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나본 사람

생명의 원색- 황유복교수를 만나다 / 장경숙

2006-02-05     꽃잎.낙엽 퍼옴

《설사 죽음이 래일아침에 찾아온다 해도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싶다. 그리고 살아있는한 나의 래일은 또다른 하루의 오늘이 될것이다.》
     -황유복:《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한사람이 일생동안을 이같이 여러 분야의 탐구와 그 결실을 맺는다는것은 생의 그 매 하루하루마다를 진지한 노력과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할것이다… 오늘도 황유복교수님은 왕성한 열정과 지성인의 책임감으로 쉼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 교육, 나아가서는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나가는데 선각자의 의무와 직분을 다하고있다. 우리 민족에 지극히 귀중한 그분을 처음 만나뵙기는 일년전 북경 향산의 단풍이 빨갛에 물들던 가을이였다.


만남(1)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


그날 북경거리는 명절을 위해 피워놓은 꽃들이 가을태양아래 찬란히 웃음짓는 환락의 분위기로 넘쳤다. 명망있는 예술가의 소개로 사업차 만난분이 황유복교수님이실줄이야. 북경 서사환에서 동륙환을 왕복하는 동안 장장 5시간을 차안에서 사업이야기는 고작 10여분으로 끝내고 사업과는 관계없는 동서남북, 고금중외의 화제로 시간가는줄 몰랐다. 왕징 옥류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기실 황교수님을 6년전 어느 회의에서 뵌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없으세요? 하고 작별인사 대신 재차 말씀을 드렸는데 교수님은 의연히 조금도 기억에 없으시단다… 귀인은 잊음을 좋아하신다는 옛사람의 말이 있으니… 그럼 저 혼자만 귀한 기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그 기억못한것으로 인한 미안함을 다음번 만남을 약속하는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니 결국 사무실이나 커피숍도 아닌 달리는 차안에서 명절분위기 젖어있는 북경거리를 바라보며 끝없이 나눈 무주제의 화제와 의연히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첫만남때문에 결국 그날 만남이 초면이 된 그것, 그것이 만남(1)의 포인트였다.


만남(2) 백문불여일견


중앙민족대학 황교수님 사무실로 찾아간것은 그날 그 미안함의 약속과 무관한 또 다른 하나의 사업에 관한 일때문이였다. 헌데 두 벽을 꽉 채운 서가에 총총히 꽂혀진 책들과 사무상 우아래없이 쌓여져있는 책들을 보면서 먼저 학자의 진솔한 모습과 그 풍요로움에 존경의 맘을 금할수가 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속에는 《인도불교문화사》, 《유교문화가 동양3국에 준 영향》, 《리퇴계》등과 같이 한때 뿌리찾기문화열조에 인기를 누렸던 서적들이 있는가 하면 종래로 읽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이 즐비했는데 주인공의 연구분야와 그 성취에 대한 국내외 언론매체들이 《세계적인 석학》, 《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한중문화교류사연구의 1인자》, 《민족적 량지의 학자이며 실천갬, 《겨레와 함께 숨쉬는 지성인 》, 《오로지 민족에 바치는 일편단심》이라고 평가했던 그 의미지를 알듯했다. 이야기 도중에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에 대화는 자꾸 동강났지만 그 틈새로 상우에 놓인 책들을 이것저것 뒤적여볼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그날 교수님의 사무실을 나올 때 책을 한구럭 들고 나왔다.

이야기에서 다 못한것들을 책을 통해서 직접 보는것이 훨씬 더 나을것이라는 생각에 교수님도 동감이였다. 귀가하는 차안에서 책구럭을 들춰 골라낸 책이 론문집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이였다. 황유복교수님의 인기와 그 사회적활동반경을 잘 보여준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밤,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개혁개방의 급물살이 조선족들의 재래식 삶에 준 충격은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고 그 미래를 우려하는 조선족 지성인들에게 조선족공동체의 새로운 비전과 민족정체성의 재확립에 대한 리론적 연구와 발전방향 제시를 기대했다.

민족사학자로서 황유복교수님은 시대와 민족의 기대앞에서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학계의 시각을 모으는데, 그리고《우리는 누구이며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갬에 대한 민족구성원들의 바른 인식을 가질수 있도록 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조선족이란 바로 국적과 민족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중국국적의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 호칭으로서 그들은 전통적인 조선민족문화를 근간으로 새로운 중국조선족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이다. 《한세기가 넘는 시대적인 시련을 극복하면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형성된 조선족공동체가 이 시대 사람들의 방황으로 해체된다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귀추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민족문화창달을 위한 문화의 재창출은 자기문화에 대한 확신과 긍지,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확립을 우선으로 요구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바로 1994년부터 시작한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과 우리 민족의 언어를 상실해가는 우리 민족의 도시청소년들을 위해 한국어학교를 세운 그 거사들은 한 학자로서 민족의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 몰부은 정열이다. 미국하버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 모은 강의비용을 자본금으로 북경한국어학교를 창설한것을 시작으로 지금 전국 각지 10개 도시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10년간을 운영해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오동나무를 심자》등 글을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의 고급인재류실과 기술인재부족 등 시급히 보완하고 중시해야 할 문제들을 깨우치기도 했다. 10회에 걸치는 조선족발전학술심포지엄에서 제기한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농촌총각들의 결혼문제, 한국진출로 인한 리혼과 가정의 해체문제, 도시청소년 민족언어상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민족교육, 벤처산업과 인재육성, 중국조선족 록색민족문화경제 기반구축과 농촌경제발전전략 등 굵직한 주제들은 학자로서 그의 선견지명뿐이 아닌, 지성인으로서 그 자신에 속하는 조선족 사회와 그 앞날에 대한 지대한 열애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파워는 이와 같이 개혁의 격변기 조선족사회가 그 정체성이 도전받고 이미 이뤄놓은 공동체사회의 경험과 습관에 의심과 회의를 느낄 때 민족공동체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긍정하고 새로운 비전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리드해온 그 점이다. 민족을 위한 그의 일편단심을 그가 쓴 저작과 론문에서 만나뵙게 된것, 미상불 그것은 만남의 귀중한 깨달음이고 경하할 행운이였다.


만남(3) 온라인 E- mail


그 귀중한 깨달음과 감동을 황교수님과 나누고싶어 만난것이 바로 온라인- 이메일에서였다.


《청나라 아극돈의〈봉사도〉에 대한 초보적연구》란 론문을 력사소설을 읽듯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학계에서 《봉사도》내용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있더군요. 특히 그림속의 기발이 태극기의 원형이 아닌가 하는 학계의 주장은 지금까지 1882년 박영효가 처음 만들어 1883년 조선의 국기로 제정했다는 태극기의 력사가 기실 1725년 조선 영조의 장남 왕세자 책봉례에 파견됐던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그린 화집 《봉사도》에 나와있으니 태극기의 기원은 교수님의 발견으로 인해 그 력사를 새롭게 써야 할것 같습니다. 학술계의 지대한 관심과 높은 평가를 읽으면서 민족사학자로서 교수님의 위치와 명망에 재삼 숙연해졌습니다.

중한불교문화교류 천년집대성이란 평판을 받고있는 《중한불교문화교류사》와《해동입화구법고승전》이란 저서, 그리고《중한불교교류사 연구》란 론문도 승려들의 활동과 그 종파 및 불교사상을 년대기식적인 기술보다는 독립된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는데 천년사이 그 많은 승려들이 두나라사이를 오가면서 구법활동을 했던 력사모습을 한눈에 보도록 하여 《일만년 너무 길어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네》라고 했던 모택동의 시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두나라사이 이와같은 교류활동을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것이 불교사학계의 오랜 과제이자 바람이였었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과연 거시적인 조명으로 천년의 불교문화교류사를 집대성했습니다.


《세 녀성에 의해 놓여진 다리》란 글을 읽으면서 역시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성양을 건너 이곳 내몽골까지 그 《다리》는 교수님이 아니였더면 그렇게 멋지게 놓여질수가 없었을것입니다. 그 문장을 번역하여 어느 잡지사에 추천하고싶은데 동의하시는지요?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를 읽기전에 교수님 이름의 《그룹성격》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선생님이 부모없이 컸다고 말씀하실 때 놀랐습니다. 수필을 읽으면서 그 놀라움을 지나 이름을 선사받고 살구나무숲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눈물을 금할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메일을 하면서 그 장면을 보는것 같아 가슴이 찡-합니다. 그 감동은 남들과 다른 감동,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 부모 없는것이 한이였다면 참말로 그것은 교수님으로서는 개변할수 없는 운명이였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늘 《한가지 모자라》는 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운명때문이 아닌 저의 잘못때문인가고 자문해본적이 골백번, 하지만 더욱 색다른 감동은 김선생님의 그 사랑이 넘치는 부탁대로 교수님이 오늘까지 그 이름자를 고스란히 지켜오신것, 엥겔스로부터 결국은 성경에 있는 이름임을 발견하기까지 고스란히 지켜오신 교수님께 아름답고 순수하신 그리스도인 김선생님의 축복이 시종 교수님과 함께 해준 력사였을수도 있다는 그점에 대한 감동이였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 그 노을을 따러 산정까지 간 소년이 후날 미국 일류대학의 교정에서 그 노을을 보다, 그것은 기나긴 세월의 흐름, 그 공간을 지워버리면 완벽하게 하나로 된 그림, 가난했던 동년의 동글동글한 꿈과 오늘 학자의 짙은 사색이 함께 어우러져있는 《노을》앞에서, 그리고 참으로 고독하고 부족함이 너무 많았던 동년이 피운 그 《들국화》의 아름다움을 이제 이순의 나이에 조금도 이순의 내음이 없이 그렇게 펼쳐보이는 재간만이 아닌 심경을 더욱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교수님의 수필은 허무궁씨가 표현한대로 읽을 때 《속도를 공제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다 읽어내려가버립니다. 절대 급히 읽어서는 안되》는데 어느새 다 읽어버립니다. 《학구적 치밀성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학자수필》(서영빈)이여서 그렇게 빨리 읽어버리지 말고 《새김질》하며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군자지교 담여수》나 《잘못 채워진 단추》는 읽는자로 하여금 은연중에 박식해지고 즐거움과 겸손함을 함께 수확하게 했습니다. 《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신화학》, 《사랑의 민족학》, 《사랑의 사회학》, 그리고 《원일아침수상록》등은 글자체에 담고있는 고금중외의 그 많은 이야기와 성구가 수필이란 쟝르속에서 만났다는것만으로도 짙은 미감을 주고있어 읽고난 감수가 너무 신선하고 산뜻합니다. 《첫사랑의 이야기》등 주인공의 인생 에피소드와 관련된 글들에서는 작자가 삶에 대한 진지함과 솔직함, 그리고 하냥 드팀없는 모습때문에 멋지고 다정하고 존경스러울뿐 조금도 《신사》의 《자격》에 손상이 없습니다. 학구적으론 추호도 모호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와 서정은 동년의 순수함과 젊은날의 사색같이 조금도 색바램이 없이 《들국화》와《저녁노을》처럼 눈부시고 찬연합니다. 그러나 학자의 량지, 민족사학가의 사명감으로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사랑과 관심을 토로할 때는 《사상갬이며 《정치갬입니다. 장춘식씨가 남계(황유복의 호)수필을 평론하면서 《정체성 리론을 장황하게 설명한데는 물론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고 한 리유를 알듯합니다. 《도라지》잡지사의 청탁이 아니였더면 남계수필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생각이 이젠 남계수필은 기실 《조선족사회의 문화 재창조》를 위한 리론연구와 실천활동을 재천명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지 않고서는 안될 글이였음을 알았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예술적 특색에 《호견법》이라고 있는데 바로 황교수님의 론문과 수필은 완전히 다른 분야지만 서로가 너무 잘 보완해주며 주인공이 인생철학, 조선족이란 민족집단에 소속된 삶, 그리고 삶의 의미가 정의되는 공동체의 활로를 찾기 위한 《박학다식한 인생 선배의 잠언》(서영빈)을 독자의 맘속에 재락인해줍니다.


만남(4) 커피숍에서


타자에 익숙하지 못하니 아예 만나서 이야기할가요? 하는 황교수님의 메일을 받고 커피숍에서 만난것이 흰눈이 많이 내리고난 뒤의 푸근한 오후. 많은 이야기중에서도 렴치없이 그냥 알고싶은것이 그 《첫사랑의 주인공- 진명》이란 녀성에 대한 에필로그였다.  《아직 한번도 못만났어. 아니 안만나려고 했어…》황교수님의 그 말씀에 진짜로? 설마… 헌데 과연 그랬다. 지식이 새롭게 숭상을 받고 학술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 《진명》은 언녕부터 옛련인을 찾고싶었다. 그녀의 불행한 혼인은 그녀로 하여금 첫사랑을 잊어본적이 없게 하였다. 그의 곁으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 현실을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연구생시험을 치러서 중앙민족대학으로 다시 돌아오는것이였다. 황교수님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참고서와 도움을 청하는 모든것에 대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하나하나 다 챙겨서 보내주고 시험을 잘 치를것을 고무격려하였다. 하지만 황교수님은 진명이가 자기곁으로 오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광주에 있는 중산대학 문화인류학과에 추천하여 입학시켰다. 그후 그녀는 중국민족학학회 년회에서 만날수 있을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회의에 달려왔지만 황교수는 그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출장갔다. 《옛날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깨고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고 각자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제 만나서 남은 인생과 사회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될것이 없는줄을 압니다. 더구나 이미 많은 보귀한 시간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중년의 방황으로 랑비하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아직도 완벽주의자입니다. 순간이라도 자기한테 한 약속을 어기고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황교수님은 아마 지금도 누가 보든가말든가 술을 마시지 않으시는가보다. 젊은 날에 우파로 몰리여 비참한 마지막을 마치면서 조선족은 술을 먹고 망치니 너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스승의 그 한번 부탁때문에 지금껏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결벽증있는 사람마냥 완벽할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고있다.

20대후반에 대학교교단에 섰을 때, 누가 북경군구 사령원의 《천금아가씨》를 그에게 소개해왔다. 조건으로 말하면 흠잡을데 없었지만 첫사랑이 민족문제로 깨여지면서 타민족한테는 장가들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뚜렷하게 밝혀 대방을 놀라게 했다.

중앙민족대학조선어학과를 설립한후, 교수영입을 위해 인사권을 위임받고 동북3성으로 갈 때, 학교령도는 조선어학과 자료관리원 명액을 주면서 안해감을 골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명액으로 결혼후 장시간 견우직녀생활을 하고있는 나이 많은 조선족선생님의 부인을 모셔왔다.

그후 북경에서 만나 곧바로 련인이 되여버린 처녀가 바로 지금의 부인- 최명희씨이다. 황교수님은 슬하에 아들 한분을 두고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부인 최명희씨는 국가기관에서 국장으로 임직하였었고 지금 리직휴양중이다. 처녀시절의 그 어여쁘던 모습으로 결혼해서 오늘까지 변함없이 사업터에서는 우수한 지도자로 가정에서는 사랑스런 안해로 학자와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왔다.

가진것을 쉽게 남을 위해 내여줄수 있는 그 마음, 행복은 바로 그가 즐거이 남을 위해 베푸는 맘에 대한 갚음의 선물이리라. 그래서 학비를 받지 않는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것이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면서 부모가 버린 고아를 황교수님한테 무조건 보내와서 교수님이 그 애을 받아 길렀던 이야기나,  조선족 졸업생들중 엘리트를 한명이라도 북경에 더 남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것이나, 200여명 조선족학생들을 미국과 한국으로 류학을 보내면서 여러모로 되는 배려와 도움을 주는데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은것 등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명망을 자신이나 가정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보다 조선족의  앞날을 위해 이바지하는데 바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황교수님의 성품이고 인격이며 그의 민족적사명감뒤에 짙게 깔린 생명의 원색이다.

그래서 그날 커피값은 워낙 약속을 해온 황교수님의 몫이였지만 얻은것이 많은 내쪽에서 내기로 했다.


만남(4) 《도라지》의 부탁을 받고…


《도라지》잡지사의 부탁으로 취재를 위해 황교수님을 만나 그의 가슴속에 아직도 매듭처럼 남아있는 하나의 오랜 숙원을 알게 되였다. 북경에다 《기술전문대학》을 세우려는것이다. 일찍 그가 스무살되는 해 중국력사상에서 지식분자를 《홍, 백》색으로 획분하던 시기, 정치운동에 대한 열정보다 인간의 순수함을 더욱 사모했던 그에게는 홍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그 중간색에 속하는 중간파학생으로 중국 대서남의 이족자치주에 재교육받으러 내려갔다. 인간의 인격을 그렇게 물감칠하듯 인위적으로 칠해놓고는 3인조를 무어 지방으로 내려보냈는데 뜻밖에도 워낙 한곳으로 함께 가야할 그 3인조가 두곳으로 나위여가야할 형편이 되여 부득불 홍색은 백색을 책임지고 감독해야할 의무가 있으니 함께 가고 중간색갈인 황유복학생은 단독으로 가게 되였다. 극빈으로 참담한 이족들의 생활모습에 놀랐다. 특히는 그곳의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도 교육을 받지 못하여 온 마을이 문맹이였다.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귀중함이 그의 젊은 마음을 들끓게 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이족언어를 배운 동시에 창고를 빌려 교실을 만들고 집집마다 동원하여 애들을 오전만 학교에 나와 배우고 오후는 집에서 일손을 돕게 하는 반공반독의 학교를 개설했다. 세세대대로 가난과 몽매속에서 살아온 이족인민들은 공부하는 자식들 모습에 감개무량하였고 중앙민족대학 당위에서는 전국각지로 재교육받으러 나간 학생중에서 소수민족지구에 가서 학교를 설립한 황유복학생의 전형사적을 대서특필로 홍보하고 《화선》입당까지 시켰다. 일년후 귀교하여 자신의 사적을 련환화로 만들어 대학가에 붙여놓은것앞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정치에 대한 열정으로 인정받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든 학교였고 그 학교를 만들고부터 뒤이어 중앙민족대학에 졸업배치되여 일하면서 본 대학에 조선어문학과가 없는것을 보고 1972년에 조선어문학과를 설립했으며 연변대학에 공과대학을 만드는데 일조했고 1989년에는 북경에다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한중수교후에 또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교육자로서 민족문제전문가로서 그는 조선족사회문제중 중요한 고리의 하나가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을 진행해야함을 보아냈다. 중국에 조선족기술학교를 세워 한국축협, 농협, 그리고 산업기술학원 등과 손잡고 우리 민족 젊은이들에게 현대화한 양식업기술, 가공공예기술, 현대화농법 등을 가르치려는것이다. 바로 이미 조상이 닦아놓은 삶의 터전을 현대적 과학기술로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어주려는 선각자의 노력이고 꿈이고 바램이다. 2005년 7월, 《경제생활》잡지사가 귀국한 조선족로무자들의 재정착문제 특별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흑룡강성에서 온 한 젊은이가 발언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우선 황유복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번 장춘회의에 참석해서 저의 인생이 바뀌여졌습니다.  교수님께서 하신 중국조선족 농촌청년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과 기대의 말씀은 저의 맘속에 불씨로 심어졌습니다.》 그는 제 9회 학술심포지엄참석자로서 그번 회의에서 계시를 받고 후날 오리농법을 시작하여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창출해낸 장본인이다.  황교수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고있다. 《대학에서 일생을 제자를 키우는데 힘을 바쳐온 나에게 참말로 자랑할만한 제자들이 많지만 그날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가지고 대도시로 진출할 앞날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기실 그번 회의에서 나는 그 젊은이를 알지도 못했지만 강단에서 한 한시간도 안되는 연설에서 이런 수확이 생기다니… 참말로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앞날은 그런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조상이 걸구어놓은 땅을 지키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과 함께 우리 민족문화을 만들어갈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김씨미업》은 조선족농촌경제의 출로를 찾는 좋은 한 시작이 아닐수 없다.

문화의 21세기에 민족교육으로 조선족문화를 번영시키고 민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는 그의 주장과 노력은 그의 《숙원》을 현실로 변화시킬줄로 믿어마지 않는다. 유복자로 태여나서 이순의 오늘까지 그의 생명의 주선률은 멈출줄 모르는 탐구와 노력으로 연주된 교향악을 방불케 한다.


취재의 마감을 황유복교수님의 글로 끝내고싶다.

《그 언제나처럼 때가 되면 20세기는 마감되고 21세기가 저절로 열린다. 그렇다 해서 우리 민족의 미래도 저절로 주어지는것은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난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만들어지는것이다.》 (황유복: 《조선족 벤처산업 인재육성과 21세기 조선족사회의 미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