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의 죽음과 노벨상

【 신길우의 수필 224 】

2011-10-11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훌륭한 언행이나 업적으로만 위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일에서 남다른 생각과 행위로 살아온 것에서도 그렇고, 고난이나 위기를 도리어 발전의 기회와 계기로 삼는 것에서도 그렇다. 특히 좋은 일을 생각했을 때나, 보람찬 일을 하고자 할 때,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 참으로 훌륭한 일을 이루는 것을 보곤 한다.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의 경우도 그렇다.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10살 때인 1842년에 가족이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다. 타국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아버지한테 공학의 기초를 배워 16세에 화학자로 불렸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이 다른 외국생활에서, 그는 외국어 습득의 기회로 삼고 공부에 힘써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하게 되었다.

   나아가 노벨은 언어능력을 바탕으로, 18살 때인 1850년에 프랑스 파리로 가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장갑함을 만든 존 에릭슨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일했다. 어려움을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1855년 청년 기술자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노벨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공장이 1859년에 파산되었다. 이에 스웨덴으로 귀국한 노벨은 폭발성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드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1864년 공장이 폭발하여 막내 동생 에밀을 비롯하여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슬픔과 위기 속에서 노벨은 더욱 연구에 열중하여 '미치광이 과학자'로 낙인이 찍히고, 스웨덴 정부도 공장의 재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공장 대신 배 위에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였다.

   1867년에 마침내 다이너마이트와 필요한 뇌관(雷管)을 만들어냈다. 영국과 미국에서 특허권을 따낸 그는, 실험을 거듭하여 폭발성 젤라틴을 개발하여 1876년에 특허를 받았다. 최초의 무연화약(無煙火藥)이자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ballistite)를 만들고, 화약에 쓸 뇌관을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스웨덴과 독일과 영국에 공장을 차리고, 1886년에는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 다이너마이트 트러스트사>를 창설하였다. 노벨은 화약류의 전 세계 사용료와 러시아 바쿠 유전지대에 투자한 부동산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사망 당시 그의 사업체 수는 폭탄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90여개가 넘었다.

   하지만 노벨은 그 많은 사업으로 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만 했기에 결혼도 하지 못했다. 너무 바쁘게 사니까 항상 가능하면 한가롭게 지내려고 하였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자기가 발명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로 전쟁을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영시를 썼던 그는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화약을 발명하여 개발과 건설에 크게 기여했는데, 전쟁에까지 사용되는 것을 보고는 가슴아파하였다. 그래선지 자선사업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늘 인류의 복지를 위한 사업을 꿈꾸었다.

   노벨이 노벨상을 구상한 것은 55세 때인 1888년이었다. 형 루드비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잘못 안 프랑스의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商人) 알프레드 노벨”이란 제목으로 오보(誤報)를 한 데에 충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다이너마이트를 포함하여 355개의 특허를 가지고 거부가 된 그는, 죽음 앞에 돈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파괴와 전쟁에 주로 쓰여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억울해하면서, 노벨은 참된 평화를 바라는 뜻에서 63세 때인 1895년에 유서를 작성하였다. 자신의 많은 재산을 기금으로 하여, 그 이자로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5개 부문의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매년 분배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상이 잉태되었다.

   1896년 12월에 노벨이 갑자기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1900년에 노벨재단이 설립되고, 유산 900만불을 기금으로 한 이자로 1901년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제1회 노벨상은 5주기 일시인 1901년 12월 10일 4시 30분에 시상되었다.

그런데 첫 시상식에 시상자인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참석을 거절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상금이 외국인들에게 빠져 나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스웨덴 학계도 “국내 연구비도 없는 판에…” 라며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노벨상은 시초부터 가족과 조국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러나 노벨의 유언은 확실했다. 국적과 인종, 종교와 이념에 관계없이 인류 복지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노벨이 국적(國籍)를 따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스웨덴이라는 작은 한 나라 안의 잔치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고난은 누구나 겪으며, 위기는 때를 가리지 않고 온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해 내느냐가 문제이다. 노벨은 10살에 어려운 외국생활을 외국어 습득의 기회로 삼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프랑스 유학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웠다.

   32살에 공장 폭발로 동생 등 5명이 희생되는 아픔 속에서 정부가 공장도 못 짓게 하는 난관에 부딪치자, 배 위에서 ‘미친 과학자’ 소리를 들으면서 연구 실험하는 열정으로 3년 만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냈다. 위기를 극복해냈을 뿐만 아니라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그런 열정으로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잘못 보도한 보도를 접하고서 그는 크게 깨닫고 결심을 한다. 죽음은 반드시 오며, 쓰지 않는 재산은 모은 가치가 없다. 7년의 깊은 사색 끝에 63세의 나이로 노벨상 시상의 유언장을 작성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해(1896) 12월 10일 노벨은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했다. 자신의 죽음을 알기라도 한 듯, 미리 유언을 한 것이다. 1년만 늦었더라도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고,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상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일은 하여야 할 때가 있다. 특히 좋은 일은 언제나 너무 빠른 경우가 없다. 하고자 할 때 하지 않으면 오히려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노벨의 노벨상 유언은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한다. 노벨은 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서도 깊은 뜻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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