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 황옥란]"꿈에도 그리지 말아야 할 고향"

2014-10-27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고층건물이 촘촘히 들어서 있고 차량들이 실북 나들듯 하는 대도시, 인간의 지혜로 수놓은 대도시에서 생활하건만, 어쩐지 허허벌판 한복판에 자리 잡은 내 고향(흑룡강의 어느 한 농촌마을)이 자꾸 생각날 때가 있다. 그래서 문인들이 읊조리는 “꿈에도 그리는 고향”이란 글귀에 동감하면서,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났다. 

 매번 “고향”하면 뒷강놀이터를 떠올리게 된다. 강물이 굽이돌면서 조용히 흐르다가 가끔씩 세찬 소용돌이를 일구며 스쳐지나갈 때가 있는 우리 마을 뒷강의 한 모퉁이가 있는데, 남자애들을 피해 물놀이 할 수 있는 여자애들의 마침한 놀이터였다.
 
그때 “유영코치”란 이름까지 달고 있던 나는 ‘물놀이’를 조직하고 물에 뛰어드는 시범동작을 하면서 물장난에 주역이 되어 놀았다. 손을 위로 올리고 눈감고 숨을 모은 후 걸맥에서 뛰어내리기를 비겼다. 물속에서 숨박꼭질도 하면서 정신없이 놀아댄다. 놀고 놀다가 기진맥진해서야 개멀구를 한줌 따 먹으면서 집에 들어서면 젖어있는 바지엉덩이를 보고 걱정으로 가슴 태우던 엄마는 호된 꾸지람을 하신다. 그러다가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면 어찌하느냐고 말이다. 유리에 찔려 피나는 발을 싸매고 집에 들어설 때면 더 호된 꾸지람을 당한다. 그래도 고대하다가 하학만 하면 바로 달려가서 물놀이에 정신을 판다. 아, 그때가 얼마나 재미있었고 유쾌하였던가! 
 
시멘트를 발라서 마련해놓은 빨래터가 있다. 거기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빨래하는 곳이기도 하고 남자애들이 물놀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번은 빨래하고 5대 마당까지 왔는데 소대 확성기에서 “위대한 모주석께서 서거하셨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오자 빨래대야를 떨어뜨리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었다. 집에 와서도 눈이 퉁퉁 부어나도록 울어댔었다. 그때 뭐 알기나 알고 울었는지 참!
 
시간 끝나면 바로 집에 오라는 엄마의 령이 있을 땐 여자애들 모두가 우리 집에 모여 숙제를 한다. 애들은 일부러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하며 숙제를 느직느직하다가 우리 엄마의 “밥 먹고 가거라”란 말씀이 떨어지면 너무 좋아서 “하얀 밥 먹는다”며 모여 들여 한공기 씩 게눈감추 듯 훌떡훌떡 먹고는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가군 했다.
 
소대마당에서 배구치던 일, 눈판에서 사진 찍던 일, 자전거를 몰래 연습하다가 고장나버렸는데 언니가 대신 아버지에게 칙살맞다고 욕먹던 일, 동광촌에 영화보러 친구 순녀까지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다가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허벅지가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도 말 못하고 낑낑거리던 일, 다섯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큰 조카가 “고모”라고 부르지 않으니 문 닫아걸고 “고모라고 불러! 불러!”하면서 매질하던 일, 학교 다녀와서 바닥 쓸고 구들 닦는데 세 번째 조카가 닦아놓은 구들에서 팽이치기를 하며 어지럽히기에 팔을 비틀어 놓았더니 팔이 빠져버려 겁을 잔뜩 먹었던 일, 둘째오빠하고 한 끼 밥을 지을 수 있는 마른 나뭇잎 한 마대를 쓸어오면 어머니가 “장하다”고 하시면서 밥을 수북이 떠주던 일, 큰 형님이 싸래기로 낸 가루와 강냉이로 낸 가루를 섞어서 만든 별미인 시루떡…참, 잊지 못할 기억이 무수히 많다. 얼마나 단란하고 정겨운 고향이었던가.
 
고향 떠난 지도 어언간 35년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세 번하고 5년이나 더 지났으니 참 멋지게 변했을 고향이 보고 싶었고, 또 동년의 그림자를 찾고 싶었으나, 고향에 갈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큰 오빠는 연태로, 언니는 한국으로 둘째 오빠는 심천으로, 조카들은 오문으로 북경으로, 하문으로, 청도로 대련으로, 외국으로 다 나가고 없으니 말이다. 거기에다 소학교 중학교 동창모임도 한국 서울에서 열게 되니 말이다. 어쩌지? 고향에 한번 가고 싶은데….
 
"가자! 가자! 가보자!" 이번 10월 1일 국경절여행의 첫 코스를 고향으로 정했다. 기차는 통하지 않고 하루에 한번 밖에 없는 버스가 있으나 고향마을까지 직접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교통이 아주 불편하였다. 그래서 논의 끝에 자가용차를 갖고 가기로 했다. 좋았다. 중국도 이제는 길을 얼마나 잘 닦아 놓았는지 너무너무 좋았다. 국경절이라 고속도로 요금도 받지 않으니 정말로 다닐 만도 한데 일찍 가보지 않고 이제야 간다고 자책하면서 120키로 속도로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향부근에 가서 고향마을로 내려가는 데는 오불꼬불 흙탕길– 30여년 전의 길 그대로였다. 집들은 촘촘히 들어섰는데 역시 옛날식 그대로의 집이였다. 우선은 뒷강놀이터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어서, 아니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래도 흙길을 에돌고 에돌아서 뒷강을 찾았다. “아이구, 하느님 맙시사!” 온갖 쓰레기들을 쏟아 던지는 시궁창으로 변해 있었다. 썩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시궁창이었다. 나는 한숨만 풀풀 쉬다가 “내가 잘 떠났어. 아니 우리 모두가 다 잘 나갔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문뜩 새까맣게 익은 개멀구가 나를 반겼다. 마른 잡초들로 우거진 강둑을 푹석푹석 밟으며 개멀구를 따서 입에 가져갔다. 옛날 맛 그대로였다. 같이 간 남편은 “독 있어!”하면서 못 먹게 한다. 냄새가 나서 더는 지체를 못하겠다. 나는 뒷강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옛날 살던 집을 찾아 헤맸다. 중국 글 간판이 걸려있는 식당이어서 인차 찾지 못하고 그 부근에서 돌고 돌다가 겨우 찾았으나,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음은 학교를 찾았다. “널판자학교(걸상 대신 나무판에 학생들을 쭉 앉혔기에)”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한 개반에 70여명이 있었던 학교다. 공부는 별로 안 시키고 일만 시키던 학교였으나 그때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늘 생각나던 학교였다. 학교 앞에 갔다. 2급 지진만 일어나도 허물어질 것 같은 옛날 그대로의 학교건물, 이름 할 수 없는 잡초들로 꽉 들어차 있는 운동장과, 쇠고랑을 차고 있는 학교대문이 한눈에 안겨왔다. 그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언녕 폐교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건만, 실지로 와서 보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가자! 돌아가자!" 나는 차를 돌렸다. 고향은 부근농촌의 중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분명한 한족 농촌마을이 됐다. 조선족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필경 한족마을로 둔갑해져 있었다. 꿈에서나마 오고 싶었고, 그리던 고향마을을 둘러보고 돌아서는 나의 마음은 쓸쓸했다. 돌덩이를 받아 안은 것처럼 무거웠다. 목구멍이 돼지털을 삼킨 듯 껄끄러워 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다행이기도 했다. 삶의 의욕이 강해 대이동을 식은 죽먹기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은 모두 한국으로, 연해도시로 가서 너무나도 멋지게 잘 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시궁창에서 용들이 난 셈이다. 이 침침하고 낙후한 고향을 등지고 나가서는 오색영롱한 현대생활을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그래도 나의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 났다.
 
차머리를 돌려 귀로에 올랐다. “다시는 고향을 찾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불쑥 했다. 악을 쓰며 고향 농촌을 빠져나가려 했고, 또 그렇게 된 것이 얼마나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 모두들 제각기 제 나름대로 고향을 빠져나간 것 같다. “잘 했어! 참, 용하다!”라고 응원해주고 싶었다. 또 고향나간 사람들이 어디선가 고향을 잊고 열심히 잘 살기를 기원해주고 싶었다. 나도 이제는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열심히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차라리 이번에 고향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고향은 그대로 그리움으로 남았을 것을! 나는 일부러 고향을 찾아 간 것을 후회까지 했다. “꿈에도 그리지 말아야 할 고향”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이제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말겠다"던 고향 생각이 며칠 지나지 않아 그냥 가슴에 걸려있어 먹먹해 나는 것이 이상했다. 나를 키워준 ‘고향’이 그렇게 된 데는, 나의 잘못은 없을까? 고향을 무정하게 버리고 떠난 우리 모두의 잘못은 없을까!?…그러면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예전의 그 풍경,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을 바라고, 자신을 정답게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아, “꿈에도 그리지 말아야 할 고향”이 이제는 영영 매듭을 풀지 못할 한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