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문호 탐방기]불국의 성산-구화산 여행기
오래전 부터 구화산을 유람하고 싶었다, 황산과 백두산을 가 본 나로서는 무슨 산이 더 보고 싶겠냐 만은 구화산에 가려는 목적은 다르다. 구화산은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특히는 신라국의 왕자 김교각이 성도(成道)한 곳으로 그의 생평 사적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2008년 10월 3일 국경절 황금주 기간을 티서 나는 상해에서 T776 급행 열차를 타고 안휘성 지주시(池州市)로 향하였다. 새벽 6시 20분에 탄 열차는 일곱 시간을 거쳐 오후 1시 30분에 지주시에 도착하기 까지 혼자 좌석에 앉아 오는 마음은 지루했지만 열차를 타는것도 유람이라 생각하니 즐거웠다.
여행사 안내원의 인도하에 버스를 타고 40분, 구천 여행사 호텔에 숙소를 잡아 놓고 구화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입구 앞 주차장에는 수백대의 버스와 승용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정말로 장관이다. 입구로 들어가 구화산 전용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오른다. 깎아 지른듯한 절벽과 골짜기, 그리고 울울창창한 죽림과 솔나무들이 구화산의 기경을 이루었다. 차창밖을 내다 보면 버스아래 아아한 벼랑이 현운증을 일으키게 한다.
문뜩 당나라의 시선 이백이 구화산에 와서 지은 시가 련상된다. < 높기로 수천장, 위의 아홉 봉우리 연꽃 같네(高數千丈, 上有九峰如蓮花)>.
지질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2억년전 여기는 망망대해였다고 한다. 인도지나 지각 운동으로 인해 여기는 육지로 되였으며 그 후 몇차례의 조산 운동으로 인해 화강암들이 첩첩산봉을 이루었다 한다.
약 20분 거쳐 버스는 구화산 중턱의 분지에 도착했다. 여기는 1.5킬러 길이의 평지로 구화가(九花街)라 한다. 마침 어슴프레한 구름이 내려 덥혀 있는지라 미망하고 몽롱한 기분이다.그 속에 수 없이 늘어선 상가, 호텔, 인가들이 보이고 여행객들이 밀물처럼 밀려 다닌다. 둘레의 산 기슭에는 단청색 웅장한 사원들이 자리하여 있고 향연과 홍촉의 검은 연기가 구름속으로 피여 오르고 있다.기실 이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력사에 대한 고찰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안휘성, 하남성, 하북성, 강소성,절강성,상해 등지에서 천리를 길을 마다하고 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 보살에게 소망을 빌러 온 사람들이다.
내가 먼저 들어 간 곳은 분지의 남쪽 부용산(芙蓉山)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사(化城寺)이다. 화성사는 구화산 불교 력사 박물관이며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중점 문물보호 사찰로 지정되여 있다. 화성사는 령관전(靈官殿),천주전(天主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장경루(藏經樓)등 네개의 건물이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여 있다. 화성사에는 신라국의 왕자 김교각의 생평사적이 전시되여 있는데 바로 내가 가장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구화산에 오른 목적이다.
전시관 서문(序文)의 아래와 같은 내용을 나는 특별히 주목했다.
<중국의 불교 역사에서 외국의 승인이 보살로 된 사람은 김교각 한 사람뿐 이다. 중국 4대 불교 도장(道場)에서 진인(眞人)이 응화(應化)하여 천년의 향불을 향유한 사람도 다만 김교각 한 사람뿐 이다. 김교각은 중국 불교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이며, 일대 고승이며, 중국인 마음속의 지장(地藏)보살이며, 중국 불교 역사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김교각의 업적에 대한 평가이다.
김교각을 중국인이 경앙하여 김지장(金地藏)으로 공봉하는 원인은 무었인가? 이제 부터 나의 시간 여행은 시작 된다. 미망한 구름이 서린 구화산에서 천년을 더듬어 그 많은 비밀과 사연이 깃든, 아직 김교각의 행적이 묘연한 머나 먼 과거로 력사 여행을 떠난다.
그럼 먼저 지장 보살은 누구인가 부터 알아야 김교각을 알수 있다.
<지장>이란 산스크리어로 <크시티가르바>의 의미를 중어로 의역한 것이다. 그 뜻인 즉 <대지의 모태>란 말로 만물이 의지하고 성장하는 덕이 있다.석가 여래가 멸도(滅度)하신 뒤 미륵 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56억 7천만년 동안은 이른바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무불(無佛)>의 시대라 한다. 부처님은 멸도하면서 지장 보살에게 <6도(六道)>의 중생들을 맏기며 고해에서 해탈하게 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6도란 지옥, 굶어 죽은 귀신 아귀, 죄로인해 짐승으로 태여난 축생(畜生)을 일러 <삼악도(三惡道)>라 하며 수라(修羅), 인간, 천상을 3계라 한다.그러므로 지장 보살은 육도의 중생, 특히 지옥의 극심한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지닌 보살이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기원 696년 신라의 계림주 왕족의 가정에서 태여 났다. 그의 부친 이름은 김흥광으로 후날 성덕왕이며 모친은 성정황후이다.김교각은 어렷을 때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 했으며 청년시절은 장골 사나이고 키가 7척이며 팔힘이 백부를 당해냈다 한다. 여기서 팔힘에 대한 과장은 지옥의 대문을 열어 중생을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그는 청년시절에 세속을 염오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심자이모악, 영오천연(心慈而貌惡, 穎悟天然)>이라는 묘사가 있다. 김교각은 24세 되는해에 백견 <선청(善聽)>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물을 가르며 중국의 절강성 녕파 부근의 어주에 도착하였다. 어떤 학자는 중국의 남방에서 20년 있다가 안휘성의 지주시를 통해 구화산으로 왔다고 하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그때 당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왔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나라의 한 시인의 시에는 이런구절이 있다.<도도해수무변반,신라왕자범주래,불사백골리향원, 만리지심례오대(滔滔海水無邊畔, 新羅王子泛舟來, 不辭白骨離鄕遠, 萬里持心禮五臺>.이 시에서 신라왕자를 김교각으로 지목하고 있다. 김교각은 장안에서도 시인들을 사귀였으며 불교의 성지 산서성 오대산에서도 얼마간 머무른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20년을 다니다가 장안 부근에 성행한 각종 불교 파별의 모순을 벗어나 경제가 낙후한 강남으로 내려와 세상과 동떨어진 구화산에서 지장신앙의 기치를 꼽고 지장의 대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고군분투했으리라 생각된다.
739년, 김교각은 구화산 북쪽 산기슭 로전오촌에 도착하였다. 낯설고 물선 중국의 남방을 극도의 굶주림을 이겨내며 간난신고를 거쳐 찾아 온지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말이아니였으리라.구화산의 산주 민양(閔讓)은 초면에 김교각의 용모를 보고 범상치 않은 승려임을 발견하고 밥을 주고 자택에 유숙하게 하였다.후에는 가사를 지어주고 수련을 하게끔 공양하였다.후날 민공은 김교각에게 깊이 감동된지라 아들 도명을 제자로 받게하였으며 아들이 스님으로 된 후에는 법도에 따라 아들에게 절을 올렸다 한다.이는 불교적 예절이다. 민공의 묘지는 아직 구화산에 있다. 김지장의 성상 옆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김지장을 시위하여 있는데 오른 쪽에는 향신(鄕神)의 옷 차림을 한 민공이고 왼쪽에는 선장(禪杖)을 들고 있는 도명법사이다.김교각은 그 후 백리 떨어진 남령이란 고을에가 지장경서 네권을 베껴 온 후 산으로 올라가 구화산 동쪽 절벽의 석굴에서 수련을 하였다. 이 동굴에는 그가 수련하면서 남긴 발자국과 앉은 자리가 선명하게 아직 남아 있다.이렇게 장장세월을 그는 솔향을 호흡하며 죽림의 음운을 들으며 구름과 노을을 벗으로 삼아 고행을 했으리라.
757년, 산하의 장로 제갈절이라는 사람이 수명의 장로들을 거느리고 구화산에 등산하였다. 심심 협곡엔 수풀이 우거지고 아무리 둘러 보아도 적막무인이였다. 그러다 동아 절벽의 석굴에 오니 김교각이 홀홀 단신으로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릅 옆에는 쇠가마가 놓여 있었는데 안에는 몇알의 쌀과 관음토(觀音土)를 섞어 지은 먹고 남은 밥이 있을뿐 이였다.관음토는 구화산의 일종 백색의 토양으로 구화산에서는 관음토라 한다. 벌레와 모기에 물어 뜯기며 야수의 위협을 받으며 굶주림에 고생하며 그의 고행은 헌난했으리라. <지장십륜경>에는. <안인불동, 유여대지, 정려심밀, 유여밀장(安忍不動,猶如大地,靜慮心密, 猶如密藏)> 이런 구절이 있다. 김교각은 바로 그런 형상을 타고난 지장보살의 화신이다
여러 장로들은 이렇틋 고행하는 스님도 있느냐고 감동하였으며 이로 부터 경앙하게 되였다.그렇다.지금의 말로 말하면 인간 생명의 극한을 넘어 그는 수련을 하였다. 뭇 장로들은 산으로 내려가 토론을 거쳐 돈을 모아 땅을 사주며 인력을 동원하고 재물을 마련해 지금의 화성사 자리에 사묘를 지어 주었다. 구화산 지구의 불교는 기원 401년 부터 있었다. 김교각이가 구화산에 온 후로 점차 기존의 승려들은 김교각의 슬하에 들어와 지장보살의 불도를 수련하였던 것이다. 사당을 짓고 농전을 개척 함에 김교각은 친히 중도들을 거느리고 노동하였다. 개척한 농전이 수십무나 되였다. 화성사 정문 앞에는 반월형의 못이 있는데 바로 그때에 판 저수지다. 후에 방생지(放生池)라 이름을 달았으니 원인은 물고기를 먹으라고 가져다 주면 이 못에 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황도(黃稻)를 심었다 하였으니 신라국에서 들여 온 좁쌀이나 기장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채송(五釵松)란 솔나무도 신라의 품종인지 모른다.그때 신라국의 승려들도 구화산으로 들어와 김교각의 슬하에서 수련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차나무도 심었는데 학술적으로 견해가 분분하다.
구화산에서는 김교각을 구화산 차도(茶道)의 시조(始祖)라 한다. 력사적 기록의 시를 보면 구화산의 차는 김지장께서 동도의 신라국에서 가져 왔다, 혹은 서역에서 가져 왔다 한다.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에는 아직 원생차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라때 중국에서 가져간 것이라 한다.그리고 김지장이 서역에 간적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가져오고 간에 김지장이 구화산 차나무를 재배한것은 공인하는 사실이며 구화산 차도의 시조이라는 것도 공인하는 사실이다.
비록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둘수 있었으나 승도가 많아져서 양식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승려들은 종종 굶었으며 관음토를 캐여다 허기를 달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친은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왔다고 한다.전설에 불과하지 사실인지는 어떠한 문헌에도 고증할수 없다. 어머니는 3주야를 울어 눈이 멀어졌다.김교각은 효심이 지극하여 우물의 물을 떠다가 3년을 딱아주어 드디어 눈이 밝아졌다. 후날 사람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 <명안천(明眼泉)>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우물우에 탑을 세워 < 낭낭탑(娘娘塔)이라 명명하였다. 이 탑은 아직 있다.
781년 당지의 태수 장암(張岩)은 몹씨 김교각을 숭상하였다. 장암은 당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정황을 반영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교각의 수행에 감동되여 화성사 자리에 사원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원은 어느 병란에 소각되여 존재하지 않고 지금의 화성사는 명조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김제장의 부친 성덕왕이 재위한 후 성정왕후는 아들을 데려 오라하며 신라의 대신인 외삼촌 소우(昭佑)와 소보(昭普)를 구화산으로 보내였다. 김교각은 외삼촌을 만나 얼마나 반가웠을 것이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또 얼마나 간절했으랴.그러나 이미 굳게 다진 철석같은 마음을 외삼촌으로서는 다잡을수 없었다.결국 조카의 결심에 감복한 외삼촌도 구화산에 남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아마 김교각을 남겨 놓고 간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신라국에 김교각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갈 면목이 없어 가지 않은지도 모른다. 비록 외 삼촌은 구화산에 남아 수행한다고 하지만 김교각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계(五戒)>를 위반하며 경상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기에 하는 수 없이 하산 시켜 속세로 돌아가게 하였다. 두 외삼촌은 지금의 구화산 이성촌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후 당지 사람들은 이 두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성전(二聖殿)>을 지어 기념한다. 이성전 전당에는 관복을 입은 문관과 무사복을 입은 무관 성상이 있는데 바로 김교각의 외삼촌이다. 매년 음력 7월 30일은 김지장의 성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장법회>를 성대히 진행한다. 이튼날 8월1일에는 이성전에서 <이성회>를 진행한다. 제사상에는 술과 고기도 놓였다. 제사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한다.이는 대체로 한국의 제사와 비슷한 것으로 구화산에서는 특수한 종교 풍속이라 한다. 이때면 산상의 일부 중들도 슬그머니 찾아와 행사에 참가한메 핑게 대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간다고 한다.
794년 99세 되는해 김교각은 중도들을 불러 고별을 고하며 앉은 자세로 무병 원적(圓寂)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돌연 산이 진동하고 새들이 울고 화광이 치솟았다 한다. 김지장의 육신을 석관에 넣어 모셨는데 3년후에 열어보니 하나도 부식됨이 없이 얼굴이 태연하였으며 손가락 관절에서는 금고리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장왕이 응화(應化)된 육신이라 인정되어 삼층석탑을 지어 지금의 령광령(靈光嶺)에 모셔져 있다. 령광령이란 산 이름도 김지장왕을 모실때 산에서 령광이 비껴 나왔다하여 지은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야할 것은 구화산에서는 육신을 신봉하는 습관이 있다.소위 말하는 미이라는 기후가 건조한 사막이나 내륙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구화산에서는 남방의 습윤한 지구로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구화산에서는 이미 14구의(그중 하나는 녀승) 육신이 발견되였는데 의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육신 사리라 한다. 극 소수의 스님만이 이런 현상을 가진다. 스님이 죽으면 커다란 옹이에 모셔 놓는데 3년이 되어 부식하지 않으면 유약을 칠 하였다가 다시 3년이 되어 금박을 씌운다. 그러면 몇천년을 보관할수있다. 백세궁(百世宮)은 청나라때 126살에 세상 뜬 명정스님의 육신사리가 있는 곳이다. 약 1.2m 높이의 물독은 명정스님의 육신을 모셨던 독이다. 그 독은 이상하게 한국의 두껑이 있는 옹이와 비슷하다. 이런 양식의 독은 신라의 기술로 제작된것이 아니가 학자들이 연구할 바이다.
화성사와 백세궁을 구경하고 나니 벌서 오후 5시 반이다. 나는 하산하여 호텔에서 주숙하고 이튼날인 4일 7시 반에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구화산에 올랐다.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하지만 향불과 홍촉을 태우는 사람들은 사원마다 붐빈다.
오늘 내가 중점으로 볼 것은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령광령으로 오르려면 500계단의 층대를 올라야 한다. 층대는 세개의 전당으로 나뉘였는데 첫 전당은 여래 보살을 모신 전당, 두 번째는 대원 지장보살을 모신 전당, 정상에는 육신보전이다. 이 층대의 첫 입구에는 약 3ㅇm높은 대문이 있다. 대문에는 행원무진(行願無盡) 이란 금박 글이 가로 새겨져 있으며 기둥 마다에는 금박의 글들이 수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 <지옥미공,서불성불(地獄未空, 誓不成佛)>란 금박글이 있다. 김지장은 생전에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라 하였으며, <지옥미공, 서불지옥>한다고 호언을 하였다. 즉 지옥에서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결코 보살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종신 분투하였다.
첫 전당을 보고 나는 다시 층대를 오른다, 두번째 전당으로 오르는 층대는 장랑이기에 우산이 필요치 않았다.오르고 오르면 웅장하게 세워진 <지장선사(地藏禪寺)>이다.안에는 김지장의 성상과 양쪽에는 민량공과 도명법사가 시위하여 있다.
<지장선사>를 지나 계속 오르면 마지막으로 99개(김지장의 수명을 상징)의 층대가 60도 각으로 가파르게 나 있다. 해설원이 말하기를 가운데 연꽃을 밟고 오르면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요 왼쪽의 돈을 밝고 오르면 재운을 기원하는것이요 오른쪽의 무었을 밟고 오르면 관(官)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올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헐떡이며 단숨에 가운데의 연꽃, 평안을 밟고 올랐다. 숨이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것일까?
<육신보전>은 2층의 단청색 웅장한 대궐이다. 1층 정문 위에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호국월선보탑(護國月身寶塔)>란 편액이 걸려있다. 797년 최초의 건축은 김지장의 육신사리를 모신 3층의 석탑이였다.송나라 때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전(塔殿)>을 지었는데 바로 지금의 건축이다. 그후 청나라 때는 석탑에 7층 17m 의 목탑을 건축하여 씌웠다. 목탑의 내벽에는 적금로 쓴 <지장본원경>이 적혀있다. 석탑속에는 지금도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 앉아 있는 도금의 김지장육신 성상은 모조일 뿐이다. 산의 정상이라 하지만 <육신보전>앞 마당은 광장과 같이 넓었다 약 8m 높이의 청동탑이 4개 세워지고 량쪽에는 3층 4각형의 커다란 루각이 날듯이 허공에 추녀를 치켜들고 있다.촉대(燭臺)에서는 수백개의 홍촉이 타고있다.그리고 크고 작은 청동탑과 향로들이 장관을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향불을 붙여 들고 동서남북으로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는 전당에 들어가 김지장보살왕에게 절을하며 무었을 소원한다.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보살에게 중국의 민중은 이렇게 1천2백년을 기도하며 향불을 지폈으리라.
필자는 이전에 한국의 불국사나 암자들을 구경한적이 있다. 한국 사당의 특점은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 산기과 암자들의 호흡이 조화롭고 오붓해서 아늑한 감을 준다.그러나 구화산의 전당들은 산의 정기를 압도하여 위엄스런 감을 준다. 백세궁이나 육신보전은 산 마루에 웅장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억눌러 놓은 감을 준다. 필자는 왜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불교는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런것 같다. 한국에서도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원은 웅장하다. 예를 들어 익산 미륵사 유적지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사원은 산마루에 지은것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만 볼수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이에 연구를 해본적이 없기에 원인을 모른다. 하여간 구화산의 전당은 모두 장엄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압도한 인상을 남긴다.
산을 내려와 몇개의 사원을 더 보고 나서 나는 오후 3시 버스로 귀로에 올랐다. 몇일 어간에 1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으니 여행사에서도 기차표를 살수없어 부득불 버스를 타고 상해로 간다.버스에서 바라본 구화산은 장엄하고 수려했다.천 이백년의 력사에는 얼마나 많은 동란이 있었던가? 841~846년간에는 리염이 도교를 성행하고 불교를 탄압하는데서 구화산의 사원 10여개가 소각당하였다.송나라 때에는 불교 보호 정책하에 사원이 40여개로 늘었는데 12개는 조정에서 지은것이다.원나라 조정은 라마교를 숭상하였지만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보전되였다.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승려의 출신으로 불교를 지지하여 구화산의 사원은 100여개로 늘어 났고 그때로부터 산서의 오대산, 사천의 아미산, 절강의 보타산과 함께 중국 4대 불교 성지으로 되였다. 청나라 제왕은 라마교를 추앙하지만 한족 지구의 불교에 대하여도 중시하였다. 1853~1863년 구화산 주위에서 청군과 태평군간에 결전이 있었다. 태평군의 반불 행위로 인해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였다. 청나라 말기 까지 조정의 자금 조달과 특히는 상인,신도들의 헌납하에 사원들이 재건되였으며 사원과 암자가 150개에 도달하였고 승려는 무려 3~4천명였다. 신해혁명후 5.4운동때 <공가점을 타도하자>란 일부 급진 지식분자의 구호아래 불교도 탄압을 받았지만 구화산은 도시와 떨어진 편벽한 곳이라 큰 손실은 없었다. 국민당의 상층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며 장개석은 <낙선사>의 편액에 제사를 써주었다. 그런대로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150개였다 그후 일본군의 몇차례 소탕을 겪으면서 일부는 파괴 되였다.
신중국이 성립된 당시 구화산의 사묘는 90개였으며 승려 200명이 있었다고 한다.토지개혁할때는 승려들에게 땅도 분배해 주었다.노동과 수련을 결합하는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극좌 사조로 인해 사원과 암자, 문물들이 미증유의 훼손을 보았다. 승려들은 핍박에 못 이겨 환속하거나 멀리로 떠났으며 그때로 부터 천년의 향불은 꺼지고 말았다. 개혁개방 이 후 점차 종교신앙에 대한 정책이 낙실 되면서 다시 사원의 문이 열리고 향불을 지폇으며 사원들을 수건하고 재건하기 시작하였다.1998년 까지의 통계를 보면 1.5억원(그중 정부의 재정 조달은 98만 원이고 그 외는 민자와 헌금)의 자금이 투입되였다. 물론 1998년 후로 계속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규모가 형성되였다. 특히 한국정부와 한국 불교계의 자금을 조달한 구체 금액은 모르지만 적지않을 것으로 해설원의 말에서 추측된다.지금 구화산에는 78개의 사원과 암자가 있으며 400여명의 승려가 있다고 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오르며 운무에 잠겨 비가 내리는 구화산을 우르러 본다. 천 이백년 역사의 수난을 겪은, 또한 그 속에서 멸하지 않고 발양된 구화산 - 불국의 성산은 장엄하고 수려하다.경제발전의 급물살과 관광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락후했던 구화산의 주변에도 천지개벽의 발전상이 안겨 온다.도처에 굴삭기와 기중기가 작업하고 건축물이 일어선다. 커다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도 금방 운영에 투입되였다. 그것은 구화산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극부상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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