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권 바뀌어도 20년 일관된 정책으로 통일해”
[지상중계] 롤프 마파엘 주한독일 대사 발제문 ‘통일을 두려워 말라’
통일은 경제적 번영의 계기, 20년 지나니 비용보다 이익이 더 커
[서울=동북아신문]지난 7월10일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혁신과 정의의 나라’ 7차 포럼에서 롤프 마파엘 주한독일대사가 ‘통일을 두려워 말라’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마파엘 대사의 발제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독일 통일에 대해서 3단계로 나눠 설명 드리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인 1단계 상황에서 중요한 관점은 왜 서방국가들이 평화로운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통일의 시점이 왔을 때 서방 파트너 국가가 통일에 동의했던 이유는 아데나워 총리부터 분명하게 친서방 정책을 꾸준히 펼쳤기 때문이다. 독일이 제3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확실하게 NATO, EU에 편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독일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다. 1970~80년대 독일 젊은층을 중심으로 ‘미국은 독일 통일에 관심이 없고, 통일하지 않아야 미국의 군수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다.
그런데 동독 주민이 자유와 통일을 외쳤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는데, 이렇게 통일을 외칠 때 가장 먼저 독일 통일을 지지한 것이 바로 미국이었다.
친서방정책 동방정책 병행
두 번째 독일의 친서방 정책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빌리 브란트와 발터 쉘이 독일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동방정책을 실시한 지 20년 만에 독일은 통일이 됐다.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이 성공한 이유는 그것이 일관되게 정권교체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독 정부는 20년간 일관되게 긴장완화 정책,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통일의 빛을 보게 되었다.
동방정책 자체에 대해 독일의 양대 국민정당, 다른 정치 세력들 간에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특히 1972년에 서독이 폴란드, 소련 등 동구권 국가와 기본전략을 체결했는데 기본전략 체결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야당의 반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 기본전략 체결에 대해 독일 국회에서 50:50의 찬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동구권 국가와 기본전략 체결에 대한 결선투표를 하기 직전 국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에서 독일 국민은 동방정책이 실현되도록 빌리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에 표를 몰아줘서 사민당이 압승을 거두게 했다.
선거 이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동구권 조약이 비준됐고, 이후에 보수당이 집권하더라도 국민들은 일관되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방정책을 지지하게 됐다.
1969년부터 1989년까지 20년간 꾸준히 추진된 동방정책은 동서독 양자 간의 성격과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에서 동서독 화해를 위한 다자간 협력의 성격을 갖는다. 유럽안보협력회의 틀에서 동서 간 대화를 하면서 동구권 국가에 자유를 요구할 수 있었고 이후에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 이후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성공적인 동방정책도 처음 7년만 놓고 보면 동서 간 갈등을 유발하고, 분단을 고착 시키는 정책이라는 인상을 줬다. 동서독이 유엔에 가입하는 등 동독을 한국가로 인정했고, 유럽안보협력회의 진행을 보면 독일이 영구히 분단된다는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 사실 동방정책의 최고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동구권 국가의 자유와 물질적 부였다. 동서진영의 냉전 완화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동독에 대가 받고 거금 지원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구하면서 서독은 동독으로부터 구체적 대가를 받고 상당한 금액을 동독에 줬다. 대가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가격이 결정됐다. 일례로 ‘프라이카우프(자유를 산다는 뜻으로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는 정치범 한 명당 얼마를 줄 것인가가 정치적으로 계산됐다. 서독에서 동베를린 도로이용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결정돼 가격이 높게 책정됐다. 동독은 그 대가로 서독 주민이 자유롭게 여행하게 해주고 동독 주민이 서독에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스윙이라고 해서 서독이 동독에 무이자 차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최고 8억 유로까지 액수가 올라갔는데 동서독 간 교류를 활성화하기위한 정책이었다.
독일 통일은 국민이 결정…동독 시민들 “우리는 한민족” 외치며 거리로
“독일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에 가버리겠다” 압박
독일 통일은 하룻밤에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독일 통일에 대한 결정이 국민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독 시민들이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만큼이나 유명한 구호가 ‘독일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에 가버리겠다’였다.
이런 상황이 서독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압박이 됐다. 동독 주민의 요구를 들어서 단시일 내 통일을 하지 않으면 대량 난민사태가 우려됐고, 소련이 국경을 폐쇄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대부분 동독민이 서독으로 떠나오지 않고 동독에 머물게 하기 위해 몇 주, 몇 달의 시간밖에 없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그 당시 결정 중에서 쓸데없이 많은 비용을 발생시킨 결정도 있었고, 동독의 경제를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결정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서독 마르크로 동서독 간의 화폐를 즉시 통합하는 결정이라든가, 배상보다는 반환을 우선한다는 소유권 문제 이런 것들이 통일과정에서 상당히 어려웠지만 그 당시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흡수통일이라고 하는 서독의 사법제도를 비롯해 서독의 제도가 그대로 동독에 적용됐는데 특히 사회복지 제도가 그대로 통합된 것이 이후에 많은 통일 비용을 초래하게 됐다. 독일 전체의 통일 비용이 1조 6천억 유로라는 말을 하는데 1조 유로 정도가 사회복지에 들어갔을 정도로 사회복지 부담이 컸다.
독일 통일이후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2003년에 ‘아젠다 2010’이 만들어지면서 대대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 이 개혁이 통일된 지 25년 된 현재의 경제적 번영의 계기가 됐다. 경제적으로 통일되고 20년 지난 시점에서 그동안 쏟아 부은 비용보다 받은 이익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의 마음속의 내적 통일은 경제적 통일보다 오래 걸리고, 40년간 분단됐으면 그 만큼의 내적 통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