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방]한낙연을 찾아 수천리 4
김동수 전 용정시조선민족박물관 관장
2015-02-21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릉천(陵川)에서 심수(沁水)까지
속담에 초행길이 어렵다고 하였다. 한낙연의 발자취를 따라 나선 이번 행군은 우리에게는 초행길이자 고난의 길이였다. 그러나 로신선생이 말한 것처럼 길이란 원래 있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주 다니면서 길이 생겨났다. 그러니 한낙연이 개척한 길을 우리가 걷고 있으니 우리는 그래도 행운아이고 그 의의도 자못 깊다고 해야 할 것 같다.드넓은 벌판을 한참을 달려 버스는 층계 식으로 이루어진 다락 밭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어린 시절 귀 아프게 들어보던 "대채전”이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전세기 60~70년대 “공업은 대경을 농업은 대채를 따라 배우자”는 열조가 전국적으로 거세차게 일어났다.
대채는 서북지역 황토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자연 객관 환경의 영향으로 층계식 다락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을 대채전이라고 불렀는데 전국적으로 농촌의 어느 곳에서나 무조건적으로 땅을 파헤치고 대채전을 만들라고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한심한 일이였다.
릉천현은 현재 인구는 24만정도 연 재정 수입은 3억 정도로서 산서성에서 비교적 가난한 현에 속했다.
우리는 현성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숭안사﹙崇安寺﹚를 찾았다. 송나라 때에 세워졌고 명 나라 때에 와서 수건 복구한 숭안사는 산서성의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서 릉천현의 상징으로 되고 있었다.
릉천현당안국 왕국장의 말에 의하면 숭안사는 1930~1940년경에는 국민당제27군 범한걸군부로 사용하였고 후에 한때는 팔로군도 이곳에 주재했다고 한다. 한낙연이 국민당 소장의 신분으로 릉천에 왔으니 틀림없이 이곳에 들렸을 것이다. 검은테 안경을 걸고 소장군복을 입은 름름한 한낙연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용정의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광활한 중국대지를 주름잡으며 산서성의 이 메마르고 거칠은 곳에까지 찾아와 국공합작을 위해 분투하였으니 우리 어찌 그를 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주덕총사령이 하루를 묵어갔다는 평성진남파촌의 농가집과 송백이 우거진 신시묘를 둘러보고 다음 지점인 진성시로 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진성시 당안국 왕국장은 말띠생으로서 나와 동갑이었다. 그는 우리를 안내하여 진성시 옛거리와 모택동 동상이 세워져 있는 무명광장도 돌아보았다. 그는 심수현 사람으로서 원래 당사공작을 하다 당안국에 전근한지 얼마 되지 않은 꽤나 지식이 연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를 열정적으로 접대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 목적지인 양성현과 심수현 당안국에 전화를 걸어 최대의 방조와 도움을 주라고 당부했다.
심수현시가지에 들어서니 건물에 도료색을 칠한 탓인지 여느 도시보다 산뜻하고 아름다웠다.
심수현 당안국 왕국장에게 한낙연을 소개하고 우리가 찾고 있는 국민당93군 류칸﹙刘戡﹚부대의 유적지를 부탁했더니 그는 우리를 데리고 심수현 중촌진으로 가서 묘진장을 소개했다.
그는 상하욕촌에 국민당유적지가 있다면서 무장부 장부장더러 우리를 안내해주라고 부탁했다. 상욕촌에는 국민당이 물러 간후 팔로군병기공장에서 수류탄 손잡이를 건조했다는 회색벽돌로 쌓은 자그마한 건조가마자리가 있었다. 굴안을 들여다보니 2~3평방정도 되였는데 개굴로 사용하는지 짚을 깔라놓은 자리가 그대로 보이였다.
하욕촌의 유적지는 그 규모가 꽤나 방대했으나 파손이 심했다. 아마 이곳이 사령부유적지 같았다. 좌우에 대칭으로 나있는 대문에 들어서니 정면에 사령부로 사용했던 건물이 있고 양쪽으로 병영으로 사용했던 다락식 2층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사령부 맞은켠 정면에는 큰 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아마 이 무대를 이용하여 연설도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벌린 것 같았다.
당지의 올해 80여세 나는 진로인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이곳은 원래 절간이었는데 국민당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사령부로 사용하였고 국민당이 물러간 후 한때는 팔로군의 병기공장으로 사용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1939년 한낙연이 국민당소장의 신분으로 93군을 시찰한 것이 틀림없이 이 곳일 것이다. 기념촬영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한 면으로 기쁘면서도 한 면으로 파손이 심해 어느 아침에 후닥닥 없어질 유적지의 운명으로 침울하기만 했다.
유적지를 나와 잠간 여유가 있어 주위의 당지 백성들의 살림집을 둘러보았더니 참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 춘절에 붙여놓은 붉은색 주련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입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빈부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실 개혁개방 후 부유한 사람은 억수로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등소평동지는 일찍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지고 나중에 공동히 부유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의 가난 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방조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인용 비행기까지 타고 다니지만 사회에 대한 기증은 가련할 정도이다.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지만 세계적으로 제일 린색한 것이 중국의 부자들이라고 한다. 이런 시점에서 나라에서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면서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보조금을 내려보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 발의 피로서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구가 많고 소질이 높지 못하고 지역차이 항업차이가 불균형한 오늘의 사회실정에서 부단히 문화교육을 발전시켜 사람마다 자립, 자강하고 그들의 창조적 정신을 최대한 발휘할 때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전사회적으로 빈곤층에 대한 관심과 방조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회적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상처가 곪기 전에 예방해야지 일단 곪아 터지면 아픈 법이고 또한 막대한 대가도 지불해야 한다.
릉천에서 양성, 심수에 이르면서 여러 곳의 당안국 임직원들의 방조와 관심과 따뜻하고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 참으로 고맙고 잊지 못할 사람들이다.
이 지방에서는 주사위를 던져서 술을 마시는 추이허우﹙吹猴﹚라는 이곳의 독특한 유희를 하였는데 이곳의 일종 술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식상마다 우선 주사위를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한다. 친구는 물론 동료사이 친척사이 손님접대에서도 이 유희를 하는데 자연 분위기가 저절로 무르익고 흥성흥성해서 술판이 둥그러진다고 한다. 우리와는 초보자라고 주사위 하나로 하는 가장 간단한 놀이를 하였고 그들끼리는 여러 개를 가지고 놀았는데 수준이 프로급이었다.
황하를 건너 락양으로
심수현 당안국 왕국장이 차를 몰고 우리를 버스역까지 바래주었다. 아름다운 산간도시의 아침은 조용하고 더없이 쾌청하고 가슴 터질듯 시원하였다.
버스는 시가지를 벗어나 어느새 좁다란 골짜기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다.이곳은 구릉과 산이 엇갈린 지형으로서 땅굴집이 있는가하면 층계식으로 된 다락밭도 있고 한참은 꽤나 넓은 벌도 보이였다.올해 가문 기온에서도 밭에서는 파릇파릇 겨울밀이 살아나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원곡﹙垣曲﹚역부근 간이점에서 대충점심을 먹고 우리는 맨츠﹙渑池﹚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당시 한낙연은 무한을 출발하여 서안과 낙양을 거쳐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지만 우리는 반대로 그의 흔적을 따라 남하하는 중이다. 길은 점점 나빴다. 오래지 않아 황하를 건는다는 마음은 저도 몰래 흥분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하유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서 자고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전을 벌리었다.
버스가 먼지가 뽀얀 좁다란 황토길을 빠져 나가자 눈앞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넓고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구역은 소랑저호수﹙小浪底﹚상류구역으로서 황하가 이처럼 맑다는 것이었다. 늘 머리 속에 싯누런 흙탕물로 기억되던 황하의 맑은 물에 손을 잠그니 차거움보다는 끝없는 감동의 물결이 마음에 차 넘쳤다.
당지 사람들이 황하대교라 부르는 좁고 긴 다리를 건느니 곧바로 하남성맨츠현 남촌나루터 였다.
한낙연은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산서성경내로 들어갔다. 당지 백성들은 옛날 나루터 자리는 소랑저호수건설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없다고 하였다. 부득불 우리는 관광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나루터와 남촌마을 어귀에서 한낙연의 자취를 느껴보고 사진을 남겼다.
맨츠현성까지 100원을 주기로 하고 우리는 작은 봉고차를 탔다. 도중에 수석관이 있어 잠간 들렸다. 뚱뚱한 여주인의 말에 의하면 전부 황하석이라 하는데 그 진가는 딱히 알 수 없었으나 모양이나 문양 색갈이 매우 아름다웠다.
사실 나 역시 수석애호가였다. 몇 년 전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두만강이나 해란강 등 주위의 강들을 찾아다니면서 수석을 주었다. 물론 안휘성의 링삐﹙灵璧石﹚석 같은 진귀한 기석은 없지만 나름대로 수석을 찾아다니노라면 수석의 자연미, 유일미, 영구미를 만끽하게 된다.
심수현에서 출발하여 고도 낙양까지 무려 6섯 시간을 차에 시달려 모두들 지쳐 있었다. 두 여성은 피곤한 기색이 역역하였는데 원래 몸이 약한 경숙씨가 더 피곤해하였다.
1939년 “반공”잡지 제5권 제6기에 한낙연은 “서안으로 부터 진남까지”라는 통신을 발표하였는데 이렇게 쓰고 있다. “23일 9시 우리는 락양 금곡원역에 도착하여 친구의 도움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오후에는 제1전구 위사령장관과 참모장을 만나 보았다.…24일 5시 반에 금곡원역을 출발하여 7시 반에 맨츠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바로 우리가 주숙을 정한 호텔앞거리가 금곡원거리였다.
거리에서 노인들을 찾아 물어보니 지금의 낙양기차역을 이전에는 금곡원역이라 불렀다고 한다. 더 확인해보려고 기차역에 찾아가 당반이라고 간판을 건 사무실을 노크했다. 우리가 한낙연에 대해 말하자 그들은 참 대단한 사람이고 너무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50~60년대 금곡원역의 사진을 선물하였다. 기쁜 심정으로 거리에 나와 금곡원거리라고 씌어있는 도로표식을 사진에 담고 다음 목적지인 팔로군락양판사처유적지를 찾아갔다.
1937년 '7,7사변'이 폭발한 후 일본제국주의는 전면적인 침화전쟁을 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창의 하에 국공량당은 제2차 합작을 하고 광대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였다. 1938년 11월 국민당정부와 협상하고 우리당은 제1전구사령부 소재지인 낙양에 팔로군 판사처를 건립하였다. 일찍 류소기, 주덕, 팽덕회 등 동지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다. 1942년2월 국공관계가 악화되면서 낙양의 형세가 긴장되자 판사처를 철소하였다.
판사처 유적지는 원래 청나라민가로서 당지 사람들은 “장가대원”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곳은 하남성급문화재보호단위로서 1987년부터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는데 낙양시의 중요한 애국주의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전람실에는 제1전구사령이었던 위립황이 모택동, 주덕 등 동지들과 함께 찍은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욱 우리를 기쁘게한 것은 한낙연과 각별한 사이였던 루이﹒애리와 그가 타고 다니던 차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다. 뉴질랜드 사람인 애리는 1927년경에 중국에 와서 중국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여건과 생활을 목격하고 중국국제기아원조회를 도와주었다. 1932년을 전후로 호북성에서 수재민 원조를 도왔고 30년대 중반에는 홍군을 지원하는 지하공작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를 세워 합작사를 위해 젊은 기술인원을 육성하였다. 그가 설립한 학교들은 배려학교﹙培黎学校﹚라고 불렀다. 한낙연은 애리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와 거래하면서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
한낙연의 유작가운데는 적지 않은 배려학교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반영한 그림들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우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후에 애리는 많은 중요한 자료들과 사진 그리고 친필원고를 한낙연의 부인 류옥화 여사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낙양에서 우리가 주숙을 정한 곳은 로구역이고 낙양시정부는 락하를 건너 새 구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구역은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곳곳에 나무가 우거지고 록지가 펼쳐지고 거리가 탁 트이어 그야말로 현대화원도시였다.
일행은 낙양시지방지사무실로 찾아가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산서성에서도 그렇고 하남성에 속한 이곳에 와서도 당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모두들 한낙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한낙연에 대해 소개하고 우리가 지금 한창 한낙연의 자료를 발굴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하북﹑산서﹑하남성과 섬서 일대를 답사중인데 그들의 도움을 청하자 그들은 한낙연이라는 인물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놀라운 표정들이였다.
그들은 자료를 뒤적이더니 낙양시 해방로 아니면 방점로 부근에 지광루라는 옛 건물이 있는데 가능하게 우리가 찾고있는 위립황사령부유적지일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택시기사가 안내해주는 대로 먼저 방점로에 도착하니 낙양시박물관이었는데 새 건물을 짓고 한창 이사중인 것 같았다. 대문 접수실에 있는 노인과 우리가 찾고 있는 지점을 물었다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500미터 나가 해방로 입구에 있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십자로 두 세개를 건너 해방로와 중주중로 교차지점 동남쪽에 우리가 찾고 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현대식건물에 둘러싸여 큰길에서는 근본 찾아볼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을 꺾어 들어가니 4합원 식 옛 건물이 나타났다. 틀림이 없었다. 나와 박회장은 더없이 기뻤다. 사무실을 노크하니 50살쯤 되어 보이는 깔끔한 여성이 우리를 맞아주면서 이곳은 지금 락양시 백마사 한위고성문물관리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도 박물관에서 문물사업을 한다고 나의 신분과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는 열정적으로 차물까지 부어주고는 “락양서공병영”이라는 소책자까지 선물하는 것이었다.
락양서공병영은 민국3년(1914년에 착공 1916년에 완공)에 중화민국총통이던 원세개가 세웠고 그 후 오패부가 확건 하였다. 1937년 “7.7사변”후 장개석은 이곳에 항일제1전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39년 위립황이 제1전구사령으로 위임되었다. 위립황은 연안을 방문하고 돌아와
서 사령부 동쪽에 연안동굴집을 모방하여 푸른색벽돌구조로 된 시음서실﹙惜阴书室﹚이라는 책방을 건설하였다. 1940년 5월 주덕총사령은 두 번째로 이 곳에 와 위립황과 항일의 대사를 상론하였다. 지금 유적은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명명되여 있었다.
밖으로 나와 일찍 이곳에 찾아왔던 한낙연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이 근방에서 한생을 살았다는 82살 진중문 노인을 만났다. 사합원 서쪽 켠에 한 200년쯤 되어 보이는 큰 나무 한그루가 름름하게 서있었는데, 가지에는 얼핏 보면 우리 지방의 줄열콩 껍질 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로인에게 물었더니 조각수﹙皂角树﹚라고 하는데 열매를 물에 담근 후 그물에 빨래를 하면 거짓말같이 때가 잘 진다고 하였다.
세월은 흘러 흘렀어도 나무는 오늘도 도심의 난잡하고 좁다란 골목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꿋꿋하고 억세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력사의 견증자로 남아 있었다. 낙연이의 얼을 담은채…
낙양에서 백마사와 룡문 석굴을 보지 않으면 한일 후회하며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일은 백마사에가 향을 올려야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리지 그렇지 않으면 촌보난행이라는 택시기사의 개그를 남기고 기차를 타려고 낙양 역에 도착하였다. 40분 넘어 줄을 서 서안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으려 하니 표가 없어 우리는 부득불 버스를 잡아탔다.
삼문협시를 벗어나자 눈앞에 황하가 나타났다. 북으로 부터 남으로 흘러오던 황하는 이곳에서 90도로 방향을 꺾어 동으로 흐르면서 하북평원의 광활한 땅을 적셔주고 있다. 섬서성 화인현 경내에 들어서니 도로 왼쪽에 웅기중기한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서악 화산이었다.
저녁 7시30분 버스는 우리를 서안에 내려놓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