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탐방]한낙연을 찾아 수천리(1)

- 김동수 중국 용정조선족민속박물관 전 관장

2015-01-11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중국의 전통명절인 춘절과 정월대보름이 금방 지나고 바야흐로 우수, 경칩이 다가오는 해토무렵에 나와 박호만 회장은 남방 행을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의 사회활동가이고 천부적인 화가인 한낙연기념사업을 벌려 온지 이미 거의 2년이 되어온다.

그동안 한낙연공원조성, 한낙연미술작품전람, 그리고 한낙연 탄생 112주년 좌담회 한낙연동상제막 등등 많은 활동을 벌려오며, 쉬는 날이 따로 없이 뛰고 뛰면서, 누가 알아주건 몰라주건 나름대로 있는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한낙연이라는 인간과 그의 전기적 생애와 예술인생에 매혹되었고 그를 숭배하고 그를 우러러 보게 되었다.
 
중국 조선족 지성인들은 김학철 선생을 중국조선족문학의 “산맥”이라 부르고, 김엽을 “영화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한낙연 선생은 무엇이라 호칭할 수 있을까?
 
중국의 유명한 학자 성성(盛成)교수는 한낙연 선생의 제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 적이다. 문예와 과학을 하나로 아울렀다.…살아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 피, 땀, 눈물 그리고 선, 면과 윤곽, 색과 빛, 글자와 문장의 힘 있는 필치로 고금중외의 모든 생동함을 투시하고 조화로운 기운으로 작품을 만드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처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낙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 곳, 그때를 담아냈다.…변경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용정에서 솟아난 또 하나의 별
가없이 망망한 하늘가에서 수많은 뭇별들이 반짝이는 가운데 용정에서 솟아난 금빛처럼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으니 바로 저명한 인민예술가, 반파쑈투사, “중국의 피카소” 등 여러 가지 타이틀을 갖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전기적 색채가 짙은 우리민족의 천부적화가 한낙연이라 하겠다.
 
청주한씨인 한낙연은 1898년 12월8일 용정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해란강과 육도하가 합치는 합수목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시의 용정토성포—지금의 용정시 공농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명은 광우이며 자는 낙연이다. 일명 행지로도 불렸으며 한소공이라는 별명도 쓰기도 하였다. 한낙연에게는 형제가 있었지만 모두 폐결핵으로 요절하였다. 가정의 이러한 연고로 한낙연은 후에 자녀들의 이름자에 모두 건강할 건자를 넣었는데 아들은 한건행이라 부르고 딸은 한건립이라고 불렀다.
 
한낙연은 6세 때부터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그림에도 뛰어난 천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는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아버지-한재흥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든 것들을, 그리고 또 그리며 화가의 꿈을 무르익혀 갔다.
 
한낙연이 9세 때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를 당시 이름이 높았던 서전서숙에 입학시켰다. 서전서숙은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동녕 등이 1906년 당시 용정의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서 세운 최초의 철두철미한 근대 반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1910년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을 합병한 후 1912년부터 조선과 연변지역에서의 약탈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용정에 전화국을 세우고 중국어와 조선어를 아는 교환수를 모집하였다. 한낙연은 교환원으로 취직하여 직장에서 중학교 과정을 자습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그는 용정이라는 당시 특정된 역사적 조건과 생활환경, 그리고 타고난 언어적 재능으로 기본적으로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런 언어적 우세와 천부적 총명으로 그는 용정에 있는 해관의 사무원으로 발탁되었다. 해관에서 그는 안계를 넓히고 새로운 사상을 접수하였고, 또한 영어와 서양의 풍경사진도 접촉하면서 스스로 미술공부에 힘써 서양화의 초보적인 표현방법도 습득할 수 있었다.
심양노신미술학원 이광군 교수는 '한낙연의 생애와 예술관'이라는 저서에서 “한낙연은 남달리 뛰어난 사고력과 서전서숙에서 받은 반일민족사상의 영향으로 국가를 잃은 민족의 한과 고통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향학열이 불타올랐고, 타고난 천부적인 예술성은 당시 중국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화의 바람을 타고 후일에 이상적인 꿈을 미술로 무장한 항일민족운동가의 꿈으로 키우게 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시기 한낙연은 최신애라는 여성과 결혼하고 딸 한인숙을 낳았다.
 
1919년 3월 13일, “조선의 3.1운동”을지지 성원하는 성세호대한 반일 대 시위가 용정에서 일어났다. “운동전날 한낙연은 해관세무사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몇 필의 흰 광목을 사다가 그의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어 각 학교에 나누어 주어 반일시위 때 사용케 하였다.”고 한낙연의 처조카인 최순희씨는 회고하였다.
 
19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중국의 “5.4운동”보다 두 달 가량 먼저 진행된 그 번 투쟁의 의의는 자못 컸다.
 
당시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명된 한낙연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조용히 용정을 떠났다. 한낙연은 10월혁명이 승리한 소련으로 갔다가 이동휘를 따라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상해로 갔다.
 
1923년 한낙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조선족의 첫 중국공산당당원으로 되며 동북지구 초기건당 영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되여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1929년 그는 구라파에가 미술공부를 하였다. 그는 유럽의 10여개 나라를 전전하면서 미술기능을 연마하는 한편, 국제반파쑈투쟁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에는 항일구국사업에 몸을 담그고 주은래, 동필무 등이 영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항일선전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다. 그 뒤로 화가의 신분으로 감숙, 청해, 신강 등 지역에서 미술창작활동과 역사문물 발굴 작업을 하면서 평화적으로 서북지방을 해방하기 위해 많은 중대한 일들을 하였다.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은 무주고혼으로 서북의 황량한 사막에 묻힐 때까지 다시는 정든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였다.
 
용정은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고 그 뿌리가 가장 깊은 곳이다. 따라서 독특한 조선족 민속문화는 용정의 간판이고 얼굴이고 명함이며 용정발전의 무궁한 힘의 원천이다. 그 중심에 한낙연이 우뚝 솟아 있다. 한낙연기념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점은 그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몇 권의 화책과 가정에서 제공한 일부분 사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원시자료가 없었다. 7월에 용정에서 진행하는 한낙연세미나의 한 내용으로 준비하는“천부적화가 한낙연일생” 도편전람은 내용상에서 새로운 비젼이 필요하다.
 
이런 동기에서 한낙연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원래는 박회장과 나 두 사람이 떠나기로 계획하다가 자료발굴 각도에서 당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당안국의 이경숙씨와 업무원 양선희씨가 함께 동행을 하였다.
 
리경숙씨는 날씬하고 예쁘장한 얼굴에 쾌활한 성격을 가진 여성이였고 양선희씨는 조금은 통통하고 복스러운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조선족여성 스타일이 였다. 양선희씨는 남보다 특별히 큰 여행가방을 가진 덕에 꽤나 땀을 흘렸다.
 
북경의 날씨는 늘 그러하듯이 찌푸린 시어머니 얼굴처럼 시뿌옇케 흐려있었다. 사전에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편집부에서 일하는 김성룡씨한테 호텔예약을 부탁했기에 공항버스를 타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일행은 북경시 방장 방고원 25동 15층 2호에 살고 있는 한낙연의 딸 한건립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몇 차례 다녀오고 익숙할 정도인데도 갈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한낙연의 아들 한건행씨는 암으로 투병중중임에도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저녁에는 리덕수부장과 민족출판사 우사장, 그리고 우리 일행과 한낙연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사실 리덕수부장은 한낙연기념사업을 매우 지지하고 관심하고 있었다.
 
식사전 박회장이 한낙연세미나 준비사업과 한낙연동상 추진사업, 그리고 이번 조사의 목적과 의의를 말씀 드렸다.
 
리부장은 용정에서 최근에 해온 사업을 충분히 긍정하고 정치, 예술, 민족단결, 고고학발굴 등 여러 면으로 한낙연을 연구하고 조명해야 하며 단계를 나누어 한낙연을 선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미 연변주위 서기와 주장에게 한낙연에 대해 말하였으니 어려움이 있으면 주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민족출판사 우사장은 한낙연세미나는 중량급 연구토론회만큼 면밀하고 상세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연변대학의 도움과 협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하였다.
 
식사는 항상 화기애애하고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동북 땅에 불씨를
 
봉천﹙심양)은 역대로 동북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와 박 회장은 두 차례나 심양에가 봉천기독교청년회유적과 성의회옛터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할빈과 치치하얼에 가서 당시 한낙연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보았다.
 
1924년1월 한낙연은 파견을 받고 심양에 와 당조직건설을 위한 개척사업을 하였다. 당시 심양은 봉계군벌통치의 중심지대로서 당조직 건설에 매우 큰 곤난과 어려움이 있었다. 한낙연은 상해기독교청년회에서 봉천기독교청년회의에 사람을 파견한다는 명의로 심양에 와 당시 봉천기독교청년회총간사였던 염보항을 만났다.
 
저명한 사회활동가로서 염보항 역시 전기적 색채가 짙은 사람이었다.
염보항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쏘련을 불의 습격한다는 정보와 일본이 진주항을 폭격한다는 정보, 그리고 일본관동군 군사병력배치를 장악한 공로로 1995년 러시야대통령 예리친으로부터 소련위국전쟁 승리 50주년 기념대회에서 기념훈장을 수여받았다.
 
한낙연은 염보항의 도움으로 봉천 성립제4소학교에서 개인적으로 그림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심양시민들과 미술애호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장학량을 비롯한 동북의 사회각계저명인사들이 전람을 보고 높은 중시를 하였다. 그후 한낙연은 봉천성서남관 성의회 맞은 켠의 민가를 세 맏고 동북의 첫사립미술학교-봉천미술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한낙연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끌어고 도와준 소자원동지는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한낙연은 믿음직한 형님과 같았다. 60여년 전의 전투의 나날을 돌이켜 볼 때마다 그의 강직하고 기민했던 형상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한낙연동지는 무명영웅이다. 간고한 전쟁의 나날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많은 사업을 했으며 허다한 사업은 개척성적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비밀공작의 특수성으로 그의 이름과 사실이 인민군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흑룡강성 할빈시에는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이름을 본 딴 “고골리거리”와 조일만의 이름으로 명명한 “일만가”가 있다.
 
이 두 거리 교차점으로 되는 곳에 비취색기와에 누른빛 담장을 한 궁전 식으로 건설한 우람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바로 1923년 중동철도에서 투자해 지은 “보육학교”교사인데 연혁을 거친 오늘의 할빈시 3중이다.
 
1925년 한낙연은 이 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지하당사업을 하였다. 한낙연은 학교 지하실에 기숙하였는데, 이곳은 한낙연의 화실인 동시에 할빈지하당의 비밀아지트였다. 한낙연은 교수를 하는 한편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진보적사상을 전수하였다.
 
보기에 너무나 평범한 보육중학교지하실, 이곳에서 한 열혈청년이 신앙을 안고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신을 불태웠다고 생각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곳이 변모되어 혁명가들의 불굴의 정신을 기리는 곳으로 되기를 두손 모아 빌었다.
 
지금 할빈시 상지대가와 서14도가가 인접하는 곳에 락천사지관유적이 색바랜 사진속의 풍경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커먼 벽, 떼묻은 층계손잡이와 구라파식의 층계모양…
이제 금방이라도 한낙연이 층계를 내려 손목을 잡을것 같아 발길이 무거웠다. 봉천과 할빈에서의 한낙연의 혁명활동이 봉천경찰서의 주의를 일으키자 조직에서는 한낙연에게 할빈을 떠나 치치하얼에 사업할 것을 지시하였다.
 
한낙연은 치치하얼 시정공정과 과원 겸 용사공원감리로 발탁되었다. 한낙연은 한편으로는 지하당공작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사공원건설을 하였다. 드넓은 용사공원은 한낙연이 천부적인 예술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광할한 천지였다.
 
지금도 용사공원에 들어서면 구리파식으로 건설한 더없이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격언정”이라 명명한 정자를 볼 수 있는데 바로 한낙연이 대담한 착상으로 설계한 것이다. 그의 재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홍창성대형백화상점의 개업을 맞으며 독특한 풍격의 매대광고를 그리고 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
 
한낙연은 초창기 동북지구의 당조직의 건립과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낙연은 망망한 암흑 속에서 광명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온몸으로 횃불을 삼아 앞길을 비추며 사람들을 광명에로 인도하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