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韓'10대 오해

이동훈 글

2011-05-08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여러 달 전 한국의 신문에 "한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10대 오해"란 제목의 칼럼을 쓰고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  순전히 한국 독자들을 위한 글이었는데 그걸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서울 특파원이 번역해 실을 줄 몰랐고, 별다른 내용이 아니었는데도 중국 독자들은 완전히 흥분했다.  서툰 간체자를 더듬더듬 읽어 보니 그 이유는 "다 사실이잖아."라는 것이었고, 비난 일색의 댓글이 삽시간에 수 천 건 올라왔다.  몇 줄 건너 한 번 씩 꼭 들어가는 말은 '가오리빵즈'(高麗棒子)였다.  그 일로 건진 유일한 소득이 있었다면 "역시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가 맞다."는 사실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지금 다시 조선족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10가지 오해에 관하여 쓰려니 문득 그 일이 생각난다.  글을 올릴 때 받는 비난의 수위는 사실 상 쓰기 전에 먹은 그 필자의 각오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독한 글은 독한 비난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비난조차도 받지 못하는 글이란 대체로 쓸 가치조차 없는 주제들이다.  오늘도 '오해'라는 민감성 단어가 들어간 이상 비판과 비난의 경계를 넘나들 준비를 안 할 수 없다.  그래도 한 민족이니 좀 나을 거겠지만.

지난 3년 여 간 중국에 사는 동안 우리 동포사회에 자주 접하면서 마주쳤던 오해와 몰이해에 대해 10가지를 꼽아 봤다.  아래 설명 중 오해이면서도 대체로 사실이기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을 줄이기 위해 오해의 부분만을 집중 설명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란다. 

1. 선(鮮)과 한(韓)은 다르다?

어떤 교포 친구분이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하고, 북조선에서도 '조선'이라 하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는 '한'(韓)이라는 말을 따로 써서 이질감을 조성하는가?"
동족 내부의 민족 명칭이나 국가 명칭이 완전히 같으면 더 좋겠으나, 이는 역사성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선'과 '한'은 같은 말이다.  우리는 불과 1백년 전만 해도 민족 통합체 국가인 근대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에서 함께 살았던 민족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일본의 침략이다.  만약 일본이 수 십 만 권에 달하는 우리의 역사서를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한'과 '선'이 같은 말임을 금세 알 것이다. 
결국 '선'은 고대의 조선, 즉 '고조선'(古朝鮮)에서 유래했고, '한'은 고조선을 구성하던 '삼한'(三韓)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통합 국가 명칭이 '선'이었다면, 민족 명칭과 개별 국가 명칭은 '한'(韓族/韓國)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다 불태우지 못하고 남게 된 희귀한 몇 권의 책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고대 한국어에서는 '슌'(shun)과 훈(hun), 션(shen)과 한(han) 등이 서로 교환되는 음가를 가지고 있어서 'ㅅ'과 'ㅎ'은 그 중간 형태의 발음인 'hs'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흉노'와 '슝누'는 같은 뜻이며, 아직도 경상도 사람들은 '형'(兄)을 '성'이라 부른다.  명칭에서부터 시작되는 오해나 괴리감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 한국인들은 잘 난 체를 한다?

한국인들은 특히 중국을 방문해서나 중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국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타국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언행은 무례한 행동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그렇게 보여지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자녀들을 키울 때 개성이란 걸 무척 강조한다.  남들과 달라야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이유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글쎄, 이렇게 말하면 좀 가혹하지만, 무모한 가치관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비판과 폄하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비판해야 할 때 비난을 하는 이들도 종종 본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조선족 동포분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 한국인이 중국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할 때, 그것을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흔히들 그것을 자격지심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인과 중국인들 사이에는 비판의 정도와 비판의 대상 면에서 차이가 크다.  이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뭐 저렇게 사소한 걸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비판하는가?"라거나 "아니,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라고 느낄 때, 잘 난 체를 한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특히 70,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인들은 조국을 비판한 댓가로 피를 흘린 세대들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수용하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옳다.  "그렇게 중국이 싫으시다면, 오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말이다. 

3. 한국 언론매체들은 중국을 무시한다?

사실 중국에 대한 폄하의 시선을 가장 따갑게 한 몸에 받는 건 한국 언론들이다.  매일같이 비판적인 외신 뉴스들이 넘쳐난다.  미국이나 일본 매체들에 비해서도 그 수위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위와 배경이 비슷한 현상이다.
여기서 한국 언론매체들에 대한 약간의 이해 수정이 필요하다.  한국 매체들은 전부가 민간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상업매체들이란 점에서 보면 놀라울(불필요할) 정도로 공익성을 내세운다.  미국 매체들이 상업성과 정의를 앞세우고, 일본 매체들이 다소 국수주의적이면서 사실 위주 보도를 중시한다면, 한국 매체들은 공익과 인권을 앞세워 권력을 비판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 이유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으나, 이 특성이 중국인들이나 교포 분들에게는 여전히 낯설다.
한 교포 친구는 처음 한국에 나갔을 때, 한국사회가 곧 무너질 것같은 위기감과 함께 매일처럼 일어나는 사건사고 소식에 불안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사회부 기자들은 인명 사고에 대해서는 한 줄이라도 기사를 남겨야 하며, 24시간 경찰서를 감시하도록 철저히 훈련받고 있다.  그런 습관은 그대로 중국 현지 특파원들에게도 남아 있다.  이 역시 절대권력과 싸우며 길러 온 오랜 미디어 습성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한국 뉴스들을 접할 때는 그 뉴스가 한국에 의해, 한국을 향해 전달하는 메시지라는 점을 전제하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4. 한국 미디어들, 양국의 갈등의 주범?

결과적으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한국 정부의 이념이나 정책과는 전혀 무관한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대체로 그 나라 매체들이 그 나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키는대로 하는' 집단은 아니다. 
간혹 중국의 경우 외교부 대변인보다 인민일보나 환구시보의 논평이 중요한 외교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언론 체제의 종속성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과 그 사회와의 관계의 문제이자 곧 언론의 이념 문제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같은 사안을 두고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필치가 반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회주의 언론이 사회 전체의 공통 이익을 대변한다면 자본주의 언론은 철저히 자기 독자들의 입맛에 따라 간다.  그래서 아버지는 조선일보를 읽지만 아들은 한겨레를 읽고, 서로 바꾸어 보다 보면 인내력을 잃고 만다.  다원주의 사회의 특수성이다.
지금 동포 사회에서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황해' 역시 이와 유사한 문제다.  그 스토리가 개연성이 있건 실화에 바탕을 두었건, 중요치가 않다.  한국의 영화는 실물감, 긴장감을 미끼로 흥행을 노리는 상업적 산품이다.  이 영화는 그 표현이 너무 잔인하고도 너무나 현실처럼 포장해서 더 문제이지, 그 소재나 플롯(Plot)의 선택에 있어서 별다른 고의성이 없고, 별 문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시나리오 작가의 자유일 뿐이다.  누가 감히 그 작가에게 어떤 목적으로든 영화 '황해'에 사회적 이념(편견)을 담도록 강요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오로지 재미있게 하기 위해 주인공들의 성격과 행위를 살벌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순진하게 떨고 있는 것 뿐이다.
앞의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영화는 어떤 사회적 문제에 개입할 아무런 의도도, 조짐도 보이지 않는 순수 유희물일 뿐이다.  언론이든 상업 창작물이든, 그것은 단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기회요인이자, 심심함을 달래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재미만 있고 사실에 근거한다면 최고 권력자라도 미디어의 간단한 희생물이 되고 만다는 이치를 이해해야 한다.
한 예를 들어서 과거 '친구'와 같은 영화가 나왔을 때 어떤 부산 시민도 부산의 이미지를 나쁘게 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 영화에서는 당시로서는 '황해'와 비할 수 없는 잔인한 살인과 욕설, 배신이 난무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그 영화의 대사들이 너무 유행했고, 부산 남자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까지 했었다.  영화는 영화다.

5. 작은 나라 사람들이 '大'한민국이라 하네?

이 대목에서는 정말 할 말이 궁하다.  세상의 어느 나라도 국호 앞에다가 그 규모(추상적인 규모)를 내세우지 않는데도 유독 조그만 나라가 그런 '大'담한 짓을 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다.
혹자에게 물었더니 "아주 예전에는 큰 나라여서..."라고 대답했다.  그럴 법도 하다.  얼마나 오래 전인가 하니, 족히 1천 년이 넘었다.  이건 답이 될 수가 없고, 설령 맞다 해도 심각한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닌가? 
이 부분에서는 좀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앞으로 한국이 과거의 넓은 영토를 실지 회복한다거나 공간적으로 대국을 만들 개연성이 크지 않다고 보는 나로서는 다르게 해석해 본다.  한국인들의 대국은 그들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없진 않겠으나 현실에 그 답이 없다. 
한국의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크게' 그리고 '강하게'를 강조한다.  지금은 달라졌으나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이겨라'와 '깡으로'를 심어준다.  그래서 안 되면 때려서라도 이기도록 강압한다.  많이도 맞고 자란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크기는 이들 자존심의 크기이지 나라의 공간적 넓이가 아니다.  나라가 작아질수록 자존심 내부의 나라 크기는 커지는 셈일까.  그래서 일본이 통치하던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 한 유럽인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양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겉으로만 볼 때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말이다.  식민지 사람들이라기엔 너무 활개를 치고 다녔다는 말이다. 

6. 한국인들은 너무 이기적?

대체로 그렇다는 점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 이기심의 실체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한 예로 중국의 거리에서 길을 물어보거나 누구에게 부탁을 해 보았을 때 중국인들은 대단히 친절하고 상세한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 한다.  한 번은 아예 가던 길을 돌아서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걸 보고는 놀라웠다.  서울에서는 어떨까?  그 반대다.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길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통엔 화가 날 정도다. 
자, 이렇게 상황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길 가던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손님이라고 가정하고 길을 가르쳐 줄 때의 두 나라 사람들을 비교해 보자.  역시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중국인들은 주소를 불러주거나 어디어디 근처에서 물어 보면 내 사무실 건물 다 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이-메일로 약도를 보내주고 전화로 설명을 한다.  이것은 여러가지 차이에서 기인한다.  주소의 행정체계 면에서 중국이 계획적 구조를 가진 점, 길에서는 한국에서 길을 물어 찾기 어려운 점 등이 차이다.  물론 더 중요한 차이는 마음속에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개개인이 찾고 해결하고 성취하도록 훈련받는다.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7. 멀쩡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망나니?

오해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점점 답이 궁해진다. 
우선 나는 중국에서 술에 취해 길에서 비틀거리거나 주정을 부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꼿꼿한 자세로 마시고 말도 선을 지키는 점이 좋아 보였다.  한국인들은 술을 마시면 그 날로 세상을 끝낼 것처럼 흥분하거나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노래든 술이든 끝장을 봐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는 달랐다는 한국인 이야기들을 제삼자로부터 들으면서 내가 아는 그 사람과의 거리를 느끼는 적이 있다.
다행하게도 여기에는 술버릇 이상의 사회학적 의미가 있다.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술을 하나의 생활문화로 이해하고 술자리를 교제의 기회로만 인식하는 듯하다.  한국에서는 사회 초년생이나, 손님 자리에서만 그런 경향이 있고, 나머지는 아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인간적 고뇌를 푸는 유일한 통로가 술이 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렇게 비우지 않으면 당장 특수한 병원에 자신을 맡겨야 할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어떤 한국인들에게 술은 삶의 촉매가 아니라 적(敵)에 다름 아니다.  번번이 맞고 쓰러지면서도 다시 맞서 싸워야 하는 적, 그래서 폭탄주까지 나온다.  그 쓰러짐으로부터 다시 무거운 짐을 벗고 일터로 향할 때는 좀 나른하고 멍멍한 기분을 느끼면서 어제의 아픔과 치열한 전쟁의지를 잊어가는 습관, 한국인들은 너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 적응하면서 그런 습관에 오래 길들여져 왔다.  

8. 하나같이 성격들이 까다롭다?

어김없는 사실이다.  귀한 손님이랍시고 한 상 가득 차려 주면 소식(小食)하는 건 고사하고 불평까지 나오는 판에 동포분들은 짜증이 난다.
어디 관광지를 가려는 데도 어떻다 저떻다 한다.  철저한 자기만족의 원칙에 충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라 그렇다.  그것이 한국사회안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외국 여행을 가게 되면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더 먼 사이가 되어 돌아오기가 일쑤다.  상황에 따라서는 포기할 만도 한 취향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사회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군체(群體)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남게 된다.  이 점은 동포들의 이해를 구할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인들도 깨달아야 할 문제다.  중국에 오면 기름기있는 요리도 새 경험이라 치고 잘 먹고 기왕이면 "맛있다."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나 역시 극단적인 저지방(?) 소식주의자라 번번이 결례를 범한다. 

9. 생각들이 너무 복잡해? 

나 역시 주변에서 많이 듣는 소리다.  동포 친구들과 무슨 간단한 일을 의논하다가도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대화 중에 "귀신이 있다, 없다."라는 주제가 올라온 적이 있다.  모든 동포 친구들은 단호하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작 질문을 받으면 이리저리 돌리다가 겨우 이렇게 대답한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대뜸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한다.  
여기서도 한 가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학교교육 과정에서 무언가 분명하게 한 가지를 가르치지만 한국에서는 그것을 금물(금기)로 여기고 있다.  "확실히 없다."가 아니고 "나는 없다고 믿는다." 정도로는 대답할 수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 스타일에서도 두 나라 간에는 차이가 크다.  중국인들은 먼저 행동하면서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은 결론이 나지 않으면 안 움직인다.  단, 결론이 나면 무섭게 달려간다.  두 나라 사람들 다 성격이 급해서 골인 지점에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하겠으나, 함께 가야 할 코스라면 서로가 답답할 것이다.

10. 동포들을 무시한다? 또는 구별한다?

타인이나 타 집단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이다.  만약 그것이 동족 안에서 일어난다면 반드시 무지의 소치다.  이 문제에서는 해명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만일 첫 대면부터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교양도 생각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면 된다.  그런데 한참 대화를 하던 중에 무시하는 인상을 받는다면 간혹 생각해 보아야 할 경우가 있다.  한국인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과 이질감을 보이는 타인에 대해 매우 냉정하다.  물론 이것은 '똘레랑스'(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가 부족한 결함이긴 하다.  가령 중국과 한국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실에 관해 토론하다가 동포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보통 한국인들은 대단히 흥분하고 만다.  국적과 민족을 하나라고 굳게 믿어 온 한국인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무조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고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한국인들의 큰 특성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사고의 차이가 느껴지는 동포분에 대해 이질감을 표시하는 한국인들이 많으리라 보며, 그것이 오해를 낳는 경우도 많을 것으로 본다.  어쩌면 한반도의 남과 북, 그리고 중국, 러시아에 나뉘어져 살아 온 민족의 비애이자 미련이 불러온 애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든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번에 적었던 "한국 남자 바람둥이"라거나 "한국인들은 다 가난해" , 그리고 "영어를 잘 못해" 등의 오해는 제외했다.  서로 오래 떨어져 살아 온 동족들이라 생겨난 오해들을 하나 씩 씻어나가지 않으면 오해에 먼지가 쌓이고 때가 되어 함께 추해지는 법이다.  다 쓰고 나니 뭐든 다 잘 했다는 변명처럼 들려 덜 좋지만, 한 가지나마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조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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