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봉조 저]청루에서 난 비명소리 2
청루에서 난 비명소리
(1)
사면에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첩첩산중에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듯한 초라한 오막살이집 한채가 있었으니 그 집에는 중년홀아비 심원우란 사람이 어린아이 삼남매를 키우며 살고있었다. 장자 대식이는 열한살이요 차자 영식이는 아홉살이요 그 끝으로 딸 옥실이는 일곱살이다.
관청이란 백성들의 염라국이요 인세란 도처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아우성소리였으니 고된 품팔이에 득병한 안해를 약 한첩 쓰지 못한채 저승으로 보내고 인간이 귀찮아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이 심산벽지에 옮겨와 몸을 묻고 사는 형편이라 그 신세 얼마나 고달프랴. 하지만 눈알 새까만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비탈전을 일궈 감자농사로 날에 달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하루, 예와 다름없이 계명축시에 일어난 심원우는 감자 한가마니를 쪽지게에 지고 반백리도 넘는 부근의 시골장마당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이게 원일이냐? 손가락꼽음으로 아무리 세여봐야 장날이 분명한데 장마당엔 사람의 그림자라곤 얼씬하지 않으니말이다. 여느 장날같으면 비록 작은 장마당일지라도 여기저기서 사구려소리로 뒤범벅이 되고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빽빽하련만.
심원우가 의심을 금치 못해 쪽지게를 벗어놓고 읍내의 이골목 저골목을 다니며 살펴보니 가가호호가 모두 빈집이요 뜰안엔 닭, 돼지만 소란스레 소리칠뿐 사람구경은 할수가 없었다. 이에 더더욱 의심천만한 심원우가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던중 문득 한곳을 바라보니 사람 대여섯이 모여서서 벽에 나붙은 글을 읽고있었다.
급히 한달음에 달려가 한사람을 붙잡고 무엇이라 썼나 물어봤더니 그 사람 소리내여 그 글을 읽어주는것이였다.
광 고
고을백성들께 알리노라. 300년래 없던 크나큰 홍수가 오늘 미시(未时)에 이곳을 지나니 백성들은 지체없이 급히 피신하라.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난 심원우는 혼비백산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며 밑둥잘린 나무마냥 그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여보시우, 왜 이렇게 앉아있소? 빨리 피신합시다.》
옆에서 일깨워주는 사람의 말에 반정신이 들고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온정신을 차린 심원우 혼자 생각하되
(안해 없이 사는 내야 이제 죽은들 한될것이 무엇이랴만 어미 없이 크던 어린것들이 불쌍코야. 나중에야 죽든살든 목숨이 붙어있는 한 집으로 달려가 방책을 대여보자.)
뛰는지 나는지 숨이 턱에 닿도록 허둥지둥 집에 와보니 어린것들은 천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왔다며 좋아서 퐁퐁 뛴다. 그런데 벌써 홍수 넘어오는 소리가《쏴―》하고 들려오지 않겠는가?! 더 어정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 어디로 뛰자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심원우는 만사불문하고 자그마한 판자쪼각을 찾아 어린애 손바닥만한 패쪽 네개를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노끈에 꿰여 아이들의 목에 하나씩 걸어준후 자기 목에도 하나 걸었다.
《얘들아, 우리들의 생사를 알길 없구나. 천행으로 우리들이 살아난다면 이 패쪽을 표식으로 혈육을 알아볼수 있느니라…》
말소리는 오열에 떨리고 얼굴엔 두줄기 락루 비오듯한다.
《얘들아, 너희들이 살아서 앞으로 크면 천고만난속에 허덕이더라도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니라. 절대 인간의 도덕에 벗어나는 짓들은 하지 말아라…》
부탁이 끝나기 바쁘게 홍수는 밀려왔다. 사품치는 홍수는 심원우가 아이들 부르는 소리, 아이들이 아버지 부르는 소리를 삼켜버리고 집도 사람도 밀어가버렸다.
(2)
홍수에 휘말려가는 심원우일가 네사람의 운명을 한입으로 한꺼번에 다 말할수 없으니 여기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심원우의 차자 영식이로 잡는다.
비록 황구소아의 어린 나이라도 총명하고 담기있는 영식이는 홍수에 몸이 싸여 떠내려가면서도 정신만은 올똘하였다. 물속에 잠겼다간 떠오르고 떠올랐다 잠기면서도 행여나 그 어떤 의지물이 없는가 하여 정력을 몰부어 살피던중 요행 큰 널판자 하나가 그의 옆으로 떠내려왔다. 영식이는 잽싸게 그 널판자에 몸을 얹었다.
물길따라 흘러흘러 얼마를 갔는지? 기진맥진한 영식이는 정신이 흐리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몽롱한중 왁작왁작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에 정신을 차려 눈을 떠보니 언제인지 모르게 자신의 몸은 뭍에 올라 누워있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노라니 숱한 사람들이 긴 장대끝에 쇠고랑이를 해달고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건져내고있었다.
자기처럼 방금 구원되여 나온듯 온몸이 물참봉이 된 한 사나이에게
《도대체 이곳은 어떤 곳이며 저 사람들은 웬 사람들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기가 바로 서울 성밖이니라. 저 사람들은 장안 백성들인데 자체로 뭉쳐나와 이렇게 사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고있단다. 참 착한 사람들이지.》
그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행으로 살기는 살았다만 집도 절도 없이 빈주먹으로 살아갈 앞날이 기막히구나.》라고 한탄하는것이였다.
듣고보니 과연 그러했다. 일개 헌헌장부로서도 살아갈 일을 그처럼 걱정하며 장탄식을 하는데 무의무탁한 나어린 고아로 된 영식이로서야 더 이를데 있으랴.
영식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맥놓고 앞으로만 걷는다.
정처없는 발길이다. 발길닿는대로 가는 걸음이다. 얼마를 걸었는지…부지불식간에 장안통로에 올라섰다. 또 얼마를 걸었는지…문득 길옆을 바라보니 불이 이글거리고있는 대장간이 있어 젖은 옷이나 말리려고 거기에 들어갔다.
불을 쬐이노라니 온몸이 녹작지근해지면서 쓰러질듯하다가도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면 각가지 수심이 몰려들어 설음이 북받친다.
(나는 요행 살았다만 아버지는 어떻게 되였을가? 살았을가 죽었을가? 혈혈단신 이 내 몸은 어떻게 살아갈가?)
때는 이미 유시(酉时)를 지나 어둠이 깃들었건만 자리를 뜰 생각을 않고있는 영식이를 보고 중년사나이 대장쟁이가 연장들을 거두며 말을 묻는다.
《얘야, 저녁때가 되여 일을 거두어야겠는데 넌 왜 집에 갈 생각을 않느냐?》
본래 아이들이란 서러운 일이 있을 때 말 거드는 사람이 있으면 설음이 울음으로 터지는 법이다. 영식이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보물 터지듯 터뜨렸다.
대장쟁이는 영식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깨워준다.
《너 아마도 잘못한 일이 있어서 부모들에게 쫓겨나온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서 부모들께 잘못했다고 빌면 너를 용서해줄것이니라.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미워하겠느냐? 너를 잘되게 하느라고 꾸지람한것이니라. 자―어서 돌아가거라.》
영식이는 더더욱 섧게 운다.
《아니, 아니옵니다. 저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흐흑… 집도 없나이다. 엉엉…》
영식이는 흐느끼다 통곡하고, 통곡하다 흐느끼면서 자기 일의 자초지종을 대장쟁이에게 이야기했다.
영식이의 일장설화는 대장쟁이의 측은지심을 자아냈다. 대장쟁이는 영식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였다. 저녁을 먹고난후 대장쟁이는 영식이를 보고 의논조로 말하였다.
《얘야, 너는 부모형제 잃은 고아이고 나는 일점혈육 없는 홀아비이니 우리 둘이 부자지의를 맺고 오손도손 재미나게 사는게 어떠냐?》
지상천하에 이보다 더 반가움이 어디 있으랴. 삼춘 고한 가문 날에 단비 만난 농사군인들 영식이의 반가움에 비하며 천리타향에서 고우 만난 나그네인들 영식이의 기쁨보다 더하랴.
대장쟁이의 태산같은 은혜에 감지덕지한 영식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을 올렸다.
《아버지, 이 아들의 절을 받으옵소서.》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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