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봉사활동 하던 날

박수산 글

2011-05-17     박수산

[서울=동북아신문]며칠 전의 일이다. 퇴근해서 메일을 열어보니 중국동포한마음협회에서 2월 20일 오후 12시에 무료급식봉사활동을 한다고 메일이 왔다. 안 그래도 고국에 온지도 이제는 몇 년이 잘 되므로 그저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좀 베풀며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 망설이던 중이였다. 때마침 내게 메일이 왔으니 반가웠다.

나는 그날 무료급식봉사활동에 참가하려고 전철을 타고 대림역으로 갔다. 역에 도착하자 인솔자와 약속한 데로 대림역 9번 출구로 나갔다. 출구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인솔자의 소개로 회장님과 여러 회원과 인사를 하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인솔자가 중국동포한마음협회의 봉사단 단장임을 알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한 이십여 명이 모였다. 단장은 인원을 점검하더니 매 사람에게 봉사단쪼기를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입으라 하였다. 봉사단쪼기는 노란색으로 되었는데 뒤에는 한마음협회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봉사단쪼기를 입고 단장이 가리켜주는 데로 승용차에 올랐다.

우리가 탄 승용차는 영동포역 근처에 있는 성광교회의 앞마당에서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려 보니 성광교회 앞마당을 지나가는 길 건너편에 삼각형 모양의 자투리땅이 있었는데 앞 건물의 담과 사이를 좀 두고 한 십 평 되나마나한 작은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광교회 앞마당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손수레로 밥통과 반찬을 천막으로 나르고 있었다.

교회의 책임자는 우리 단장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우리 일행을 천막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나는 천막으로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그 작은 천막에는 배식받으려 온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런데 너무 조용히 앉아 있어 밖에서 보면 천막에 사람이 없는 줄로만 알았으니 말이다.

천막의 정면에는 간이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책상 우에는 큰 반찬 그릇 몇 개와 큰 밥통이 몇 개가 놓여 있었으며 바닥에는 국을 담은 큼직한 통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천막 안쪽에는 밥상들이 두 줄로 길게 양쪽으로 놓여 있었는데 그 밥상 앞뒤에는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의자가 대략 오십여 개가 있었는데 빈자리 하나도 없었다. 천박 오른쪽에는 밥과 반찬을 나르는 몇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천막 왼쪽 골목에는 몇 사람이 조용히 서서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책임자가 우리에게 배식하는 기본 절차를 간단히 가리켜주고 우리는 배식을 시작하였다 나는 실장갑을 손에 끼고 그 우에다 다시 얇은 비닐장갑을 끼였다. 나의 배식임무는 한 손으로 식판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 식판에다 배추김치만 먹을 만큼 찬 그릇에 놓은 다음 옆 사람에게 건네주면 된다. 아주 간단했다. 비록 해보지 않는 일이지만 몇 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생활하여 숱한 식판 밥을 먹어 보았기 때문에 신심이 있었다.

배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식판에 김치를 담아 옆 사람에게 건네주면 옆 사람은 식판을 받아서 다른 반찬을 담아 그 옆 사람에게 건네주고 그 옆 사람은 또… 이렇게 식판에 밥과 국을 담으면 또 몇 사람은 식판을 받아서 걸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가져다준다.

한참 이렇게 순환적으로 배식하다 나니 오십여 명에게 배식이 끝났다. 그러자 책임자가 좀 쉬라고 하였다. 나는 식사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입은 옷은 모두 깨끗한데 표정만은 웃음기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슬픔과 고민이 꽉 차있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양쪽 출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조용히 서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출구에 있는 사람들은 더러 움직이면서 식판을 날라주기도 하지만 왼쪽 출구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 못을 박은 듯 서 있었다. 마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초면에 중뿔나게 물어볼 수도 없고, 후에, 안일이지만 그들도 무료배식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다. 무료배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오십여 명이 아니라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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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식사하던 사람들이 식사를 끝내고 한두 개의 빈자리가 나오자 배식과정에서 혼잡을 피하고자 책임자는 빈자리 수만큼 식판에 찬과 밥을 담으라고 하였다. 빈자리가 나오는 수에 따라 식판에 반찬과 밥을 담아 건네주면 왼쪽에 아까부터 기다리면서 서 있던 사람들이 차래대로 정연하게 나와 식판을 받아서 빈자리를 찾아서 식사하는 것이다.

무료로 식사하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마치 물을 퍼내면 계속 나오는 옹달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벌써 배식 한지가 두 시간이 넘었지만, 아직도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식사하러 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마음은 더 슬프고 아프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지루해서가 아니다. 못살고 배고픈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와서 직접 보았으니 말이지 보지 못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고국에도 못사는 사람이 정말 많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면서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툭 쳤다. 쳐다보니 한 아저씨가 김치를 더 달라고 낮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미안해서 재빨리 김치를 담아 드리면서 “많이 드세요.” 하자 그분은 빙그레 웃으며 자기가 앉았든 밥상으로 갔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온다. 나는 정신없이 식판을 가져다 김치를 담는데 갑자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반찬도 많이 담아 주고 밥도 많이 담아 줘요.”

처음으로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이는 한 삼십 대 초반 여성인데 약간 정신적 지체가 있는 것 같다. 좀 지나 그 녀는 식판을 받아들고 빈 의자를 찾아 털썩 주저앉아 숟가락이 삽이 돼서 밥을 푹푹 퍼서 입에 넣고는 다 씹기도 않고 꿀꺽꿀꺽 넘기는 것이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렇게 먹을까? 측은했다.

또 시간이 흘러갔다.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천막 밖에서는 사용한 식판을 다시 씻어 가져온다, 밥통을 날라 온다, 반찬을 날라 온다, 하며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할아버지, 저 의자에 앉아계셔요. 제가 밥을 가져다 드릴게요.”
우리를 책임진 사람의 말이다.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셨다.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었으며 허리는 구십 도로 굽으셨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간신히 들어오고 있었다. 책임자는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빈 의자에 앉히고. 밥과 찬을 곱배기로 담게하고 친히 그 식판을 할아버지한테로 가져다 드렸다.

이제는 배식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반이 넘었는데도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가져온 김치를 다 나누어주고 모자라 벌써 네 번째 김치통의 뚜껑을 열었다.

아까 그 할아버지도 식사를 다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려한다,
“할아버지, 식판은 저 회가 가져다 놀게요 천천히 일어서세요.”
할아버지는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까 오실 때는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는데, 아마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 가는 모양이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얼마나 힘드시면 또 싸가야 하는지,

시간이 많이 지났어야 식사하러 오는 사람이 아까보다 뜸했다. 시간도 있고 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무료로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루에 작아서 육칠백 명이 되고 많을 때는 천명도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많이 온다고 한다. 나는 다른 것을 더 물어보고 싶지만 나 자신도 봉사활동에 처음 참가하는 주제라 부끄러워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배식이 끝났다. 우리는 혹시 또 오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서 대여섯 개의 식판에다 밥과 찬을 떠놓고 가재도구를 정리하였다.

끼었던 장갑을 벗었다. 이때 오른손 중지에 김치 물이 빨갛게 배여 있었다. 그제야 나는 손가락이 아리고 시린 것을 알았다. 얇은 비닐장갑이 째져서 차가운 김치 물이 손가락에 푹 베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 교회책임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행주를 가져 주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원래 처음 온 사람에게는 비닐장갑을 두 개씩 아니면 세 개씩 겹쳐서 끼야 된다고 가리켜줘야 했는데 자기가 못 알아보아서 미안하고 한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말이 우정 나를 빗대고 한 말은 아니 지만 내 스스로 가책을 느껴 책임자에게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어찌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고국이라고 찾아와서 나 자신만 잘살자고 앞만 보고 뛰다 나니 이렇게 힘들게 사는 분들이 많고 많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힘들 땐 내 고국, 내 핏줄, 내 형제,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하니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진정으로 고국을 사랑한다면 이 땅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진대,
하물며 많고 많은 우리 형제들이 지금 어려움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저 이방인처럼 모르는 체 하며 내버려두면서 이 땅이 내 고국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나온 날들을 가슴 뜨겁게 반성하고 새 출발을 마음속으로 다지면서 회원님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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