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테러리스트, 이토 히로부미
2006-02-24 동북아신문 기자
![]() 이 책은 국내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파헤치고 있다. 그동안 일본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신화’도 벗겨낸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은 서구문명의 충격 앞에서 진로모색에 한창이었다. 기득권 유지세력이 있는가 하면 근대화 혁명을 모의하는 세력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곳곳에서 일종의 학파들이 형성돼 미래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장차 혁명동지들을 대거 만났다. 짧지만 영국유학도 갈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때 그는 공신(功臣)이 됐다. 그후 그의 신분적 한계는 더 이상 그의 출세가도를 가로막지 못했다. 구미 여러나라를 돌며 근대국가의 기초를 공부했고 돌아와서 ‘일본국’의 설계자로 떠오른다. 그는 일본헌법의 아버지다. 나라의 방향을 기획했고 그같은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헌법설계를 위해 그는 유럽의 석학들을 두루 만나고 배웠다.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바 없는 그가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44세때 그는 백작(伯爵)의 작위를 받았다. 45세때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이어 50세때는 초대 귀족원의장에 오른다. 근대일본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패권주의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서 대한제국도 희생된다. 1905년 65세때 한국을 방문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통감에 오른다. 조선 식민화의 선봉이었다. 이같은 공이 인정돼 67세때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 1909년 6월14일 한국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의장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여행에 나섰다가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총격을 받았다. 안중근의사가 쏜 총이었다. 저자는 전기적인 측면 이외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관심이 가는 조선침략 과정에서 이토의 역할도 상세하게 해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