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大革命 이후의 조선족 서예

빛을 보기 시작한 조선글 서예

2011-07-21     서영근


1) 서예교육
1976년 10월에 文化大革命이 종결되자 중국은 새로운 역사시기에 들어섰고 民族政策이 정상화되면서부터 朝鮮民族 교육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12월, 제11기 3차 全黨大會에서 鄧小平의 改革開放政策이 採擇됨에 따라 외국의 우수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少數民族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예술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게 되었다.

1978년 9월 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 등 東北三省의 교육국에서 制定 頒布한 全日制 10년제 학교 小學校朝鮮語文敎學要綱의 主要內容은 中學校朝鮮語文敎學要綱과 기본상 일치한데, 그 중에서 서예에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3) 글자, 습자교수: 習字교육은 소학교 각 학년에서 다 진행하여야 한다. 1학년에서는 교과서에 편입된 習字범례에 의하여 연습시키고 기타 학년에서는 習字帖에 의하여 연습 시킨다, 1,2,3학년에서는 鉛筆로 쓰고, 4,5학년에서는 鐵筆로 쓰며 楷書體에 국한 한다.

習字교육의 기본 내용은 1.바른 習字자세와 정확한 執筆방법 2.筆劃의 명칭과 쓰기 3.글자의 필순 장악과 간살조화에 대한 기능의 습득 4.楷書體에 대한 숙련 등이다.

위의 교학 요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書藝基礎敎育을 다시 중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 초등학교의 習字敎育은 붓글씨가 아닌 鉛筆이나 鐵筆 즉 硬筆글씨임을 알 수 있다. 硬筆 습자교육에서도 執筆法과 筆順, 글자 構成 등 書法을 重要視 하였다.
중국 朝鮮族 중소학교 교원의 내원은 건국 전후에 세워진 延邊大學, 中央民族學院, 延邊第1師範學校 외에 1976년 성립된 遼寧省朝鮮族師範學校, 1978년 成立된 黑龍江省 五常朝鮮族師範學校의 졸업생들이었다. 특히 1982년에 五常朝鮮族師範學校에 서예과목이 개설되어 한자 위주로 가르치다가 1987년부터 한글서예도 가르쳤다.

文化大革命 이전에도 서예교육을 중시하였던 延邊師範學校는 1982년에 延邊第1師範學校로 개칭되었으며 현재는 延邊大學 師範分院으로 개칭되었는데, 1987년 서예교육가 金正松의 노력으로 書藝科目이 신설되어 처음부터 한글서예를 위주로 가르쳤다. 이로서 延邊師範學校는 朝鮮民族 서예가 양성기지로 자리 잡았으며, 한글서예를 보급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는 延邊 서예교육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였으며, 선후하여 朝鮮族 한글서예의 일군들인 蔣龍, 李成浩, 徐永根 등을 배출하였다. 당시 사범학교에서는 朝鮮과 黑龍江朝鮮族出版社에서 공동 출판한 『조선글자쓰기』라는 책을 교재로 사용하였는바 朝鮮의 靑峰體를 가르쳤다. 교재의 한계가 있어 서예교원 金正松은 朝鮮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서체를 오려 두어 體本으로 사용하였다.

2) 書藝의 實用化
文革이 끝나고 經濟가 回復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文化藝術 창작이 정상화 되면서 서예는 발표공간의 제약으로 藝術性보다는 實用性을 먼저 갖게 된다.

鄧小平이 1977년에 복직되고 1981년에 國家軍事委員會 주석을 맡으면서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문호가 개방되어 외국의 발전된 문화예술이 흘러들게 되었다.

서예의 宗主國인 중국에 1981년에야 비로소 中國書法家協會가 창립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省, 市에 그 분회가 설립되었는데 延邊書法家協會는 1984年에야 설립되었다. 延邊書法家協會의 창시인은 延邊大學 교수로 재직 중이던 王文斌이라는 漢族 서예가였으며, 朝鮮族 서예가인 林蒼春과 南國山이 副會長으로 선출되었다.

1985년 7월 31일 吉林省 제6기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회 제14차 회의에서 비준한 延邊朝鮮族自治州 自治條例 제8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있다.

自治州 自治機關은 職務를 집행할 때 朝鮮語와 朝鮮文, 漢語와 漢文을 통용하되 朝鮮語와 朝鮮文을 위주로 한다.…自治州의 國家機關에서와 企業所, 事業單位에서 간부, 과학기술일군, 노동자에 대해 기술검정을 하거나 승급시키거나 기술칭호를 평정할 때 마땅히 朝鮮語와 朝鮮文, 漢語와 漢文을 使用하여야 한다. 각 民族 從業員들은 본 民族의 말과 글로 事業과 學習을 할 수 있다.…自治州내의 國家機關과 기업소, 事業單位의 公印, 간판은 일률로 朝鮮文과 漢文으로 되어야 한다.

위의 條例에서 주목할 것은 延邊 조선족 자치주 지역의 모든 간판은 조선글과 漢文을 병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市場性을 노린 朝鮮族 書藝家들이 대거 廣告美術社를 운영하면서 自身의 필체로 직접 간판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서예가는 吳明南, 吳基男, 朱永日, 具吉, 李哲, 徐永根 등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간판문화를 살펴보면 보통 銅版으로 立體感이 나게 한 글자씩 크게 제작하여 건물 벽이나 옥상에 설치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 글자의 크기가 1미터를 넘었고 글씨는 雄壯하면서도 華麗하게 표현되었다. 이로 인하여 서예는 예술창작에 앞서 實用化가 되었다.

다음은 영화포스타를 포함한 신문과 잡지의 표지 글씨, 텔레비전의 자막 글씨 등이 서예를 실용화한 예이다. 田靑松은 1981년전 까지는 영화계에서 근무하면서 영화포스터를 제작하였고, 그 후부터 延邊日報社 美術編輯으로 재직하면서 10여 년간 신문의 제목글씨와 각종 잡지의 제목글씨를 써왔다. 金浩根은 延邊文藝雜誌社에서 雜誌의 作品題目 글씨를 써오면서 丹泉體를 創作하게 되었고, 朴明俊은 1982년부터 東北朝鮮民族出版社 美術編輯으로 재직하면서 미술, 서예 교재를 편집하는 한편 출판사에서 출판되는 거의 모든 朝文版圖書의 제목글씨를 직접 써왔다. 太勳은 延邊人民出版社에서, 朱勳은 延邊群衆藝術館에서 글씨를 실용화하였고, 許日春은 延邊TV에서 廣告編輯을 맡아 廣告를 포함한 字幕글씨를 직접 써서 서예를 실용화하는 한편 서로 나름대로의 延邊 書風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간판 못지않게 碑石글씨를 書藝家의 필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유명 인사나 서예대가들의 글씨를 받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地方의 대표적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延邊에서 碑石글씨를 제일 많이 쓴 사람은 林蒼春인데 그는 주덕해기념비, 리욱시비 등 중요한 碑石글씨를 썼다. 龍井에서는 吳基男의 글씨가 碑石에 많이 새겨졌다.

글씨의 실용화는 여기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延邊第1師範學校에서는 학생들에게 전문 板書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각자 소형 칠판 하나씩 준비하여 매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서예교원들이 각 班級을 돌아다니면서 板書를 잘 했는가를 검사하고 성적에 반영하였다. 그리하여 사범학교 출신들은 거의 모두가 판서를 잘하였으며 중소학교 교원으로 配置되어 배운 재간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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