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서예 민체의 大父 여태명 교수
서예가 여태명교수 탐방
[서울=동북아신문]2011년 1월 중국에 체류 중이던 나는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이신 원광대학교 여태명교수님께 새해 인사차 안부 전화를 드렸었는데 뜻밖에도 교수님께서 “2011 찾아가는 소리축제와 함께 하는 화두회 중국공연”에 참석하고자 1월 10일에 중국 연길로 오신단다. 너무나 반가워 도착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만남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당일 오후 연길시소년궁에서 학생들 서예지도가 끝난 후 학교 선배인 장룡선생과 함께 대주호텔로 출발하였다. 10여분 기다리니 관광버스 한 대가 호텔 앞에 정차하였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가운 여교수님 얼굴도 보였다. 우리는 반가워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서예교류로 일찍부터 성함은 알고 있었던 터라 장룡선생과도 구면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교수님 일정을 확인해 보니 11일과 1일에는 스케줄이 꽉 차있었고 공연 당일인 13일 오전에서 3시 전까지는 자유시간이였다.
그래서 사전 상의도 없이 오신 김에 <자유시간>에 연변 서예가들을 위하여 한글서예강좌를 해 줄 수 없냐고 교수님께 부탁을 하였다. 고맙게도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서 교수님을 뵙고 싶어 하니 13일 오전에는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댁을 찾아뵙자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당일 아침 나는 호텔로 찾아가 교수님을 모시고 택시를 타고 시골로 행하였다. 시골에 도착하니 연로하신 부모님은 맨발로 뛰어나오시며 교수님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박사지도교수면 아버지와 같다”며 아들을 서예박사로 키워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였고, 어머니는 병환 중에도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여 교수님을 대접하였다. 시골 음식이지만 교수님은 맛있게 드셨으며 아버지와 약주도 한잔 하시면서 반가움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강좌 장소인 연길시소년궁으로 행하였다. 12시 반쯤 소년궁 서예교실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회원들이 한글서예대가이신 여태명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와 계셨고, 장룡선생은 <여태명 교수 초청 서예강좌>라는 프랑카드까지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서예강좌는 1994년 8월 한국의 박병천교수와 김옥순 서예가가 서예강좌를 한 후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이론과 실기를 가르치는 강좌가 되며 궁체와 판본체, 청봉체, 간도체 밖에 모르던 연변 조선족 서예계에 “민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서예강좌였다.
여태명교수는 서예강좌가 끝난 후 오후 5시 50분부터 연길 대주호텔 공연장에서 진행된 “2011찾아가는 소리축제와 함께 하는 화두회 중국공연”에서 마지막무대를 사군자와 서예 퍼포먼스로 장식하여 수 백 명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공연이 끝난 후 친목을 위한 만찬이 있었으며 회식자리에서도 여태명 교수님은 중국 회원들을 위하여 이름을 직접 캘리그래피로 표현하여 선물하기도 하였다.
사실 한국에 처음 올 때 까지만 하여도 나의 우상은 여초 김응현선생님이였다. 그 분은 25세 젊은 나이에 형 일중 김충현과 함게 “동방연서회”를 설립하고 수 천 명의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최종에는 서예대학교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여 결국에는 돌아가시기 전에 <동방대학원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분의 길을 따라 나도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최종적으로 대학교를 세우는 것이 꿈을 세운지 벌써 십 수 년이 흘렀다. 여태명교수님을 만난 후 나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내가 진정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그날 진짜 많은 서예대가들을 만나 뵈었다. 1997년 이후 오랜만에 만나 뵈는 여초선생님은 운신하기도 힘들게 연로하셨고, 그를 동반하여 오신 구당 여원구선생님도 오랜만에 뵐 수 있었다. 그리고 조종숙, 권오실, 김양동, 정태희, 이돈흥 등 많은 서예대가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여태명교수님을 만난 것은 나에겐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 비록 그날은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하였지만 연락처를 서로 주고받은 터라 그 후 서로 자주 연락하였다.
2004년 나는 전주대학교 교수로 부임되고 나서 가까이 계시는 여태명교수님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2004년이 다 가는 어느 날 교수님께서 “2005년부터 원광대학교에 서예박사과정이 신설되었으니 주변에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번에 “제가 공부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교수님은 “당연히 되지!”라고 하였다.
“교수님께서 저를 지도해 주신다면 제가 박사과정에 등록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여 2005년 8월 경상대학교 국어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나는 바로 원광대학교 서예학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교수님을 모시고 2년 여 공부하여 나는 원광대학교 최초의 서예학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태명 교수님의 첫 박사제자가 되었다.
여태명 같은 서예대가를 지도교수로 모신 나는 정말 행운아이다. 그는 과연 어떤 분인가?
한글서예에는 궁체와 판본체가 있다. 궁체는 궁전에서 왕비들과 상궁들이 사용하던 서체이다. 한글 반포 직후부터 사용되었으니 수 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판본체 역시 훈민정음 반포 당시 서체이다. 서체명은 1945년 일중 김충현에 의하여 판본체 혹은 고체라고 명명되어 궁체와 더불어 전통서체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 민체라는 서체가 더 있다. 이른바 민간에서 사용한 서체를 말한다. 조선시대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궁녀들이나 서민들이 한글소설책을 보려고하였으나 원본이 적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대에 소설을 필사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 중엔 원래 서예를 좀 하거나 서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시간이 촉박하여 격식을 따지지 않고 오직 글씨를 베끼는 데만 몰두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필사본이다. 이 필사본 서체를 여태명교수님께서 다년간 연구하여 독특한 서체로 개발하였으며 1991년 오늘의 한글초대전(12월) 학술대회에서 「한글서예 작품제작에 대한 새로운 방안 모색」을 발표하여 1992년 1월 <월간서예>에 발표되면서 <민체>라는 개념이 처음 서예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즉 판본체를 일중 김충현선생이 명명하였듯이 <민체>는 여태명교수가 명명한 것이다.
<민체>라는 생소한 개념이 등장하자 평생 궁체만 써오던 한글서예가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영화 ‘축제’ 제작사(태흥영화사)측에서 여태명교수의 작품에서 제목을 무단 사용하여 이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요구, 승소하여 한글자당 1000만원의 배상금을 받으면서 <민체>는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여태명교수의 지명도는 급상승하였다. 이금까지 작품 한 점 당 천만원을 받은 서예가는 있어도 한글자에 천만원을 받은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태명교수는 1998년 ‘효봉 축제체’, ‘효봉 개똥이체’등 6가지 pc폰트를 개발하였고 많은 광고사에서 효봉 폰트로 간판을 제작하였다. 그 후 여태명교수는 <여태명문자조형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문자디자인사업에 뛰어들었다. 결과 엄청 큰 호응을 얻어 많은 간판과 상표디자인을 제작하였다.그 열풍을 따라 많은 서예가들이 캘리그래피 시장에 뛰어들었다. 특히 원광대와 대전대, 계명대 등 서예학과 출신 서예가들이 일명 캘리그래퍼가 되어 크게 작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캘리그래피는 본인이 직접 쓴 글씨를 컴퓨터로 디자인하여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으로 순수예술작품이면서 상품성을 띠게 된다. 요즘 소비자들은 따분한 PC폰트보다도 독특한 서체를 원하기 때문에 시장성이 있다.
여태명교수님은 언젠가 “나는 글씨를 가지고 논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박지성이 공을 가지고 놀듯이, 김연아가 빙판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듯 날아다니듯이, 교수님은 아마 오늘도 서재에서 남들은 재미없어 할 글씨를 쓰면서 “놀고” 계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하여 하기 싫은 일도 할 수 없이 하고 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 즐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좋은 직업이다. 여태명 교수님은 본인이 가장 잘하는 서예를 가르치는 교수님으로 계시면서, 가장 재미있어 하는 글씨를 쓰면서 돈을 벌고 계신다. 참으로 최고의 직업을 가진 분이시다.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민체는 표정이 살아 있는 글씨”이다. 즉 죽은 글씨가 아니라 살아 있는 글씨로서, 기업이나 상표의 명칭이 나타내려고 하는 뜻을 살려 생동감 있게 쓰는 글씨로 자연미가 넘치고 자유로운 서체라고 볼 수 있다. 궁체는 획이나 결구에 제약이 있어 쓰는 사람이 달라도 글씨가 비슷하나, 민체는 특별한 제약이 없기에 쓰는 사람에 따라 글씨도 달라진다. 즉 쓰는 사람의 개성이나 심미의식 등에 따라 글씨가 다르게 표현된다.
여태명교수가 민체 개념을 발표한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민체는 궁체, 판본체와 더불이 한글 전통서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대단한 분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공부를 한 것은 나에게 더없는 영광이며 첫 박사제자가 되는 은혜까지 받게 되어 그 기쁨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어느덧 여태명교수님을 만나 뵌 지도 1년이 흘러 임진년 새해가 밝아 오자 교수님께 새해 인사 전화를 올리고 단숨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새해에도 교수님께서 캘리그래피 세계에서 더욱 멋지게 활약하기를 바라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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