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의 장편연재 23

제2부 불타는 반도

2012-03-31     아데라
장혜영

3장 만리장성
1

백로가 지나더니 혹서는 한풀 꺾이며 주춤한다. 아직은 산과 들에 묻어 있는 더위를 식히며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왔다. 가을바람에 수분이 증발되는 가로수 잎들은 낙엽을 앞두고 마지막 푸름을 싱싱하게 자랑한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 위로는 유람선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뚝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요트에 달린 끈을 잡은 수상스키운동원이 물결을 가르며 아슬아슬한 재주를 넘는다.
유리가 운전하는 아반Ep는 한강을 끼고 넓게 펼쳐진 88올림픽대로에 진입했다. 준호는 유리의 옆 좌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져 놓고 있었다.
준호는 강릉을 다녀온 뒤로 오늘 처음 유리를 만났다.
며칠 전 준호는 아버지의 느닷없는 사고소식을 접하고 강릉을 다녀와야만 했다. 아버지가 체불임금을 받아내려고 사장실에서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다가 신고로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공사판에서 작업 중에 손가락을 잘려 병원에서 복구수술을 받긴 했지만 체불임금은 고사하고 치료비조차 부담하지 않으려는 사장의 비열한 태도에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한 모양이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평소의 삐딱한 시선이 수습불가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이도 아버지가 그때까지 입원중이고 경찰의 조서가 작성되기 전이어서 인맥을 통해 법무부에 넘겨져 강제추방당하는 변고는 면할 수 있었으나 연줄을 댄 사람이 유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최영식은 그녀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은 감사는 고사하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랬구나. 알고 보니 그런 영문이었구나. 그러니까 나를 도와준 사람이 한종수의 딸이었단 말이지. 저기 경찰아저씨, 어서 날 파출소로 압송해가시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이 아빈 죽으면 죽었지 원수 놈 집안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준호 너도 명심해라. 저 다시 한 번 경고한다만 아버지나 할아버진 너희들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찌감치 헤어져라.”
그렇게 아버지는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갔다. 준호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볼 뿐 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세대의 한이 아버님의 가슴속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렸나 봐요. 도와준다는 게 도리어.”
유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저분들에게는 전쟁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겁니다.”
“참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강릉에 계세요. 제가 소개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말고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요?”
“안 됩니다.”
“왜요?”
“아버지는 30년 경력을 가진 당 간부입니다. 종교 같은 건 인민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지요. 그러니 어찌 목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 길로 가시는 건 아버지의 운명입니다.”
준호는 무거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버지는 피해가야 할 길이 너무 많았다. 이 세상에 길은 많고 많은데 오로지 한길만을 고집하니 그 길이 막히기만 하면 갈 길이 없어진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강릉에서 준호와 유리 그리고 지은이 세 사람은 아버지 사건 때문에 우연히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 유리는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친구인 국회위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내려왔고 지은은 내막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된다며 제 발로 강릉으로 달려왔다. 공작산 등산을 다녀온 뒤로는 유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전화 통화에서 그는 유리가 할아버지의 감시 때문에 외출이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신도 자취방에 있으면 하루에 두세 번씩 아버지의 감시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이제는 그런 감시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훼방한다고 하여 마음이 변할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그들은 한동안은 만나지 말고 각자 밀린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감시가 완화되면 그때 만나도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또 만나게 된 것이다.
“오빠, 여기 있었구나!”
지은이가 환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오는 바람에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다소곳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유리의 시선도 천천히 그녀 쪽으로 이동했다. 지은은 커피숍에 들어서다 말고 준호 옆에 앉은 낯선 아가씨를 보자 흠칫 놀라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금방 혀를 홀랑 내밀며 자신의 결례를 애교로 넘기려고 했다.
“오빠,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숨겨두고 나 몰래 사귀고 있었구나. 오빠, 너무한다.”
아무 주저 없이 그들 사이에 의자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명철 씨는 어쩌고 너 혼자 온 거니?”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난감해진 유리에게 지은이한테는 명철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함으로서 혹여 불러올지도 모를 불필요한 오해를 일소시켰다.
“오빠 보고 싶어 왔는데 명철 씨의 동행이 왜 필요해. 아가씨, 저한테도 녹차 한 잔 주세요. 둘이서 나 몰래 데이트하느라고 속인거구나. 그지 오빠?”
“아니라니까. 일이 좀 있어서. 난 어제 오고 유리 씬 아침에 도착했어.”
진실인데도 변명처럼 들려 준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유리도 고개를 숙인 채 귀뿌리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해. 얼굴에 다 써져 있어.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속은 거지. 말해 봐. 사귄지 얼마나 됐어? 사랑의 이정표는 어디까지 지났어?”
“그러지 말고 서로 인사나 해.”
“유리 씨라면서. 전 지은이예요.”
지은은 도발적인 표정을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알릴 듯 말 듯 그냥 가벼운 목례만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립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녹차가 배달되어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준호는 분위기를 어떻게 조절하면 좋을지 몰라 유리의 표정만 살폈다. 유리도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지은은 그게 재미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만 소외당했다는 불만과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아간 유리에 대한 질투가 꿈틀거리는 모양인지 그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 던져 왔다.……

“오늘 저희 집으로 가요. 할아버지께서 친구 생신잔치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 집을 비우셨어요. 같이 할아버지의 육필초고 정리해요.”
아버지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지은과의 삼각관계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는 조금 서먹해진 듯싶었다. 차에 올라 캠퍼스를 빠져나오면서 먼저 화제를 유도해낸 사람은 유리였다.
“아버님의 체불임금과 보상금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변호사 한 분 계세요.”
“고맙습니다만, 왜서인지 변호사까지 청하며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받아내면 좋고 받지 못해도 무방합니다. 몇 백만 원으로 빚을 청산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저도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것으로 아버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서.”
유리의 한없이 그윽한 눈동자에 이슬이 반짝였다.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억울한 무시와 외면을 당하고도 그분의 마음의 상처까지 보듬어 주는, 그녀의 샘물 같은 진정이 뭉클하고 가슴에 와 닿았다. 아들이 못한 효도를 그녀가 대신하고 있었다. 진옥이와의 이별 때문에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은 준호가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데 알게 모르게 장애물 같은 작용을 했다. 준호에게 아버지는 부친이기 전에 기득권을 명분으로 자신을 억압하는 어떤 견고한 감옥이나 형틀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리에게 아버지는 아파할 줄도 알고 보상심리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마주보기가 부끄러웠다. 부자간의 천륜과 도리를 지키기도 전에 세대차이의 깊은 계곡을 두고 전쟁부터 하려 한 자신이 민망해졌다. 내 가슴 속엔 아직도 관용과 너그러움이 부족하다. 나에게 불리함을 주었다고 해서 외면하고 지어는 복수하려는 악심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랑보다는 증오심이 내 마음을 정복하고 있다. 자신에게 해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의 허물마저 용서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6.25참전자 실록」을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집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선 내 마음속에 있는 불만과 증오부터 정화해야 한다. 유리처럼 조건 없이 밝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간과 세상을 대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절대로 전쟁이 근절될 수 없다.
“지은 씨라고 하셨죠?”
“네?!”
느닷없이 지은이를 화제에 끌어들이는 저의를 알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신경이 팽팽해졌다.
“솔직하고 당당한 성격이 부러웠어요.”
유리의 투명하고 보송보송한 볼에 박꽃 같은 하얀 미소가 피어났다.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변명을 달아야 하는지, 구태여 구질구질한 주해나 설명이 필요한지도 모르며 구실을 고르기에 급급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호의적이 아니었어요. 거의 도전적이었고 적의까지 비쳤어요. 지은씬 분명 준호 씰 사랑하고 있어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한 번도 지은일 이성으로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랑도 질투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 정말 자신이 없어요.”
기실 유리는 이미 사랑을 위해 부모님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는가. 그녀도 이번 전쟁에서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유리 씬 지은이와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이미 탈북자청년과 결혼까지 언약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와 지은 씨의 사랑쟁탈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네요. 전 솔직히 두려웠어요.”
그녀의 뺨이 빨갛게 익어 능금 같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부모님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전쟁은 두렵지 않아요.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승리는 반드시 우리 몫이 될 거예요.”
“신념을 천륜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요.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건 혈육이 아닌가요.”
차는 그냥 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88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 행주대교를 건너 신평동 쪽으로 좌회전하여 일산으로 진입했다.
실은 지난번 강릉에서 세 사람은 유리의 차를 타고 함께 상경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는 단 일 분도 숨 막혀 살지 못하는 지은이마저 전날 밤에 뭘 했는지 뒷좌석에 혼자 기대어 이동하는 동안 내처 잠만 잤다. 차에서 내려 유리와 갈라져서야 자취방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걸어가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빠, 그 아가씨 좋아하지?”
그 아가씨란 유리를 가리킨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지은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니 그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할 것 같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자니 유리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모른 척 어물쩍 넘기려 했다.
“누굴?”
“유린지 하는 아가씨 있잖아.”
준호는 대답을 회피한 채 지나가는 승용차를 피하는 척 하며 딴전을 피웠다.
“나보다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것 같았어. 반듯하고 투명하고 지적인데다 교양미까지 넘치고. 유리 씨 앞에서 저도 모르게 나 자신이 초라하고 추접스럽고 더러워 보였어. 고속도로만 달려온 순탄한 인생, 꽃밭 속에서 향기만을 즐기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진흙탕 속에서 더러운 악취만 맡으며 살아온 나의 거칠고 피투성이 된 인생과 대조되며 질투와 시샘을 억누를 수 없었던 거 있지. 난 많은 남자들과 지내봤지만 진정으로 이성으로서 사랑한 사람은 오빠뿐이었어. 그런데도 오빠의 사랑을 얻지 못했는데 너무 쉽게 오빠의 마음을 독점해버린 유리 씨가 미웠어.”
지은이답지 않게 그녀는 말끝을 축축하게 적시기까지 했다.
“지은아.”
부르긴 했지만 정작 할 말은 고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의 사랑을 아니, 진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그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랑은 지은이뿐이 아니었다. 진옥이도 그랬다. 결코 지은이가 그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초라하고 추접스럽고 더러워서 사랑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준호는 지은이가 여자로서보다는 동생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리 씨와 사랑의 전쟁을 선포하고 싶었어. 여자 대 여자로서 사랑의 도전장을 던지고 싶었어. 패배자는 날 거라는 예감이 들면서도. 그러나 난 오빠의 행복을 위해 그녀와의 경쟁을 포기했던 거야. 오빠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한텐 행복이잖아.”
“고마워.”
“고마울 게 뭔데. 그리고 나한텐 지금은 명철 씨가 있잖아. 난 명철 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명철 씨도 날 사랑하고. 이거면 충분한 거잖아. 이만하면 나도 행복한 여자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빠에 대한 지은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지은에겐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현명함까지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알면서부터 한 층 더 성숙된 것 같았다. 인간의 진정한 성숙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차를 주차시키고 집으로 들어갔다.
메마른 초가을 바람에도 끄떡없이 정원수들은 푸르싱싱하기만 했다. 그 나무들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 침엽수였다. 목련나뭇잎이나 철쭉 잎도 아직은 여름철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녹음이 짙었다.
집에는 가정부 한 사람 뿐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방에서 한종수에게 축객 당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기억의 수면위에 떠올랐다. 덕구의 손자라는 말을 듣자 노인은 금시 노발대발했었다. 자신의 구술을 그대로 책에 옮기면 6.25전쟁담을 들려주시겠다고 한걸음 양보는 했지만 (물론 유리가 설득한 덕분이었다.) 준호 입장에서는 집필 원칙과 어긋나는 타협은 허용할 수 없었기에 다시 한 번 노인의 축객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노인은 당신의 신념만은 지킬 수 있어도 손녀는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손녀가 할아버지를 속이고 당신이 그토록 제공을 거부하던 친필초고를 몰래 넘겨주려고 댁으로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한종수는 사랑이 신념을 이기고 혈육을 능가한다는 이치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한종수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제 방으로 올라가요.”
그녀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20여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아가씨의 은밀한 공간이 공개되는 순간이라 유리도 가슴이 떨리는 모양인지 얼굴에 분홍빛 홍조가 피어올랐다.
준호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부모님과 할아버지 외에는 어떤 남자도 들어가 보지 못했을 유리 씨만의 공간, 그녀의 체취가 흠뻑 배어있을 공간에 첫 연인으로 초대된다는 흥분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제 그녀는 사랑하는 준호를 누구에게도 열지 않았던 은밀한 규방에까지 안내하며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성스럽고 숙연한 기분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방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와 은은하고 싱그러운 체취가 싱싱하게 감돌았다. 꽃무늬 벽지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반사되며 눈부시게 화사하다. 역시 눈 같이 하얀 시트를 편 정교한 디자인의 침대며 윤기 도는 노란색 목조 화장대와 테이블, 인형들과 벽에 걸린 산수화 그림들…… 모두가 운치 있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가에는 두툼한 전문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있고 그 밑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어느 물건에도 유리의 숨결과 손길이 묻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새롭고 의미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할아버지께서 친필원고예요.”
유리는 테이블 서랍 안에서 두툼한 원고지를 꺼내어 준호에게 보여주었다. 볼펜으로 쓴 것이었는데 흘림체인데다 글자체가 팥알만큼씩 큼직큼직해서 부피는 두꺼워도 분량은 얼마 될 것 같지 않았다.
“원고지 300~400매 분량이에요. 이대로는 글씨를 알아보기가 힘드니까 준호 씨하고 교대로 타자하면 오늘 하루면 가능할 거예요.”
“그럼 시작합시다. 할아버지께서 오시기 전에.”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작업을 분담했다. 준호는 원고를 읽고 유리는 타자했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자 어색한 분위기는 금시 사라졌다.
유리의 워드 다루는 솜씨는 거의 자동적이었고 손가락과 워드가 동체라도 된 듯 신비하게 움직였다. 내용을 불러주던 준호는 가끔 그 황홀한 손놀림에 넋을 빼앗긴 채 멍하니 바라보다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군 했다.
사실 그 육필원고를 정리하여 파일을 준호의 수중에 넘겨준다는 건 유리한테는 할아버지에 대한 배신과 불경을 동시에 저지르는, 범죄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엄두도 낼 수 없는 용단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그 결단만큼 그녀에게 고마웠다.
준호는 초고를 보고서야 비로소 죽었다던 한종수가 다시 부활하게 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유리가 당초에 그 사연을 차마 입 밖에 발설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해되었다. 한종수는 귀신이 아니라 분명 사람이었다.
그런데 준호는 초고 내용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구절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담을 들려주면서 늘 자신을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를 흘려 싸운 영웅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조국이 부르면, 혁명이 수요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가로 자처했다. 반대로 한종수는 악질경찰이며 친일주구이며 지주아들인 반동분자로서 저주와 매도의 대상이었다. 격분하면 󰡐인간쓰레기󰡑,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전지 원수󰡑라는 극단의 표현을 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준호는 한종수의 일대기에서 할아버지의 말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발견했다.
“이 글을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네요. 가치판단의 혼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유리 씨 할아버지의 만주시절내용 같은 거 말입니다. 지주이던 아버지 한상권을 3․1운동에 참가한 반일애국지사이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땅으로 피신한 영세지주라고만 진술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회상에 의하면 한상권은 소작농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일제와 만주국에 충성한 악질지주라고 낙인이 찍혀있는데 말이죠.”
“증조할아버지께서 지주라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3․1운동 때 만세시위에 참가하셨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피신가신 것도 사실이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전 그 점을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두 노인은 서로 역사적 평가를 대비해 자신에게 유리한 측면만을 부풀리고 불리한 측면은 회피하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입니다. 역사적 진실이 이처럼 사람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면 진리가 어떻게 발굴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거실에 내려와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그들이 유도해낸 화제는 휴식에 걸 맞는 담소와 덕담이라기보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심각한 쟁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밖에도 한상권은 지방유지이며 독립운동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와준 사람으로 미화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양심적인 순사이자 반공투사로 미화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을 위해 반공에 앞장선 애국경찰, 애국군인으로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유리 씨의 할아버지가 일제의 주구가 되어 반일투사들을 탄압하고 살해한 민족반역자로 질타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의 가치관에 의해 영웅으로 인정된 사람이 다른 가치관으로 투시하면 죄인이나 반동으로 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웅은 곧 죄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편견 속에서, 쪼개지고 분열된 가치관 속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얼마나 힘들며 진리를 발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역사는 지금껏 줄곧 그런 식으로 쓰여 왔잖아요. 진리는 깨어진 가치관에 반사된 부분 만큼, 편견과 주관에 반영된 만큼 존재해 왔잖아요. 혹시 그 두 가치관과 편견을 융합한다면 완전한 진리의 복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진리란 것도 기실은 모순의 통일체인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이분화 된 편견과 편견을 합치고 가치관과 가치관을 합친다? 그렇다고 진리가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진리는 편견과 분열된 가치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객관적 진리란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고 입력 작업은 예상보다 늦게 끝났다. 최종 파일을 복사하고 그녀의 방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 있었다.
“우리 밖에 나가서 저녁식사해요.”
“그럽시다.”
준호는 유리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사실 유리의 집에 있는 일분일초의 시간들이 준호에게는 불안했다. 유리 역시 마찬가지 기분이었을 것이다. 한종수가 집을 나설 때 오늘 밤에 귀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지만 밤늦게라도 불쑥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준호는 거실에 앉아 유리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몇 번이고 호주머니에서 메모리를 꺼내어 보았다. 유리의 덕분에 귀중한 원시자료를 입수했으니 이젠 「6.25 참전자실록」을 집필하는 일만 남았다. 며칠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집필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박사논문제출이 겹치긴 했지만 논문 집필을 위한 자료수집과 분류가 끝난 상태였음으로 T쓰기만 하면 된다.……
“선생님, 아휴, 큰일 났어요!”
갑자기 정원에 나갔던 가정부 아줌마가 허둥지둥 거실로 달려 들어오며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
준호는 엉겁결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유리 씨 할아버지께서……”
“그래요. 주인 어르신이…… 주인 어르신의 차가 막 들어 왔어요. 아가씬 어디 계세요?”
거실에서 떠들썩하는 소리를 듣고 유리가 2층에서 내려왔다.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나요?”
“네. 아가씨, 어떡하면 좋아요?”
“아줌만 어서 밖에 나가서 할아버지를 맞아들이세요. 준호 씨, 미안해요.”
이제 그녀는 할아버지의 반대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두르지도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미안하긴요.”
준호도 될수록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잠시만 밖에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기회 봐서 나갈게요.”
“아니 난 괜찮은데……”
“할아버진 제가 알아서 안심시켜 드릴 거예요. 그럼 잠시 뒤 호수공원에서 만나요……”
“유리야. 너 할아비가 잠간 집을 비운 사이 또 그 녀석을 끌어들인 거냐?”
유리의 말꼬리를 뭉텅 자르며 뜰 안에서 한종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다급히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으나 어느새 노인이 먼저 문을 벌컥 열며 거실로 성큼 들어섰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준호를 노려보는 한종수의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려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안녕하십니까?”
준호는 당황한 김에 굽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지 못하다. 너 때문에!”
노인의 시선에서 노골적인 적의가 번뜩였다.
“……”
“우리 집엔 뭘 하러 또 찾아든 거냐? 다시는 내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거늘! 돼먹지 못하게. 네 맘대로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느그 할아비한테서 배워먹은 수작이더냐?”
주인이 합법적인 자기 영역 안에서 절대권리를 행사하는데 준호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동물은 배설물로 자기만의 영역을 표시하고 그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지만 그 목적은 먹이확보에 그칠 뿐이에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 신념 때문에 싸우는 건 오로지 인간뿐이지요.”
준호는 오도 가도 못하고 노인의 질책 앞에서 함구무언으로 시립한 채 기다렸다는 듯 기억의 수면에 떠오르는 유리의 말 깃을 잡고 그 뜻을 음미하고 있었다. 한종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나와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건가. 우리는 지금 유리를 먹잇감으로 가운데에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는가? 아니면……
“할아버지. 그 분이 스스로 오신 게 아니에요. 제가 청해서 오신 거예요.”
유리의 목소리는 낮고도 부드러웠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한 뜻은 충분히 담겨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하룻밤 묵고 가라며 붙잡는 것도 한사코 뿌리치고 상경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말이지.”
한종수는 구두를 벗고 방구들로 올라가더니 성큼성큼 실내를 가로질러 거실 중앙의 소파에 육중한 몸뚱이를 털썩 부린다. 굵은 목 핏대가 당금이라도 터질 듯이 풀떡거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였다.
“아줌마, 여기 커피 좀 가져와.”
“네에.”
가정부는 쭈르륵- 주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넌 또 어딜 나가려는 거냐? 얼른 여기 와서 앉아봐라.”
“할아버지.”
“글쎄 앉아보라니까. 그리고 넌 거기 우두커니 버티고 섰지 말고 냉큼 내 눈앞에서 꺼져! 다시 한 번만 기어들었다간 가택불법침입죄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래도 뭐가 어쩌고 어째? 뭘 배우고 무슨 박사공부를 한다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에. 네 할아비한테나 가서 건방지게 굴어.”
아무리 불청객이라고 이다지도 인격무시하다니. 너무한다 싶었다. 억울하고 불쾌했다. 이 저택이 당신 혼자 사는 건물이 아니고 당신 혼자만 주인은 아니잖은가. 유리도 이 집 주인이다. 유리가 청한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이 집으로 들어올 자격이 있다. 더구나 한종수가 반대하든 말든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와 유리는 사랑하는 사이이니 이 집으로 발걸음을 할 자격은 그만큼 더 큰 것이 아닌가. 어찌 이 집의 주인행세를 독차지하려고 하는가. 유리의 권리까지 박탈하려고 하는가.
그러나 준호는 치미는 불만을 참았다. 난감해질 유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자제했다. 그에겐 유리의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녀만 있다면 한종수에게 이 보다 더한 수모와 기시를 당한다 해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준호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예의를 깍듯이 했다. 빈틈없는 경의와 예의로 한종수의 무례를 강조하고 질책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종수는 수치감 같은걸 느끼기는 고사하고 나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시는 내 집 앞에 얼씬거리지 마!”
준호는 고개를 쳐들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말 한마디 없이 소파에 그림처럼 앉아 할아버지의 분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그윽한 눈동자는 밖에 나가 기다려주세요 하고 암시하는 듯싶었다. 비둘기처럼 섬약하고 안개처럼 부드러운 그녀가 호랑이 같이 강인한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녀는 절대로 불효와 불경을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독선과 광기를 제압해야 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녀는 자신의 인내와 천성적인 부드러움으로 상대방의 광기를 온화하게 누그러트리는 특수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준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정부 아줌마가 주인 몰래 뒤따라 나와 그를 배웅했다.
“주인 어르신이 겉으로 보기엔 저렇게 무서워도 마음은 좋으신 분이신데 이번엔 왜 저러시는지 통 알 수 없네요. 심기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것 같으니 선생님께서 너무 개의치 마세요.”
“고맙습니다.”
준호도 한종수의 마음이 천성적으로 지독하고 영악해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한종수는 지금 뭔가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휘둘리고 있다. 지금의 한종수는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한 존재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준호는 정발산 전철역으로 나와 육교를 건넜다. 계단을 오르던 중 그는 발목이 삐어 비틀거렸다. 우연한 실수가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의 품에 안기던 유리를 기억 속에 떠올려주어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피부로 느껴본 그녀의 육신은 아직도 기억이 재생될 때마다 준호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실 그들은 그때 벌써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뒤 공작산에서의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랑은 최종확인과 검증을 마쳤다. 그녀를 등에 업고 홍수로 불어난 개울을 건널 때 그의 목을 꼭 껴안아 오던 유리 씨, 목덜미를 간질이던 그 부드러운 숨결과 머리카락의 향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광장의 도처에 그녀와 함께 다녔던 발자취들이 남아 있었다. 준호는 지난날의 발자취를 따라 놀이광장을 에돌아 나왔다. 유리는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날은 어두웠지만 공원에는 산책 나온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잠시건만 홀로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유리 씨, 어서 나와요. 벌써 보고 싶네요.
벤치에 앉은 한 쌍의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그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유리가 옆에 앉아 있다면, 어둠은 내렸어도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벤치에서 그녀를 포옹하고 키스할 용기가 생길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그녀와 키스하고 싶다. 단 한번 만이라도. 이인용자전거를 타고 깔깔 웃으며 지나가는 남녀도 연인이고 손을 쥐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져 웃음보가 터진 남녀도 연인이고 호숫가를 거닐며 속삭이는 남녀도 연인이다. 도처에 연인들이다.
나올 거야. 꼭 나올 거야!
느닷없이 빗방울이 후드득 후드득, 흩뿌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비를 피하려고 어디론가 황급히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자리는 유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였음으로 비우면 안 된다. 폭우가 쏟아져도 지켜야 했다. 그들은 이미 공작산정상에서 폭우의 세례를 겪지 않았던가.
오늘따라 무엇 때문에 유리 씨가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려지는지 알 수 없다. 1초가 1년 같고 1분이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편 한종수의 노기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유리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듣기만 할 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는 결국은 그녀가 측은해져 제 풀에 입을 다물고 말거라는 기대 하나만 걸고 있었다.
“널 이대로 두었다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무슨 사고를 치고야 말 것 같구나.”
할아버지는 벌써 세 컵 채 커피를 마신다. 먼 길을 다녀온 데다 친구들을 만나 약주까지 한잔하셨을 테니 피로와 졸음이 무겁게 겹쳤을 것이다. 커피의 충격으로 가까스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그놈이 왜 여기에 나타나! 그러잖아도 이번에 전우들을 만나 이 얘길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격분하여 절대로 집에 들이지 말라고 당부하더라. 우리가 누구 때문에 피를 흘렸는데. 우리 전우들이 누구 총탄에 맞아 젊은 나이에 원혼이 되었냐 말이다. 절대로 내 손녀를 원수 놈의 손자한테 시집보낼 수 없어. 암, 안 되고말고. 이 할아비의 눈에 흙이 들어간 다음에도 안 돼. 할아비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막을 것이야.”
커피 컵을 든 노인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자꾸만 내리깔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 올리곤 했다.
“아범과 어미한테 전활 해서 널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떨리는 손으로 송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역시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버튼을 눌렀다.
유리는 고개를 들고 뭐라고 말하려다가 단념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온 집안에서 유일하게 유리뿐이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손녀가 죽으라고 해도 복종할 것이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이번 일에 대해서만은 한 치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한종수는 지금 미국 엘에이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아범이냐? 아비다. 그래. 아픈 데도 없고 건강하게 잘 지낸다. 그런데 아범아. 너 아무래도 유리를 미국으로 데려가야겠다. 왜냐고? 그냥 전 번에 말한 그 녀석과 붙어 다니니까 그러지.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데려가거라. 내 걱정은 말구. 난 혼자 지낼 만하다. 그래, 어미하고도 상의해 보거라. 조속한 시일 내로, 알겠냐. 이민이던 유학이던 아무 거라도 좋으니 데려 내가기만 해라. 그럼 꼭 부탁한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이윽히 손녀딸의 얼굴을 주시해본다. 그러나 노인은 아까보다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눈까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피곤하면 정원에서 화분에 물을 뿌리다가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이 들곤 했다.
“인젠 아범한테 부탁해놓았으니 그놈하구 만날 궁리 일랑 하지 말구 미국 갈 준비나 하거라. 조만간에 가게 될 터이니…… 그리 알고……”
노인은 하던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상체를 소파등받이에 기대더니 금시 잠들어버렸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유리는 조심조심 소파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준비를 하던 아줌마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전 밖에서 식사할 테니 할아버지께서 깨시면 저녁식사 대접하세요.”
“알았어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몰래 밖에 나가신 줄 아시면 또 날벼락이 떨어질 터인데 어떡하죠?”
“모른다고만 하세요.”
“우산을 들고 가세요. 밖에 비가 와요.”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준호 씨를 비 내리는 밤거리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유리는 마음이 아렸다. 남자에 대한 이런 애틋한 연정은 유리로서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갈라진 지 두 시간도 안 되었는데도, 그동안 소파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통 준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훈계했는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준호 씨가 날 기다리느라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빨리 나가야하는데, 시장하시겠지, 어두운데 가을바람이 쌀쌀하지는 않을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빙그레 웃음 짓는 그 유순하고 인정 넘치는 모습, 진지한 사유의 코스를 달릴 때면 지적을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일분일초도 갈라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왜 사랑의 강물은 어떠한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이치를 모르고 계실까?
그녀의 청각이 입수한 정보는 단 한마디, 아버지더러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하던 전화통화 내용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는 개방된 분이시기에 한 번도 딸에게 부친이라는 특권을 부려 무엇을 강요하신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던 먼저 딸의 의사를 타진했고 딸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다만 연장자로서 자신의 경험으로 친구처럼 조언을 주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는 효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도대체 자식과 부모 둘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실까? 아버지가 한 번도 할아버지의 말씀이나 의사를 거역하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걸 본적이 없었다.
비 때문인지 거리에는 행인들이 뜸했다. 차량들만 어느새 노면에 고이기 시작한 빗물을 뿌리며 질주할 따름이었다. 촘촘한 빗발 때문에 가로등들도 평소의 빛을 잃고 희미했다. 두터운 빗줄기를 뚫고 노면까지 간신히 내려와서는 금시 빗물 속에 스며들고 만다.
우산도 없을 텐데. 날 기다리느라고, 내가 찾아 헤맬까봐 매점이나 포장마차도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고. 아이참!
유리는 안타깝고 초조한 나머지 빗물이 질척거리는 보도 위를 토닥토닥 달려갔다. 혹시나 해서 육교를 건너고 광장을 지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준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놀이기구를 타던 어린애들도 비를 피해 어디론가 죄다 사라지고 광장에는 어둠만 빗발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분명 거기 계실거야. 그녀는 맨 처음 그들이 호수공원으로 왔을 때 나란히 앉았던 벤치를 그녀는 기억에 떠올렸다. 거기 나란히 앉아 자전거드라이브를 하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거나 배드민턴을 치거나 연을 날리는 시민들을 구경했다.
육교 밑의 포장마차는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중에는 흥이 도도한 취객의 혀 꼬인 말소리도 섞여있다.
유리는 호수로 건너가는 육교를 건넜다. 호수공원광장에는 시커먼 하늘에 길게 드리운 촘촘한 빗줄기들만 허공에서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수양버들처럼 흐느적거릴 뿐 인적은 거의 끊겨 있었다. 이따금 보이는 연인들도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유리는 곧장 기억 속의 벤치를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보니 어둠 속의 희미한 가로등불빛 아래 검은 물체가 벤치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웬일인지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딜 가서 비를 긋지 않고 그냥 여기 앉아서 기다리셨네!
그녀의 발자국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준호가 빗발 속에 우뚝 일어섰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우두커니 마주선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드디어 준호가 빗속을 뚫고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도 준호를 향해 다가갔다.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실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힘차게 가슴에 부둥켜안았다. 옷은 젖었으나 가슴은 숯불덩이처럼 이글이글 뜨거웠다. 쿵쿵 고동쳤다. 어떻게 서로를 원했고 어떻게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는지 누구도 몰랐다. 키스하는 그들의 입 안으로 빗물이 함께 흘러들었으나 달콤하기만 했다. 어둠이 그들의 쑥스러움을 숨겨주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