대문밖에 서안사변유적지 양호성공관이라는 대리석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니 문우에 지원《止园》이라고 쓴 작은 문이 나타났다. 지원은 서안시청년로117호에 자리잡고있었는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였다. 당조때에 태극전이던 이곳을 1933년 양호성은 부근의 약50무되는 땅을 사들이고 건설을 시작했다. 그후 양호성은 섬서성정부 참의 리원정선생의 건의를 접수하고 《止戈为武,到此为止》란 뜻에서 이름을 지원이라고 달았다. 1936년 당시 중국공산당대표였던 주은래는 이곳에서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대책을 상의하였다.1983년 섬서성정부에서는 이곳에 서안사변기념관을 건설하고 1985년부터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했다. 기념관에는 양호성장군의 침실과객실,서재등이 원모양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다. 2층 전시실에는 서안사변유관 도편과 유물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우리는 양호성장군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안고 지원을 나와 서안시북신가 새 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서안팔로군기념관》으로 찾아갔다. 서안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곳을 《7현장》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섬서성은행에서 1935년부터 개발하고 건설하였는데 칸만도2천여 칸이 된다고 한다. 1937년초 홍군주재서안판사처는 7현장에 정식 건립되었는데 엽겁영이 총책임자로 되고 장문빈, 리도가 선후로 연락처 비서장을 맡았다. 1946년10월 팔로군주재서안판사처는 연안으로 옮겨 갔다. 1985년1월 유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였다. 오늘 이곳은 서안의 중요한 홍색관광명소로 되여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고 있다. 전람실에서 여러곳을 누비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서안태양묘문특종구류소사진을 발견하였다.
엎딘 김에 절이라고 사업일군과 서안국민당당부 사진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람실에는 그런 사진이 없고 오후에 업무일군들이 출근하면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길가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오후2시 출근 시간이 되자 우리는 직접 관장실로 찾아갔다. 50대 초반의 성이 上宫씨라는 여성관장이 우리를 맞아 주면서 자기들한테는 그런 사진과 자료들이 없고 극히 필요하면 양호성장군의 딸 양정영﹙杨拯英﹚씨가 지금 서안시성정협사택에서 살고 있으니 찾아가보라는 것이었다.
일생에 이런 기회도 드물었다. 유명한 장군의 딸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는 무작정 떠났다.
이리 묻고 저리 묻고 끝내 서안시건국로 성정협사택 37호 1단원 1층 1호에서 살고 있는 양정영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며 70여세 되어 보이는 바깥노인이 누구냐며 경계의 어조로 물었다. 신분을 밝히고 사연을 말했더니 객실로 안내하고 조금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저의기 놀랐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박했다. 솔직히 장군의 딸이니 아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으려니 여겼는데 너무나도 생각 밖이었다.
기척이 나면서 붉은 바탕에 하얀 꽃을 수놓은 조끼를 입은 안로인이 조심조심 객실에 들어섰다. 보는 첫순간 장군을 많이 닮은 것이 알리였다. 후리후리한 키와 불거진 관골﹑그리고 구리빛 얼굴에서는 더없이 강의하고 굳센 의지를 가지분이라는 것이 력력히 나타났다. 알고 보니 다리가 골절되어 오랫동안 투병중인데 요즘 좀 차도가 있다는 것었다. 그러나 정신만은 74세되는 노인같지 않게 명석하고 똑똑하였다.
보통 관례는 먼저 성정협에 연락하고 찾아오는데 어떻게 왔느냐며 의아해 했다. 우리는 한락연에 대해 상세히 말씀 올리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그는 태양묘문거리에 국민당특종구류소가 있었고 섬서성국민당당부는 지금의 섬서일보사부근이라고 확실하게 찍어 말하였다. 또 부근에는 서안고중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근간에 출판한 《양호성전》 두책 을 선물하는 것이다. 내가 싸인을 부탁했더니 거절 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크나큰 도시에서 아는 사람 한나도 없이 어떻게 찾아다니겠냐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소개한다며 전화를 넣었는데 련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투병중인 로인에게 더 심려를 들이기 저어되어 기념사진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나는 비록은 주글주글하고 거칠지만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양정영씨의 손를 잡고 빌고 빌었다. 부디 옥체건강하시라고---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나와 박호만회장이 양정영씨를 만나는 사이에 리경숙씨와 양선희씨가 섬서성당안국에서 기쁜 소식를 전해왔다. 섬서성국민당당부 사진을 찾았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섬서성당안국의 진처장이 직원들에게 특별임무를 하달하여 백사불구하고 머나먼 동북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들의 요구를 해결해주도록 하였다. 참으로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운분들이였다.
7시30분 서안-보계행 고속렬차는 정시에 발차했다. 보계는 섬서성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북﹑서남과 중원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중추이다.
보계시는 국가급위생도시답게 비교적 깨끗하였다. 특히 눈을 끄는 것은 새로 지었다는 보계시시위와 정부청사였다. 건물은 그 부지면적은 물론 규모와 설계﹑모양과 형태가 너무나도 으리으리하고 웅장하여 수도북경의 인민대회당이 울고 갈 지경이였다. 물론 지방재정에 돈이 많아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무청사를 짓는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 나타나는 부정부패이다.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누구도 욕심내지않는 습지와 쑥대밭이었다고 한다. 한 령도가 대담하게 구상하고 이것을 건설하면서 숱한 빚은 졌다는데 어느곳의 빚을 어떻게 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영도는 승급하여 성으로 전근하였다는 것이다.
보계시 당안국에 찾아가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부계통에서 통일적으로 의무식수하러 가고 갓 입사한 젊은 직원이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에게 우리가 찾고저 하는 보계기독교청년회유적 혹은 당안 자료 같은 것을 물었더니 조금은 어리둥절해 했다.
얼마후 책임자가 돌아와 우리의 사연을 듣고 여러곳에 전화를 넣고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식사를 안배했다. 정부판공실에서 부임한 녀국장은 성질이 시원시원하고 꽤나 스타일이 있었다.
식사후 우리는 안배해준 차를 타고 보계시민족종교국으로 찾아갔다. 방씨라는 주임이 우리에게 보계에서 제일 오래된다는 승리로교회와 안시교회에 찾아가보라며 주소와 연락번호를 알려주었다. 승리로교회 책임자인 리예란녀사와 머리가 희슥희슥한 남성분이 우리를 데리고 금태구역에 있는 서광로155번지를 찾아가 옛교회가 이곳에 있었고 교회내에 청년회가 있었다는 것이였다. 더 상세히 확인하려고 우리는 안시교회의 90세되는 조장로를 찾아갔다. 그러나 장로는 없고 지금 교회를 맡아보는 그의 딸이 아버지는 년세가 많은 탓에 많은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대로 나는 그에게 한번 물어봐달라고 청탁하고 전화번호를 남기고 돌아 섰다.
서안시기독교청년회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늬바람에 여러 곳을 물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올해 60여세 전전덕﹙田全德﹚총간사가 우리를 만나주었다. 우리는 한락연에 대해 소개하고 사연을 말하였다. 그는 한락연이라는 이름을 어렸을때 아버지한테서 많이 들은것 같다면서 아버지 이름은 전경복﹙田景福﹚으로 서서안기독교청년회 창시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1940년대에 두 번이나 국민당에게 체포되어 전문 공산당 협의분자들을 투옥하는 태양묘문감옥에 갖히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간을 따져보면 한락연과 함께 갖힐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태양묘문감옥이면 바로 한락연이 갖혔던 감옥이었다. 우리가 보계기독교청년회 옛날사진을 부탁하고 주소를 물으니 전날 승리로교회에서 알려주던곳이 대체로 맞다고 확인하면서 바로 옆에 공업합작사﹙工业合作社﹚보계판사처가 있었다고 덧붙이였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가 생전에 회억록을 출판했는데 시간이 오래서 찾을수 있겠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될수록 꼭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그와 작별했다.
1943년 감옥에서 출옥한 한락연은서안시개통거리﹙开通大巷﹚40호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한락연의 학생이였던 중국화 대가-황주는 그때 자기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고 회억하였다. 엎딘 김에 절이라고 나와 박회장은 서안시남신가개통거리으로 찾아갔다. 어지럽고 좁다란 골목이였는데 당시 집들은 이미 찾을길 없고 해방 후에 지은 낡은 집들이 몇집 있었으나 인차 새집개조를 한다면서 한창 집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골목어귀에 개통거리라는 표식이 있어 사진을 남길수 있었다. 우리는 골목을 한바퀴 돌면서 또다시 한락연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서악-화산은 한락연이 황주를 데리고 사생을 하는 한편 많은 지식을 전수 해주던 유서 깊은 곳이다.
중국화의 대가 황주는 '명화가 대가막의 무지개'란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한선생은 성격이 활달하고 표달능력이 강한 분으로서 구식선생의 일관적인 위엄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매일 나에게 소묘의 보조﹑ 색깔의 요령﹑형체구조의 관찰방법﹑그림의 기법과 방법등을 가르켰다. 그는 또 구라파 문예부흥과 일부 화가와 조각가들의 일생도 들려 주었다."
서안에서 화산까지 120키로, 화산은 5악 중의 하나로서 그 당당한 기세와 장엄함은 그 누구도 비길수 없다. 화산은 또한 도교﹙道教﹚명산으로서 산에는 많은 도교절간들이 있는데 그 은은함을 바라보노라면 자기도 어느새 신선이 된 느낌이다. 화산은 다섯개의 큰 봉우리로 가족을 이루었는데 북쪽봉은 운태봉﹙云台峰﹚﹑동쪽봉은 조양봉﹙朝阳峰﹚﹑남쪽봉은 락연봉﹙落雁峰﹚﹑가운데 봉은 옥녀봉﹙玉女峰﹚﹑ 서쪽봉은 련화봉﹙莲花峰﹚이라 부르는데 그 가운데서 남쪽 봉이 최고봉으로서 해발 2154,9미터이다.
싱가포르 어느 회사와 공동으로 건설했다는 공중삭도는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인데 처음부터 화산의 험요함을 느끼게 한다. 오운봉에서 좁다란 돌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쇠관﹙金锁关﹚에 이른다. 금쇠관 량쪽 쇠사슬에는 숱한 각양각색의 열쇠들이 채워져 있었는데 그무슨 《마음쇠》﹑ 《평안쇠》﹑ 《부귀쇠》﹑ 《사랑쇠》등등 미칭들이 붙혀져 있었는데 사랑이 영원하고 삶이 평화롭고 길하며 복이 넘쳐날 것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염원이었다. 그 가운데서 어부지리를 보는 것은 열쇠를 파는 장사군들이었다. 회산에서 일출을 감상하기가 제일 좋은 곳은 조양봉이다. 일망무제한 아침안개 속을 뚫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불쑥 솟아오르는 일출은 그 광경이 태산의 해돋이와 어깨를 겨룰만하다고 한다. 몸은 비록 지쳤지만 어렸을 때 너무나 재미나게 보았던 《화산을 지혜롭게 탈취》라는 영화의 장면을 직접 목격할수있어 기뻤다. 그러면서 한락연이라는 인간이 어찌 보면 화산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숙여졌다.
인간으로 말하면 화산은 근육이 울뚝불뚝하고 골격이 우람진 남성미에 비할 수 있었다. 생겨난 그 모습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는 산, 비바람 몰아치고 광풍이 불어도 언제나 신음을 모르는 산, 수많은 사람들의 무참한 발길도 한품에 너그럽게 품어주는 산 이것이 곧 화산의 매력이고 웅성의 매력이 아닐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