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탐방기]"신나게 동남아여행 다녀왔어요"[15]

2013-08-19     주청룡

[서울=동북아신문]싱가포르의 여행은 이로서 끝을 내고 오후에는 말레이시아로 가는 것이었다. 정심식사 후 싱가포르해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시 반이 되였다. 싱가포르의 관광버스가 우리를 싣고 말레이시아의 신산시(新山市)에 입경하였는데 싱가포르 해관에서 검사를 마치고 버스에 앉아 바다 위에 놓인 그리 길지 않은 다리 하나를 건너니 말레이시아였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에 입경하는 해관검사는 그 어느 해관검사에 비하여 간단하였다.

우리들의 여행용 트렁크의 짐들은 해관검사를 어떻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싱가포르의 관광버스가 싣고 직접 말레이시아에 입경하였고 사람만이 해관검사를 마쳤는데 두 개 나라의 해관검사를 다 마치는데 30분도 걸리지 안았다.말레이시아에 들어서니 그 나라 관광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남성안내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는 버스에 앉아 말레이시아의 역사적인 옛 도시인 말라카(馬六甲)로 향하였는데 거리는 약 200킬로미터이고 4시간 가량 걸린다고 하였다.안내원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후 말레이시아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 31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로서13개 주와 세 개 연방직할구로 조성된 연방제국가이며 공식명칭은 말레이시아연방이며 면적은 329,847평방 킬로미터, 인구는 28,334,135명(2010년)이다.

수도는 콸라룸푸르(吉隆坡)이지만 지금 행정중심은 태자 성이며 점차적으로 수도를 태자 성으로 옮긴다고 한다.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 이고 의회형태는 량원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으로서 왈 리드 알 - 잼 • 샤 압둘 할림(阿蔔杜勒•哈利姆•穆阿紮姆•沙阿)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며 지브 압둘 라자크(納吉布•阿蔔杜爾•拉紮克)이다.주요 종교로는 이스람교, 불교, 도교, 인도교이고 공식 언어는 말레이어이며 주요 민족으로는 말레이족(60%), 화인(25%), 인도인(7%)인데 부유계층에서 80%가 화인이며 말레이시아의 70%경제가 화인들에게 장악되었다고 한다.

표준 시간대는 중국,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UTC+8였다.

말레이시아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650km 떨어져 있는와 동말레이시아 두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 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면적 13만 1,598㎢)는 길이 약 800km, 폭 325km이며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 서쪽은 말라카 해협, 동쪽은 남중국해를 경계로 한다. 보르네오 섬 북서부를 차지하는 동말레이시아(면적 19만 8,160㎢)는 길이 약 1,075km, 폭 384km로주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은 남중국해, 동쪽은 셀레베스 해, 남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 섬과 접한다.

사라와크 주의 령토 안에는 영국 보호령이던 이슬람 왕국 브루네이(文萊)가 있다.말레이 반도는 주로 산악 지형이다. 동말레이시아에는 해안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 평야는 언덕 쪽으로 높아지다가 산악지형의 중심에 다다른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수목작물, 특히 종려유, 야자유와 고무는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이다.

쌀도 주요한 산물이다. 석유 채굴 및 생산과 주석 채굴은 제1의 외화 획득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네 시간 동안 말라카를 가면서 밖을 내다보니 전부 구릉지대였는데 다른 나무가 한 구루도 없다고 할 정도로 어데라 없이 전부 종려나무(棕櫚樹)로 수림을 이루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어찌하여 종려나무를 이리도 많이 심었는가고 물었더니 종려수는 전반 말레이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기름을 짜서 식용유도 하고 유지공업의 원료도도 쓰인다고 한다.

종려나무(棕櫚樹)말라카는 말라카주(州)의 수부도시이다. 말라카는 말라카해협에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옛 도시이다. 말라카하가 가로 찔러 지나가고 있으며 일찍 1403년에 말라카왕국의 수도로 되였으며 1511년에 뽀르뚜갈식민지로 되였으며 1641년에 네덜란드에 점유되었으며 1826년에는 (이전에, 동남아시아 말라카 해협의 옛 영국 직할 식민지를 통틀어 이르던 말)의 일부분으로 되였다. 말레이시아의 제1임 수상 라만이 1956년 2월 20일에 말레이시아독립를 선포하였다.

삼보묘(三保廟)와 삼보정(三保井)말라카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삼보묘에 갔다.3보묘는 1673년에 건축되었는데 1405~1435에 7차나 항해한 중국명조 3보태감 정화를 기념하여 세운 사원이다. 정화가 매번 항해할 때에는 여기에 머물렀으며 당시 말라카국 수령이 25차나 중국을 방문하였다. 1411년, 말라카 국왕부인과 540명의 수행인원이 중국남경으로 우호방분을 하였으며 명성조주태(明成祖朱棣)가 봉천문에서 연회를 차려 환영하였으며 그들에게 허다한 진귀한 중국특산을 증정하였다. 그가 1년반 있다가 돌아갈 때에 명나라 정부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한 척의 배를 만들에 증정하였다.

1943년에 말라카국왕 잽싸다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고 한다. 삼보묘 주위는 큰 나무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대문에는 전포(戰袍)를 입고 위풍이 당당하게 손에 칼과 도끼를 든 두 장군의 그림이 있고 문 량켠에는 "五百年前留勝跡,四方界內顯英靈"。란 주련이 씌여져 있고 사원 중앙에는 정화의 초상화와 군복, 칼 등이 있었으며 우에는 "鄭和三保公"란 표어가 걸려있고 양쪽에는 허다한 문관과 무관들의 신상(神像)들이 배렬되여 있었다.

이 사원은 1673년에 세워졌는데 처마의 네 귀가 뿔처럼 올리 쳐들고 붉은 기둥, 흰 벽, 검푸른 기와 등은 중국의 건축풍격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모든 건축재료들, 이를테면 한 장의 벽돌, 한 장의 기와들이 모두 중국에서 운반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

사원안에는 향불이 가득 하였으며 사원 문어구에는 한 쌍의 금사자가 있었는데 온몸이 금빛으로 눈부시었지만 사자머리 윗부분만 금빛이 약간 벗어져 이었다. 그것은 원래 신도들은 사자옆으로 지나갈 때에 사자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깃든다고 여겨 너무 쓰다듬어 그렇다는 것이었다.

삼보묘에는 또 삼보정(三保井)이 있다. 정화가 7차례나 항해할 때에 모두 이곳을 지났는데 당시 이곳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산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정화는 이러한 정경을 보고 처음으로 이곳에 우물을 팠다. 정화가 모두 일곱 곳에 우물을 팠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아 하나는 삼보묘 왼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삼보묘 뒤에 있다.말라카 역사에서 여러 차례 심한 가물이 들어 다른 우물은 다 말랐지만 이 두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지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신의 우물(神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라의 귀중한 재산으로 하여 우에 철사그물을 씌워 사용을 금지하고 문물보호로 하고 있다.사진

[후일계속]

[저작권자(c)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가는 동북아신문,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