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소설《토지》-2

<신길우의 수필 248>

2012-10-17     [편집]본지 기자

 

 2. 《토지》의 주인공

 

    소설 「토지」는 만석꾼으로 군림해 온 최 참판 댁이 몰락하면서부터 홀로 남은 어린 딸 서희가 자라면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4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는 구한말 1897년 추석부터 광복된 1945년 8월 18일까지 48년 동안, 공간적으로는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진주․통영과 경성,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과 일본의 동경에 이르기까지 그 무대가 넓다.

   작품은 최씨 가문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서희를 비롯하여 길상, 조준구, 환국, 윤국, 임이네, 용이 등과, 노비와 소작인, 친지와 지식인, 스님과 장사꾼, 친일파와 의병 등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물 700여명의 삶이 그려졌다.

   작품 전개도 최씨 가문 중심에서 점차 등장인물들의 개인사 중심으로 기술되어,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삶이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따라서, 「토지」는 한 가문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당시를 살아간 여러 사람들의 개인사(個人史)이면서, 동시에 국가와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변화까지도 담겨 있다.

   박경리는 일찍부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제3회 현대문학상을 받은 「불신시대」도 그렇고, 그의 작품의 전기를 마련한 「김약국의 딸들」 또한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시장과 전장」과 「파시」도 운명과 맞서 살아가는 여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이런 점은 그가 사랑과 접촉을 별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부모와 남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과, 미움과 연민의 괴로움과, 가난의 고통 속에서 청상과부인 어머니와 살며 어린 딸을 기르면서 여성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남성 위주의 대부분의 작품세계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삶을 그리고, 나아가 남성보다도 더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성상을 작품화하고 싶은 창작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여성이 주인공인 것은 박경리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작품 「토지」의 주인공도 제1부에서부터 등장한 최씨 가문의 가장 어린 딸 최서희이다.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전염병으로 죽고, 젊은 어머니는 하인과 사랑도피를 해버리고, 엄하게만 대하던 아버지는 피살되어 고아의 신세가 된다. 그런 그녀가 가문과 재산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간신히 할머니가 숨겨둔 재물을 찾아내어 중국 간도로 가서 재산을 모아서, 귀향하여 본가와 재산을 도로 찾는 그녀의 삶이 「토지」 전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 최치수는 양반 지주의 직계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부정한 비밀을 눈치채고 부인과도 애정 없는 관계로 지내면서 폐인 같은 생활을 한다. 아내가 구천과의 사랑 도피를 하자 울분 속에 방탕생활을 하다가, 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귀녀와 김평산의 음모로 피살되고 만다. 최치수는 최 참판 댁을 계승 유지하는 마지막 남성으로서 잠시 등장한 것이다. 주인공을 위한 혈통과 전통의 배경으로서의 역할인 것이다.

   최치수의 이복동생 구천도 주인공은 아니다. 동학당에 사생아 신분을 숨기고 최씨 집안에 하인으로 들어와서, 주인이며 이복형인 최치수의 부인과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함께 도망친다. 부인이 죽은 뒤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동료의 밀고로 일경에 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전통과 윤리, 기존 질서의 파괴와 변화를 상징하는 배역이다.

   외가 쪽 친척인 조준구도 주인공은 못된다. 그는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죽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최씨 집안의 재산을 차지한다. 서희를 자신의 꼽추 아들과 결혼시켜 영구히 장악하려 하지만, 불만이 쌓인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쫓겨나고 만다. 사리사욕과 오만한 권위주의적인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다.

   전편에 걸쳐 많은 활약을 하는 길상도 주인공은 아니다. 함께 자라면서 최서희를 충직하게 돕고, 간도로 가서도 적극 도와 많은 재물을 모으게 하고, 최서희와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서희의 지독한 집념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분의 차이로 고독해한다. 구천과 어울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복역도 하고, 절간에서 탱화를 그리며 조용히 지내기도 하지만, 5부 말미에서도 또 검거되어 갇힌다. 그의 활동은 최씨 가문의 재건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역할은 역시 가장 중요한 조역(助役)일 뿐이다.

   최서희의 아들인 환국과 윤국은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이 연이어 일어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풍족한 처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서 방황과 고민을 한다. 윤국은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옥살이를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최씨 가문의 후일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서희의 할머니인 윤씨 부인은 최 참판 댁의 어른이다. 청상과부로 12살 아들 최치수의 수명장수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갔다가 뒤에 동학의 수령이 되는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해 김환을 낳는다. 그녀는 적자 최치수와 신분을 숨기고 종으로 들어온 아들 구천 대하면서, 정절을 잃은 죄의식과, 두 이복 아들에 대한 모성애와 연민의 갈등으로 고민하며 살다가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 집안을 꾸려 가는 가문의 대들보 역할을 하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서희의 어머니인 별당 아씨는 가문의 유지 보호에 여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10여세 차이가 나는 남편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권리도 소홀하며, 고독 속에서 하인 구천과 불륜에 빠져 함께 도망하고 만다. 여성의 애정 갈등과 윤리적 변화를 나타낼 뿐이다.

   그런데 최서희는 1부에서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린 소녀로 시작하여 80세 노년에 이르기까지 전편에 걸쳐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어머니의 사랑 도피와 아버지의 피살에 고아 신세가 된 서희는 외로움과 슬픔으로 포악하고 집념이 강한 여성으로 성장하고, 타고난 총명함과 적극성으로 집안을 지키기 위해 조준구와 맞서 나간다. 어려운 대결 속에서 재산을 빼앗기지만, 마을 사람들이 조준구의 행패에 의병을 일으키자, 그 틈에 할머니가 남긴 재물을 찾아내어 간도로 간다.

   중국 간도에 정착한 서희는 길상과 공 노인의 도움을 받아 두류(豆類) 매점과 땅 투기로 큰돈을 번다. 빼앗긴 재산을 찾으려고 돈 모으기에 집착한 그녀는 독립군 군자금 지원 요청은 거부하면서도 친일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는 행위까지 하며 재산을 모은다. 결혼도 윤씨 부인이 욕심을 낸 양반 자제 이상현을 포기하고 인간적이며 야망을 가진 하인 길상을 선택하여 혼인한다.

   최서희는 평사리로 귀향하여 토지문서와 본가를 되찾아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그 이후 그녀는 성취 후의 허탈감을 느끼면서, 옥살이를 하는 남편 길상을 뒷바라지하고, 두 아들을 공부시키며 가문을 이끌어간다. 작가가 작품에서 즐겨 썼듯이, 「토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최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 밖에도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많다.

   이상현은 사랑하는 서희가 길상과 결혼함에서 받은 패배감과,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무능력에서 오는 죄책감 등으로 방황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나온다.

   서희의 충직한 여종 봉순은 기생 기화가 되어 미모와 소리로 유명해지지만, 상현에게 버림받자 딸 양현을 키우며 아편쟁이가 되고, 서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지만 상현과의 관계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희의 곁을 떠났다가 섬진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봉순의 딸 양현을 둘째 아들 윤국의 배필로 삼으려 하였으나 양현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심한 윤국은 학병에 끌려간다. 나중에 양현은 서희에게 이끌려 함께 평사리로 귀향한다. 끈끈한 우정이 내리 사랑으로까지 이어지는 깊은 인연을 보여준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월선과 결합하지 못한 용이는 부인 임이네의 돈 욕심에 못 견뎌 하다가, 귀국하여 서희의 본가를 지키며 안정된 말년을 보낸다. 사랑과 인간관계의 또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하는 이동진, 지삼만, 송관수, 소지감 등 여러 사람들, 반면에 최치수를 죽여 처형된 김평산의 아들 김두수(기복)는 일제의 밀정으로 악역의 조연을 한다.

   3, 4부에 등장한 임역관의 딸 명빈과 명희, 귀족층의 조용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서의돈, 극작가 권오송, 성악가 홍성숙, 조선에 동정적인 일본인 오가다 지로 등은 대부분 인텔리 계층으로 이들을 통해 희망 없는 식민지 시절의 암울한 삶을 나타냈다.

이처럼 소설 「토지」는 민족 전체의 문제를 다룬 서사시적 작품이지만, 또한 여러 계층의 다양한 개인의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내용도 사랑과 불륜, 간음과 겁탈, 폭력과 살인,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거기에 전염병과 흉년으로 겪는 고통스런 삶과 죽음 등이 동학란과 한일합방과 광복까지의 왜정 치하가 배경이 되어 전개되고 있다.

   소설 「토지」는 거시적으로는 한말과 왜정시대의 우리의 역사이고, 미시적으로는 다양한 각각의 개인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갖가지 삶의 모습들을 담아낸 대하소설이라 할 수 있다.

 

 

3. 한국 여인의 한(恨)의 역사

 

 

   우리나라 사람은 ‘한(恨)’이나 ‘원(怨)’을 많이 이야기한다. 삶에서도, 음악과 문학 등 예술작품에서도 이들은 흔히 발견된다.

   그런데, ‘한’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여 맺힌 가슴속의 울화(鬱火)이고, ‘원’은 남에게 당해서 생겨진 마음속의 멍이다. 따라서, ‘원’은 미움과 원망으로 쉽게 이어지고, ‘한’은 괴로움과 한탄을 만든다.

   그러므로, ‘원’이나 ‘한’은 풀어야 한다. 그런데 ‘원’은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남이 풀어주어야 하지만, ‘한’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면 풀어진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한’을 ‘원’과 동일하게 여겨 원한으로 품고 괴로워한다. 사실 ‘한’은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것을 풀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박경리도 “한(恨)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지요. 못 미치는 게 바로 한이며, 한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지요”라고 한 것을 보면(동아일보 1982. 8. 21.), 「토지」도 그 중심은 ‘한’이고, ‘한’을 풀고자 하는 ‘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의식이 강하고 냉정한 최치수는 어머니의 비밀을 알려는 한과, 함께 달아난 아내 별당 아씨와 구천을 찾으려는 한을 품고 살았다. 소작인 용이는 무당의 딸 월선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가지고 평생 살았고, 독립운동가의 아들 상현은 서희에 대한 사랑의 한으로 괴로워하였다.

   그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한이 최서희의 것이다. 조준구에게 빼앗긴 재산을 도로 찾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한을 달성하기 위한 긴 과정의 삶이 「토지」의 핵심 내용이다. 다만, 작가는 그것을 이뤄내는 주인공을 아들이나 손자 같은 남성에 두지 않고, 보다 많이 더 깊게 한을 품고 살아온 한국 여인을 선택한 것이다.

   ‘한’은 남성보다 위대한 모성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지아비와 자식을 위해 좌절하지 않고 살았던 여인들의 한과 한풀이를, 작가는 이 훼손된 시대에 반드시 회복해야 할 인간적 덕목으로 설정한 것이다.

   박경리는 자신이 원(怨)과 한(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은 삭이고, 한은 풀어냈다. 출생부터 불합리하고, 남달리 불운의 삶이라 더욱 깊었던 원을 속으로 삭여내고, 가슴속에 품어오던 옹골진 한을 문학을 통하여 풀어낸 것이다. 그리고 남성 위주의 세상과 작품세계에서 여성의 삶도 중요하며, 남성 못지않게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오기 있는 신념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려낸 것이다.

 


“나는 이 작품 속에 모든 것을 던져 넣었다. 인간은 적당히 사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궁극의 목적은 구도이기 때문에 작가는 고행자다. 내 생의 승부도 이 작품과 이 작품을 쓰는 내 정신의 고행에 던져 넣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 1973. 6. 27.)

 


   그런 점에서 소설 「토지」는 작가의 삶의 종합이자 박경리 문학의 종합이다. 대부분의 삶을 「토지」집필로 살았기에 「토지」는 바로 작가 자신이요 그 응축된 삶이며, 또한 작가의 한풀이이다. 그러므로, 소설 「토지」는 여성이 품었던 한을 여성이 이뤄낸 여성 중심의 한의 역사라 할 것이다.

   위대한 작품은 남다른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것들을 극복해낼 때 만들어지기도 한다. 중국의 사마천도 죽음보다도 더 수치스럽게 여기는 궁형(宮刑)을 받고서 『사기(史記)』를 썼고,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새 작품을 쓰지 못하면 모든 작품의 출판권을 넘겨주어야만 할 마감 1달을 남긴 절박한 시점에서 26일만에 「도박자」를 완성하고,「죄와 벌」을 썼다. 박경리의 경우도 그랬다. 창작의 시작도, 대작 『토지』의 집필도 그런 어려운 처지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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