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그리움을 남기고 간 문인

수필가, 시인 금아 피천득 선생 <신길우의 수필 233>

2012-03-13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불우한 환경이나 처지에 놓인 사람은 흔히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원망 속에 괴로워하며 산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힘들어하기는 하나 원망하며 살지는 않는다.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서 어려움을 잘 극복해낸다. 때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다르게 좋은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훌륭한 삶은 행복한 여건보다 불우와 역경 속에서 오히려 이루어지며 더욱 빛나는 것을 본다.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은 1910년 5월 29일(음력 4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1916년 일곱 살 때 부친을 여의고, 1919년 열 살 때 어머니마저 작고하여 고아 신세가 되었다.

1923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를 만났는데, 춘원은 선생을 ‘거문고를 잘 타는 여인의 아이’란 뜻으로 호를 ‘금아(琴兒)’라고 지어주었다. 춘원은 선생에게 서울 제일고보를 마치자 중국으로 유학 갈 것을 권하여, 1926년에 중국 상해로 갔다. 이때 도산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29년에 호강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1931년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7년에 호강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해에 경성중앙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때 이광수의 집에서 3년간 살며 돈독한 관계를 가졌다. 금아 선생님은 1945년 36세 나이로 경성대학교(지금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1974년까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후 교수와 문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로운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오셨기에 선생님은 36세 젊은 나이로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영문과 교수로, 시인으로, 수필가로 활발하게 활동하신 것도 소년시절부터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키우며 열정적으로 살아온 삶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가난이 힘들고 역경이 고난을 주지만, 그것을 이겨낼 때 삶은 일어나고 활동은 빛난다는 사실을 선생님을 통해서 또 다시 깨달을 수 있다.

흔히 피천득 선생님을 거명하면 수필 「인연」을 떠올리고 수필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 1932년 <동광>에 「소곡」「파이프」등을 발표하였다. 1947년에 『서정시집』을 출간했다.

수필은 1933년 <동광>에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을 시작으로, 「은전 한 닢」「오월」등 다감한 서정수필을 발표하였다. 수필 「인연」은 1974년에 <수필문학>에 발표되고, 수필집『수필』은 1976년에 범우사에서 간행하였다.

그런데도 영문학자나 시인으로보다 수필가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17살 때 일본 유학시절에 유숙한 주인집 딸 ‘아사꼬’와의 만남을 다룬「인연」이 국어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눈가리개한 곰인형을 안은 금아>

여기에 수필론인 「수필」까지 교재들에 실리면서 문학 장르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수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심어주었기도 하다.

금아 선생님의 수필들은 아주 정감적이다. 읽으면서 그대로 따뜻환 정과 그리움을 느끼게 하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일게 한다. 살아가는 일상에서 누구나 겪었던 평범한 소재들,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자그마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서 섬세하고도 정감(情感) 어린 문체로 담아내어, 독자의 마음을 자극하면서 온정을 느끼게 하고 삶에 대해 새로 생각하게 만든다. 교과서에 실린 「인연」과 「은전 한 닢」이 그렇고, 「여심」이나 「엄마」등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래서 누구나 쉽게 감동하고 마음속에 새기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은 동심처럼 순수하고 따사로운 심성(心性)이 바탕이겠지만, 정이 담긴 작은 물건도 소중하게 보관하며 아끼시는 선생님의 삶과 직결된다. 이런 모습은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선생님의 작품에 크게 흐르고 있는 두 가지는 애정과 그리움이다. 이런 점은 수필 「인연」보다 「엄마」에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은 평생 동안 지닌 것이었으며,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딸인 ‘서영’이에 대한 애정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전이되고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러 작품들과 글들을 보면, 선생님은 평생을 사랑을 지니며 그리움 속에 사신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격정적인 것이 아니라 늘 가슴속에서 잔잔하게 생동하는 사랑이었다.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이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사랑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항상 누구와 사랑하고 누구를 그리워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기질을 타고났던 것이다.

이런 삶의 모습은, 열 살 때 어머니까지 여읜 외로움에서 연유했을 것 같다. “맨발로 잔디 밟기나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하고,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를 좋아하며, 시냇물 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좋아하고, 파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뛴다”(「나의 사랑하는 생활」중에서)는, 순박하고 감성적인 여린 성품을 지니셨기에 외로움 속에서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달래며 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인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황진이처럼 멋있던 그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와 고행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수필 「엄마」중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추억과 정서는 평생 동안 선생님을 그리움과 사랑으로 살게 하였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래선지, 선생님은 어머니와 딸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여러 여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금아 선생님의 애제자, 심명호 서울대 교수의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여인들」에는 소년시절부터 늙마까지 여러 명의 여인들이 나온다.

가장 일찍 등장한 여인은 15세 무렵 제일고보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여학생이었다. 그 길로 기차를 타고 그 여학생이 사는 원산까지 갔다 온 열정을 보였지만 풋사랑으로 끝났다. 20대 초반에는 노천명의 시를 좋아하여 100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노천명은 선생님이 춘원의 집에 사는 것을 알고 이광수를 만나겠다는 핑계로 찾아와 만났으나 서로 긴밀한 관계는 되지 않았다.

수필 「유순이」 속의 유순이는 중국 상해 호강대학에 유학할 때 입원했던 요양원의 한국인 간호사였는데, 상해사변이 나자 구하러 달려갔으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말을 듣고는 되돌아왔다. 작곡가 K 여교수는 선생님의 시 10여 편에 곡을 붙였는데, 그 뒤로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가정에까지 소문이 났었다. 수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에 나오는 여인도 실제 인물로, 수필 「파리에 부친 편지」는 이 여인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이 밖에도, 금아 선생님의 글을 거의 다 외우고 있던 여인 X, 유럽에 거주하는 여인 Y, 그리고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 정신적으로 가까이 지낸 수녀 Z, 이들도 금아 선생님을 사랑하게 만든 여인들이다.

선생님한테는 늘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움 속에서 살았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그리움과 사랑이 있었기에 선생님은 즐겁게 사신 것 같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글들에도 따뜻한 정(情)과 사랑, 애틋한 그리움이 많이 담겨 있다. 삶이 그대로 작품에 <금아 선생이 사용하던 돋보기와 필기구> 배어든 것이다.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실제로 선생님은 장식품도 별로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손길로 닳은 애장하는 책과 장난감을 만지고, 가족과 손자,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영화배우 잉글리드 버그만 등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진과, 르노아르의 그림 등을 걸어놓고 바라보며 소탈하고 즐겁게 사셨다. 살림은 가난하고 소박했지만 평생을 사랑과 그리움으로 진짜 많은 추억을 가진 부자로 사신 것이다. ‘사랑하고 떠난 이’로 기억되길 바란다시던 대로(이해인 시인의 추모사), 선생님은 그렇게 살다 가셨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께서 2007년 5월 25일 오후 11시 40분에 작고하셨다. 1910년 5월 25일 출행이니 향년 98세이시다. 1주 전부터 폐렴 증세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는데, 25일 오후부터 갑자기 악화되었다고 한다. 영결식은 5월 29일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서 지내고,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선생님의 본관은 홍천(洪川)이고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종교는 가톨릭이다. 모란공원 앞 정원에는 동으로 만든 선생님의 좌상이 있다. 잠실롯데백화점 민속관 옆에는 <피천득선생 기념관>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이의 사랑받는 연인”― 이해인 시인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 최인호 소설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박완서 소설가

이들이 말처럼, 금아 선생님은 잔잔한 끊임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지니고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살면서, 순수한 동심으로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노래하며 사셨다. 언제 만나도 해맑은 웃음을 지으시며 백년 소년처럼 사시던 선생님, 태어나신 날에 영면의 유택에서 사시게 되었다.

하늘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추억하시며,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따사로운 마음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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