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에세이]교양, 교양과목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

2014-03-25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서둘러 인생 1막을 정리하고 연변에서 그 2막을 열며 학생들에게 ‘교양(敎養)’을 가르치는 일을 새롭게 시작했다. 금년 3월부터 연길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양학부에 소속돼 이른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개강 첫날, 처음 만나는 ‘신입’ 교수에 대한 호기심 가득찬 학생들에게 교양학부 소속 교수로서 교양과목이 전공과목보다 더 중요하다는 등 일방적으로 내 주장을 늘어놓았다. 학생들이 내 생각을 읽어주길 바라면서...

학생들 역시 교양과목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을 터인데 되풀이해 강조한 것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개인이 갖춰야 할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소학교 및 중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하지만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대학이 교양학부를 두고 이미 성인이 된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이들이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함양해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다.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이다. 이는 “사회생활을 품위 있게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폭넓은 지식” 정도로 재정리할 수 있다. 이를 확장하면 대학은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춘 품위 있는 생활을 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교양과목을 가르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사회에 나가 올바른 사회인이 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화되고 사회가 분화된 오늘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개개인만을 생각하며 타인에 대해 배려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교양을 앞세우는 것은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이 거듭되면 성인군자도 “교양이 밥 먹여 주냐”며 생각을 바꿀지 모른다. 세계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배우고 익혀야할 지식이 넘쳐나 교양을 쌓는 것이 지난한 일이 되고 있다. 교양과목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넘쳐나는 지식을 어떻게 다 배우고 익힐 수 있냐고 푸념할 만하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 누구나 교양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 잡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의당 뒤에서 그 사람의 교양 없음을 나무랐을 것이다. 상황을 바꾸어 누군가 나의 교양 없는 행동(?)에 기분 나빠하며 험담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교양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을 잡쳤을 때보다 더 기분 나쁘지 않을까?

교양을 갖추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여 세상을 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교양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발전을 통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여 사회 안에서 진정한 자기 실현을 완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은 타인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가짐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