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동남아여행 다녀왔습니다."(8)
주청룡탐방기
[서울=동북아신문]이튿날(10월 29일) 오전에는 가죽제품상점, 보석상점 그리고 보석가공공장을 참관하고 오후에 타이만 동쪽해안에 위치한 파타야시로 향했다. 파타야시는 방콕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원래 이름없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곳이었는데 1961년에 월남전쟁시 미국병사들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되어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면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발전하였으며 지금은 면적이 22.2평방킬로미터, 10만5천명 인구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특별 행정구역이라고 한다.
방콕에서 떠나 장장 세시간 달리는 가운데 대지는 전부 끝이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한 벌판이었다. 파타야에 거의 도착해서야 산이 보였다. 그 일망무제한 벌판에는 드문드문 가다가 논판이 보이고 바나나밭이 많이 보였으며 경작지로 쓰지 않는 풀밭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풀밭을 보면서 우리고장은 한푼의 땅이라고 묵일세라 밭을 일굴 수 있는 땅은 모두 경작지로 하고 있는데 이곳의 많은 풀밭으로 미루어 이곳은 경작지의 부족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안내원과 같이 앉아가면서 타이의 농업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타이는 중부가 평원이고 동부는 고원이고 기타 지방은 산이라고 한다. 타이의 경제와 사회구조에서 농업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주요 농산품들로는 중부에 입쌀, 카사바(木薯, 감자처럼 괴경을 주요한 전분으로 한다.) 과일, 동북부에 옥수수, 북부에 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과일로는 바나나, 두리언, 야자 등이리고 한다.
파타야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93師(孤軍)박물관을 참관하였다. 93사는 원래 국민당 운남지구 제8군에 예속되었는데 1949년에 인민해방군에 패전하자 퇴로가 막힌 그들은 부득불 국군 제 8군단 모사 709퇀 부퇀장 리국휘가 잔여부대 약 1,000여명을 거느리고 중국 광서로부터 버마로 철수, 당지에 체류하여 있던 원 국민당 항일원정군 잔여부대와 합병하여 93사를 성립하였으며 장개석의 '훈령'에 따라 금삼각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공작전을 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버마, 라오스 변경지대에서 실패는 없다, 공산당을 소멸하고 승리하여 꼭 대륙으로 돌아간다는 오직 하나의 신념으로 반공작전을 하여 왔다.
1992년에 타이 국왕이 은혜를 페풀어 무기를 놓는 전제하에서 고군(孤軍)을 중국난민의 신분으로 타이에 머물러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단다. 지금은 그들에게 타이 국적을 신청하면 입적시킨다고 한다.
고군박물관에는 고군이 국민당과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공작전을 한 사료들이 사진으로 벽에 붙어 있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장비도 전시 되어 있었다.
박물관에는 또 장가도 못 가고 보토리로 늙은 그들의 후대들이 작은 다락집에서 아편을 피우는것도 관광의 한 개 항목으로 되여 있었다. 그들과 한어로 대화가 되는지라 물어보니 부모들은 이미 다 저 세상으로 갔으며 자기들은 장가도 못 가고 금삼각지대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생활하다가 지금은 여기에 정착하여 이렇게 사는데 박물관 경영자가 그들에게 매일 100바트씩 준다고 한다.
나는 그들의 이런 말을 듣고 “중국에 가 보고싶지 않은가?”물었더니 “왜 화인으로서 중국에 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갈 신세가 되지 못하니 이렇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들이 비록 이국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늙어 왔지만 필경은 중국인 후예로서 중국을 그리는 그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고 중국에 가 보려 하여도 갈 신세가 되지 못하고 관광객들을 위하여 동물원 안의 '동물'의 신세로 밖에 되지 않은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나올 때에 보니 출구 오른쪽에는 한자로 커다랗게 還我國籍(나의 국적을 돌려달라) 라고 씌어 있고 왼쪽에는
孤軍入泰籍宣誓詞
고군 타이 귀화 선서문
我們要遵從國家的法律和服從國家的命令
우리는 국가의 법률을 존중하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며
我們要以生命愛護和保衛我所生存的國土
우리는 목숨으로 우리가 생존해가는 국토를 애호하고 보위하며
我們要忠誠擁戴當今皇上陛下和皇族
우리는 충성으로 현임황제페하와 황족을 받들어 모시며
我們要以身體和生命來保護皇上和實座
우리는 신체와 목숨으로 황제와 그 실좌를 보호할것이다
란 선서문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十年北伐(10년북벌)
八年抗戰(8년항전)
四年內戰(4년내전)
叱打金三角(질타금삼각)
勝敗論狗熊(승패로 졸장부를 론하다)
란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국민당에 충성을 다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남정북전 하면서 싸워왔건만 마지막에 자기나라 국적도 없이 이런 타국신세가 되어 결국에는 타이국왕에게 하는 선서는 국민당에 대한 저주라고 생각되었다.
고군박물관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서 코끼리를 타고 야산을 유람하면서 악어늪으로 갔다. 코끼리를 탈 때에는 당지의 코끼리몰이군이 코끼리의 목을 타고 관광객들이 코끼리 잔등에 올려놓은 안장에 둘씩 앉았다. 그전에는 그저 동물원에서 코끼리구경이나 하였지 난생 처음 타보는 코끼리라 이것도 타이 유람에서 하나의 큰 기쁨이었다. 그곳의 야산은 우리 고장처럼 교목이나 관목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교목목이 좀 있고 대부분은 10여 미터 심지어 몇십미터 높이 자란 커다란 초본식물들이었다.
늪가에 이르니 악어낚기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는데 악어들이 욱실거렸다. 우리도 배를 타고 늪 가운데로 들어가서 악어낚기를 하였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낚시대에 고기를 달아매고 수면위에 드리우면 악어들이 그것을 먹겠다고 풀쩍 뛰어 오른다. 사람의 동작이 더 날쌔면 악어가 허탕을 치고 악어가 더 날쌔면 사람이 고기덩이를 떼운다.
악어낚기놀음을 끝낸다음 우리는 2인승마차(해방전에 말하던 이십오시)를 타고 버스 있는데로 왔다.
그날 저녁에는 동파락원에서 타이민족가무 공연을 보았다. 그들의 민속표현에는 타이민족들의 복장, 혼례, 서민생활, 왕실생활, 태권도표현 그리고 타이 인민들의 민족투쟁 등이 있었으며,
그 투쟁은 서로 칼을 들고 싸웠는데 칼이 부딪칠 때면 불이 번쩍거리며 아주 치열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코끼리를 타고 칼싸움을 벌리었는데 치열한 싸움끝에 타이민족들의 영용한 승리로 막을 내리었다. 우리는 10여 마리의 그 육중한 코끼리가 무대에 등장하여 치열한 싸움을 하는 장면 등을 통하여 타이민족들의 풍속과 용감한 기개를 볼 수 있었으며 또 희한하기만 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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