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을 구호한 여성 의인(義人)
― 제주기녀 출신 거상 김만덕[―신길우의 수필 219】
제주에서 살던 김만덕(金萬德)은 일찍 부모를 잃어서 12살 때에 기생이 되었다. 성년이 되자 목사에게 간청하여 양민으로 회복 받았다. 그녀는 객주 집을 차려 양반 부녀자들을 상대로 해서 돈을 벌고, 제주와 내지(內地)의 산물을 그 유통과 시기를 적절히 활용하여 거상(巨商)이 되었다. 남다른 자존(自尊)과 뛰어난 상술(商術)로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그 시기에 제주도는 흉년과 태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조정에서 보낸 구호미마저 파선되었다는 소식에, 만덕은 전 재산을 내어 쌀 500석을 사다가 구민(救民) 활동을 폈다. 굶주림으로 앓고 죽는 상황에서 평생 모은 돈을 흔쾌히 쓴 것이다. 만덕은 돈은 왜 버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김만덕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온다. 『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과 체제공(蔡濟恭)의『번암집(樊巖集)』, 유재건(劉在健)의『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김석익(金錫翼)의『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도 들어 있다.
김만덕은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여 친척집에서 살다가, 12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쩔 수 없어 나이 든 기생집에서 살게 되어 기생이 되었다. 성인이 되자, 자신이 본디 양민 자손이니 환원시켜 달라고 제주목사에게 청하여 회복 받았다. 남다른 자존(自尊) 의식이다.
그녀는 제주 건입포에 객주(客主) 집을 차렸다. 객주는 여관 겸 식당이면서 물품을 거래하는 중개상 역할을 하는 곳이다. 양반집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으로 짭짤한 장사를 했다. 제주와 내륙간의 상품과 유통, 물가 변동과 적절한 매매 시기 등이 파악되자, 제주도의 미역, 말총, 양태 등은 육지에 내다 팔고, 내지의 쌀과 소금 등을 사들여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기녀 시절의 경험과 제주 포구의 상거래 적지를 지혜롭게 활용한 것이다.
1790년부터 제주에 연이어 흉년과 태풍이 들어 수백 명이 굶어죽었다. 제주목사가 요청한 국가의 구호미마저 1795년 초에 수송선 5척이 침몰되어, 온 제주 도민이 큰 위기를 맞았다.
당시 57세이던 만덕은 큰 결심을 하였다. 그 동안 번 돈으로 내지에서 쌀 500석을 사다가 도민 구제에 나섰다. 50석은 일가친척들에게, 450석은 관아에 기부하여 사람들을 살리게 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증만덕(贈萬德)>이란 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정조 19년(1795년) 탐라에는 큰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만덕이 천금의 큰돈을 내놓아 육지에서 양곡을 사오게 하여 450석을 관청에 내놓았다. 오래 굶어서 살가죽이 들떠 누렇게 된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관청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관에서는 그들의 급하고 그렇지 않음을 참작하여 형편에 맞추어 쌀을 나눠주었다. 그 후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서 ‘우리들을 살려준 은인은 만덕’이라면서 그 은혜를 칭송하였다.”
당시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 장교(將校)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梁聖範)이 각각 100석을 기부한 것이 전부였다. 정조 임금은 “이들이 100석을 납부한 것은 육지의 1천 포(包)와 맞먹는다”고 치하하며, 고한록을 대정(大靜)현감에 이어 군수(郡守)로 임명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을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켰다. 덕만에게는 제주 목사를 시켜 그 소원을 들어주라 명하였다.
만덕은 “대전(大殿)에 들어가 성인[임금]의 모습을 우러러본 뒤,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두루 구경하고 싶습니다”고 대답했다. 당시에는, ‘관의 허락 없이 제주 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평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정조는 만덕을 내의원(內醫院)의 의녀반수(醫女班首) 직책을 제수하여 입궐하게 하였다. 500석 기부에 걸맞은 대단한 특별 조치였다.
만덕은 1795년 한양에 올라갔다. 정조는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발휘하여 천백여 명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리었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치하하였다. 채제공과 기녀 홍도가 찬양의 시를 지어주었다.
겨울을 보내고 1796년 봄에 만덕은 강원관찰사의 배려를 받으며 금강산을 구경하였다. 중전과 세자빈도 알현하고 상을 받았다. 형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은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따옥새 떠나갈 듯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라고 시를 짓고, 박제가(朴齊家) 등 사대부들도 그녀를 위한 시를 지어주었다. 이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었는데, 정약용(丁若鏞)은 발문(跋文)에 ‘삼기사희(三奇四稀)’라며 이렇게 적었다.
“기생이 과부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희사한 것,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한 것이 세 가지 기이한 일이요, 여자로서 겹눈동자를 가졌고, 종의 신분으로 역마를 타고 왕의 부름을 받고, 기생으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았으니 이것이 네 가지 드문 일이다.”
채제공은 당시 김만덕의 상황을 『번암집』에,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였으니 온 천하의 수많은 사내들 중에서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을까” “만덕의 이름이 한양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자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재채(李載采)의 「萬德傳」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서울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돈이 많은 과부라는 소문에 만덕에게 접근하자, “내 나이 쉰이 넘었다. 저들은 내 얼굴을 곱게 봐서가 아니라 내 재물이 탐나서 저런다. 굶주린 자를 구할 여유도 없는데 어느 겨를에 저런 탕자를 살찌우랴” 했다. 가히 만덕의 사람됨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채제공은 ‘積善之家 必有餘慶’을, 재주도에 유배 중 김정희(金正喜)도 ‘恩光衍世’라 써주었다.
제주목사 심낙수의 아들 심로숭이 1794년에 제주에 가서 4개월간 지낼 때 들었다며 기록한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생시절에 돈이 떨어진 남자의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았다. 육지 장사꾼 중 만덕 때문에 패가망신한 자가 많았다. 구걸하는 형제도 돌보지 않았다. 만덕은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심로숭이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에 대립한 노론 사람이었음은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는 돈을 벌 때에는 억척스러웠음을 말하는 것으로 만덕도 예외이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다. 만덕은 바로 그렇게 했다는 데에서 위대한 것이다.
김만덕의 묘소는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에 있는데 매년 <김만덕제>를 지낸다. 1976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제주시 건입동 387-4번지에 <김만덕기념관>을 건립하고, 해마다 사회봉사에 공헌한 제주도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女醫行首耽羅妓 萬里層溟不畏風
又向金剛山裡去 香名留在敎坊中
여의사 행수는 탐라의 기생인데
만리 높은 파도 바람도 겁내지 않네.
이제 또 금강산 구경길 떠나니
꽃다운 이름 교방(敎坊)에 드날리네. <吉雨 역>
기생 홍도(紅桃)도 시로 그녀를 예찬하였다.
김만덕은 재산을 모으고 돈을 번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베풀고 쓸 것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위대함은 그의 삶과 정신이 훌륭할 때 주어지는 덕목이다. 신분이 비천한 것은 욕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위대함을 더욱 높이고 빛나게 함을 일 뿐임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