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의 수필 257>국난을 승전으로 극복한 군인

-합단적(哈丹賊)을 물리친 고려의 원충갑-

2013-04-03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강원도 원주에는 이름난 강변 유원지가 하나 있다. 바로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있는 간현국민관광단지이다.

  이곳은 섬강을 끼고 강 양쪽에 40~50미터의 바위가 병풍처럼 절벽을 이루며 기암괴석이 울창한 나무들과 어울려 풍광이 아름답고, 맑은 강물과 넓은 백사장이 있어 관광과 강수욕장으로도 제격이다. 중앙선 열차와 도로교통도 좋아서, 강원도는 물론 경기도와 서울 사람들까지도 찾아와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 관광단지로 들어가는 곳에 고려(高麗)의 정란공신(定亂功臣)인 원충갑(元冲甲) 장군의 묘소가 있다. 지정면 간현리 뒤 산록에 있다.

   묘소는 원주시에서 문막읍으로 가다가 간현국민관광지로 가는 길로 들어간다. 언덕 위 갈래길에서 오른쪽길로 가면 바로 간현리이다. 이 마을 끝쪽에서 우측으로 포장이 안 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원주이씨 시조의 사당인 이곡사(梨谷祠)가 있다. 묘소는 여기서 북쪽으로 200m 쯤의 언덕에 있다.

   이곡사 관리인집 동쪽의 작은 밭을 지나 북쪽 숲길로 들어선다. 길은 좁고 가파르며 우거진 풀과 나뭇가지들이 몸을 스친다. 언덕에 오르면 바로 묘소다. 시원한 바람에 땀이 흐르는 얼굴이 한결 시원하다. “이 더위에 뭣하러 왔느냐?” 하시면서도 반가움에 부채질을 해 주시던 시골집 옛 부모님 모습이 떠오른다.

   묘소는 규모가 비교적 작다. 두 날개에 봉분이 동그랗다. 봉분 아랫부분은 얕은 처마 모양을 한 높이 40㎝쯤의 화강암 면석들을 둥글게 둘렀다. 그 앞에 상석이 있고, 망주석 한 쌍이 지켜보고 있다.

   묘비는 봉분 오른쪽 옆에 있는데 까만 오석에 글씨가 하얗다. 모두가 새로 만든 것들이다. 옛 석물(石物)들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모두 없어졌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묘소 석물들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가 없을까?

 

    원충갑(元冲甲, 1250~1321) 장군은 강원도 원주(原州) 출신을 대표하는 무인(武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고, 충렬사(忠烈祠)에 모시어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외적(外賊)이 침입하여 국토를 유린하는 국난(國難)을 승전(勝戰)으로 극복(克服)하는 큰 전공(戰功)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투에 나설 때에는 장군도 부대장도 아니었다. 대부대의 지휘자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장비와 병기가 우세하거나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의 별초군(別抄軍)에 소속된 일개 군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10전 10승으로 원주를 점령하고 있는 적을 격파하고, 결국에는 압록강 너머로 패퇴하게 하는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충성심은 더욱 높고 공로는 빛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이렇게 적혀 있다.

 

   “원충갑은 원주 사람이다. 체구가 짝달막하되 용감하고 눈동자가 빛났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었다. 충렬왕 때 합단(哈丹)의 침략군이 철령(鐵嶺)을 넘어 침입하자 여러 고을에서 모두 도망하고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적이 원주(原州)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전후 10회의 전투로 적들을 크게 격파하여 도라도(都刺闍) 등 68명을 베어 죽이고 사살자도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적은 예봉이 꺾이어 감히 공략하지 못하여 여러 성(城)이 지켜지므로, 비로소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것은 모두 원충갑의 힘이었다. 이 공로로 여러 번 옮겨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충선왕 때에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에 임명되고, 충숙왕 6년에…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2년 뒤에 생을 마치니 나이 72세였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영웅이 난다더니 장군이 바로 그렇다.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적군에 나라가 거의 점령되고 임금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할 지경에 원주에서 그 예봉을 꺾었다. 그것도 수령도 장수도 아닌, 지방 군대의 이름 없는 사람으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국난(國難)에는 위아래 없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시범해 보인 것이다. 전란에 도피하기 일쑤요, 실패에 변명만 일삼는 세상에, 말없이 내리비추는 빛나는 태양처럼 길이길이 빛나는 삶이다.

   옛 시인들도 다투어 장군을 예찬하였다. 고려말 조선초의 시인 조준(趙逡)과 정필(鄭弼)의 찬양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철령(鐵嶺)의 오랑캐 말이 바람처럼 달리는데

           이름 없는 젊은이가 한 칼로 공을 높였네.

          나라에 바친 외로운 충성은 해를 꿰뚫고

          몸을 잊은 대의(大義)는 만리장성 같았네. <조준>

 

          지축(地軸)을 흔드는 성난 호랑이

          북원(北原)에서 막아 만민을 살리었네.

          공적(功績)은 삼분(三分)된 나라에 으뜸이고

          장한 기운은 백전(百戰)의 성(城)에 서렸네. <정필>

 

   어찌 시구에서만 찬양할 것인가. 국민으로 사는 자는 모름지기 장군을 찾고 그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장군은 바로 한국인의 표상(表象)이요, 우리들의 귀감(龜鑑)이다.

   돌아오는 길은 착잡하였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쓸쓸하였다. 길이 번듯하지 않아서보다 장군의 묘소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적어서이다. 간현관광지에 놀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이 더욱 서글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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