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탐방]한낙연을 찾아 수천리 3
김동수 중국 용정시 조선족민속박물관 전 관장
2015-01-27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장군의 얼이 남아 있는 땅
점심을 대강 먹고 2시 30분에 우리는 하북성 한단에서 선서성 좌권현까지 가는 버스에 올랐다. 좌권현 마텐진에는 팔로군전선사령부 유적지가 있다. 일찍 팽덕회와 좌권장군은 이곳에서 일제와 굴함 없이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한낙연은 두 번이나 이곳에 와서 중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산서성 경내에 점차 들어서면서 웅기중기 낙타 등 같은 산발들이 보일뿐 벌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곳에 비하면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산기슭에 가담가담 손바닥만 한 뙈기밭들뿐이다.
그 대신 길에는 전문 석탄을 운반하는 큰 트럭들이 쉴새 없이 오고가 정말 “석탄의 성”에 들어섰음을 제대로 실감하고 느끼었다. 저물녘에 우리는 좌권현 정부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재미나는 일은 접대원아가씨가 두 가지 문자로 된 우리들의 신분증을 뜯어보더니 외국인 등록을 하라며 등기표까지 내밀었다. 우리가 웃으며 해석해도 그 아가씨는 막무가내로 보안인원까지 불러왔다. 전날 한단에서도 이런 일을 겪었으니 우리는 즐거운 웃음만 남기고 꿈나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새하얗게 눈이 내렸다. 장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태항산 서부의 이 자그마한 현성은 고요하고 적막하였다.
좌권현 원래 이름은 료현이였는데, 팔로군 부총참모장이었던 좌권장군이 희생된 후 1942년 9월 18일에 변구정부의 동의를 거쳐 좌권현으로 명명하였다. 동란의 시작이었던 1960년대 일부 사람들은 현 이름을 원래의 료현으로 회복하려고 기층정부에서 문건까지 발급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좌권현의 근 만여 명 되는 노혁명가, 노홍군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성과 중앙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결국 모택동의 지시로 좌권현이라는 이름을 지켜냈다고 한다.
사실 좌권현 뿐만 아니라 서북의 연안, 지단현등 많은 곳은 항일전쟁의 요람이고 책원지였다. 광범한 서북지역인민들의 피어린 투쟁은 항일전쟁과 공화국의 탄생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서북지구는 빈곤지구에 속해있다. 정부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보조를 하고 그들의 발전을 돕고 있지만 아직도 판부족이다.
버스역에 나가보니 문이 꽁꽁 잠겨 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단 눈만 내리면 길을 차단하는데 그만큼 교통사고가 빈번하기 때문이었다. 부득불 길이 통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좌권현성 북쪽산기슭에는 주용공원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용은 상고시대 전설속의 인물로서 삼황제중의 하나로서 불을 관장하는 신이였는데 주용이 료현을 건립했다고 한다. 고풍으로 멋스럽게 세워진 주용각에 올라서니 전반 좌권현성이 한눈에 굽어 보이였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8미터 높이로 웅장하게 세워진 좌권장군의 전신동상이었다. 우리는 장군에 대한 더없는 경모의 심정으로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이튿날 박호만 회장은 일어나자마자 카텐부터 걷었다. 아니나 다를가 동쪽하늘이 불그레해지면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사실 집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이처럼 맑은 하늘과 태양을 보았다.
북경에 있는 한건립 여사한테서 눈길에 조심들 하라고 문안전화를 걸어 왔다. 언제 보나 참으로 지적인 여성이었다.
전날 우리를 융숭하게 접대해준 소박하고 소탈한 좌권현 당안국 조국장이 우리에게 차를 소개해주었다. 다음 목적지인 장치시까지 500원을 주기로 하고 우리는 차에 몰랐다. 버스가 통하려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므로 우리는 부득불 조금은 불안한 려행을 시작하였다.
길가에는 숱한 석탄을 만재한 트럭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엉치를 붙이고 있었다. 어렵게 고개 하나를 넘으니 지형관계인지 아니면 기온 탓인지 우리가 달리는 길에는 눈이 거의 녹아 차는 무난히 달리였다.
차창 밖으로 황토고원의 색다른 풍경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곳은 밭이 적은 대신 돌이 많지만 그 돌이라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기사의 말에 모두들 와그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차는 어느덧 무향현 경내에 들어섰다.
기사의 소개로 간이음식점에 들려 초병이라는 음식을 주문했다. 얇게 빚은 병을 칼로 썰어 거기에 녹두나물과 감자국수를 넣어 함께 볶은 이 지방의 특색음식이라며 기사는 최고라고 손을 내들었지만 우리에게는 별로였다. 그런대로 대충 요기를 하고 우리는 무향현 왕가욕에 있는 팔로군사령부유적지를 찾았다. 비수기라 유적지 문은 꽁꽁 잠겨져서 밖에서 두리번거리다 대문 밖에서 기념사진만 찍었다.
유적지 서남쪽에 홍군이 마셨다는 '홍군정'이라 부르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더 나가면 이곳 사람들이 '홍성양'이라 부르는 큰 백양나무 한그루가 름름하게 서있는데 이 나무는 주덕총사령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보통 백양나무와는 달리 나무 속대가 오각형으로 되여 '홍성양'이라 부르는데 이 근방에서 오직 한그루뿐이라는 기사의 말에 반신반의 했지만 나무 밑에 가서 떨어진 나무가지를 주어 제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 말이 참말임을 믿었다. 우리는 홍군의 얼이 담겨 있는 나무를 쓰다듬기도 하고 만져도 보면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무향에는 이곳 외에도 팔로군기념관, 팔로군문화원등 많은 홍색관광명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려 5시간을 달려 우리는 장치시에 도착하여 당안국에 찾아가 우리의 목적을 말했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런대로 웃기를 좋아하는 두 여성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여장을 풀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장치현성에 도착하였다. 현성은 국가급 위생도시답게 그야말로 아름답고 활기와 생기로 넘치는 곳임을 느끼었다.
명나라 가경 8년, 즉 기원 1529년에 한자어로 '长治久安'이란 구절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하는데 1954년에 노성현과 장치현을 합병하여 노성현으로 부르다 1958년에 장치현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1971년에 현성은 장치시에서 약 17키로 떨어진 한점진으로 옮겨와 새로운 장치현성을 건설하였다. 원래 기초가 형편없던 장치현은 근 5년간의 거족적인 발전을 거쳐 오늘은 연재정수입이 30억을 넘는 산서성에서 제일 부유한 현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그 단적인 례로 현성의 골목골목으로 공공버스가 무상으로 달리고 있으니 중국 땅에서 이런 곳이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공무원의 수입도 우리 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이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공무차로 80년대 쌍타나 차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보정으로 부터 한단, 좌권, 장치현에 이르면서 우리는 경제발전에 따르는 지역차이를 실제로 뼈아프게 실감했다.
좌권현에서 받은 느낌이지만 정부와 시위울안은 물로 시내에서도 선전용 프랑카트 같은 건 하나도 못보았다. 없으면서 있는체하는 허례허식과 있으면서도 될수록 감추려하는 실용주의의 우렬은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오늘의 슬픈 현실이다.
장치현에서 장자현까지 약 6,0키로, 택시를 타고 현울 안에 있는 당안국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텅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우리는 북고묘혁명열사탑을 찾아 갔다. 대문 우에 박일파 동지가 쓴 제사가 해빛에 눈부신 빛을 뿌렸다.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북고묘는 장자현의 상징이자 역사의 견증자였다. 해방전쟁시기 진갱 장군은 최후로 이곳을 점령하고 장자현을 해방했다. 해방후 정부에서 이곳을 수건 복구하여 장자시 열사탑으로 조성했다. 6각형 모양으로 7층으로 쌓은 탑은 그 조형이 아름답고 기세가 웅위하였다.
5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는 장자현은 중화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서 2007년 국제연합국지명전문가 소조에서는 반복적인 조사 후 '천년고도'라고 명명하였다. 특히 남천향에서 근간에 발견된 나무화석은 지금으로 부터 약 2억 5천만 년전의 것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한 국보라고 한다.
장자현 당안국 류국장은 우리를 안내하여 새로 건설한 신농공원과 도이당생태공원을 구경시켰다. 우리는 류국장에게 한낙연의 일생과 그가 1939년경에 이곳에서 사회조사활동을 한 사실을 이야기 드렸고 앞으로 한낙연의 자료발굴도 부탁드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