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칼럼] 영등포(永登浦)의 초상(肖像)
영등포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솔직히 말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영등포가 꽤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라는 것과 서울의 서남부의 길목이며 교통의 요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영등포는 과거 어떤 도시였을까? 잠시 영등포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영등포가 서울에 편입된 것은 1936년이다. 1943년이 돼서야 비로써 영등포구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과거 영등포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 철도의 시발점이고 또한 경인, 경부선의 분기점으로 사람과 물산이 풍부하여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의 중요한 거점도시(據點都市)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물류와 제조, 병참기지의 역할까지 그야말로 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자연히 영등포로 일자리를 찾아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날 유독 영등포에 전국 팔도 주민이 고루 분포하는 이유다.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로 유동인구가 크게 증가하며 영등포역 주변을 중심으로 커다란 상업지역이 이루어지고 식료품과 소비제품을 파는 유통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영등포역 주변으로 사람이 넘쳐나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지난날 서울에서도 가장 왕성한 도시였던 영등포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제 영등포의 현실을 그려보자. 영등포구를 서서울의 종가(宗家)라고 한다. 영등포구는 관악구, 구로구, 강서구를 분구되고, 이후 관악구에서 서초구를, 구로구에서 금천구를,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구시켰다.
하지만 분구되는 과정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후유증이라면 녹지가 되는 산은 모두 떼어주고 산이랄 수도 없는 산(쥐산)만을 남긴 것일 게다. 녹지 조성을 위해 매년 많은 예산을 들임에도 불구하고 공업지역이 남긴 회색 도시를 충분히 감싸기에는 크게 역부족이다.
노동집약산업의 쇠퇴와 굴뚝산업 이전으로 많은 공장들이 떠난 자리에는 준 공업지역이라는 꼬리표만 남긴 채 개발제한에 묶여 영등포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영등포시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급격히 손님이 빠지면서 시장은 점차 빈곳이 늘어가고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거기다 서울시의 대표적인 탁상행정 뉴타운사업에 묶여 개발 조차할 수 없이 진퇴양난이다. 어디 그 뿐이랴.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로 넘쳐나던 삼각지(영등포역과 영등포시장 사이)마저 힘에 부친 듯 가뿐 숨을 몰아쉰다.
영등포의 지역경제는 곤두박질하고 영등포의 얼굴인 역전대로는 만신창이다. 길게 늘어선 무허가 포장마차가 보도를 점령하여 사람이 다닐 수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포장마차에 점령당한 차도마저 자동차와 사람의 생사를 건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선량(選良)들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조차 누구도 적극적으로 정비에 나서지 않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하고 있다.
서서울의 관문 영등포역은 어느덧 노숙인의 보금자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아침, 저녁으로 늘어선 무료급식소의 긴 줄이 늘어만 가면서 영등포 과거의 영화와 오늘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의도 불빛이 현란하다. 샛강을 사이에 두고 명암이 교차하는 곳, 내줄건 다 내주고 떠날건 다 떠난 영등포엔 낙후한 주거환경, 경쟁력 잃은 지역경제, 열악한 교육환경, 능력 없는 선량들과 무허가 포장마차, 노숙인 그리고 홍등가가 남아 있다.
밤바람이 차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 영등포 제2의 황금기를 위하여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 6.4지방선거에 거는 기대다. 역전 홍등가(紅燈街)의 붉은 전등만 지난날 영등포의 영화(榮華)에 취해 밤을 지새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