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大革命時期의 중국 조선족 書藝

서영근의 서예야 놀자

2011-05-01     서영근

1) 文化藝術의 受難

1966년 5월에 일어나 1976년 10월에 종결된 文化大革命은 10년 동안 경제는 물론 문화예술은 수 십 년 退步되었다. 특히 朝鮮民族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打倒의 대상이 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 또한 朝鮮語無用論과 민족주의 타도에 의하여 민족교육이 危機를 겪었다. 즉 이 시기는 民族文化가 유린당한 긴 시기였으며 혁명과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朝鮮民族의 수난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특히 지식인과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일종 예술법칙을 홀시하는 左派 경향이 줄곧 사회주의 藝術體系가 진일보 발전하는 일을 교란하던 것이 文化大革命가운데서 더욱 팽창되어 반혁명무리의 邦派文藝와 결합됨으로서 서예는 재난을 입게 되었다.

어느 한차례의 혁명이건 낡은 제도와 사회를 부수는 동시에 역사의식의 형태로서의 예술에도 반드시 그 화가 미치게 되는 것이다. 文化大革命에 의하여 훼멸당한 예술의 손상은 역사상의 그 어느 혁명보다 못지않다. ‘일체는 모조리 철저히 짓부수자’는 구호 소리와 함께 예술은 요행을 면치 못하고 오히려 그 첫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文化大革命기간에 건국 후 17년의 문예계는 이른바 '검은 손의 독재’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일체 예술활동과 예술창작은 모두 封建主義, 資本主義, 修正主義의 산물로 간주되어 예술작품들은 하루사이에 파괴를 당하고 말았다.

1966년 藝術大學의 학생모집이 정지당하였고, 일체 교육활동은 모두 정지되고 말았다. 중국 朝鮮民族의 老一代 藝術敎育家들이 간난신고로 개설하였던 예술학교의 설비 일체도 비참하게 파괴당하고 말았다. 아직 체계를 이루지 못한 중국 朝鮮民族 現代藝術敎育은 그때 재난 속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文化大革命가운데서 사람의 가치를 낮잡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건이었다. 예술가는 대다수가 雜鬼神으로 불렸고 그들의 머리위에 三明三高, ‘이름을 날리고 학파를 이룬다’는 누명을 아무나 씌울 수 있었고 욕할 수 있었다. 朝鮮民族에게는 터무니없는 修正主義, 爆亂分子라는 罪名을 들씌우고 크고 작은 문화예술계의 민족간부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으며 朝鮮民族의 문화예술은 전례 없던 도탄 속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서예가라고 하여도 서예작품을 창작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타도XXX’와 같은 혁명구호와 大字報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大槪가 筆法 등을 무시한 낙서에 불과하였고, 대부분 한자로 씌어 진 글이었다. 그야말로 文化大革命 時期는 民族文化藝術의 침체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時期에 血氣旺盛한 20대의 靑年들이 홍위병에 가입하여 무고한 민족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홍위병은 버스든 기차든 간에 무임승차하여 自己가 가고 싶은 곳까지 갈 수 있었으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면 아무나 打倒할 수 있는 無所不二의 힘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잘사는 사람이나 지식인들이나 예술인들은 그 표적이 되었으며, 외국과의 문호는 차단되어 한국은 물론 北韓 등 외국에 친인척이 있거나 편지 등의 왕래사실이 있었던 사람은 여지없이 타도의 대상이었다. 하루에도 수 십 명이 죽어나가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여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외국 서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秦始皇 시절에나 있었던 焚書坑儒가 文化大革命시절에도 있었다. 외국서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은 타도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紅衛兵들이 닥쳐들기 전에 아끼던 책들을 스스로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珍貴한 자료들이 잿더미로 변하였다. 北韓의 인쇄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여 그동안의 北韓書藝 관련자료들은 모두 분실되었으며 그동안의 서예연구는 資料不足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10년 동란시기 많은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이 修正主義分子라는 억울한 죄명을 썼기에 그들의 글과 작품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조선 古典作品으로부터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民族主義, 修正主義的인 것으로 분류되어 비판,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식자교과서 내용만 보더라도 毛主席萬歲, 中國共産黨萬歲로부터 자모음과 받침이 뒤섞인 통 글자 교육으로, 내용은 毛澤東語錄, 大批判文章 등 표어와 구호 등이었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정치적, 혁명적인 구호만 가르쳤으니 습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학생들이 서예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어느 정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대신 大字報를 쓰게 하고, 大批判專門欄과 黑板報를 꾸리게 하였는데 이런 활동을 통하여 政治에는 介入되게 하였으나 습자 활동의 한가지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宣傳欄, 黑板報 등은 10년 동란이 끝난 이후에도 각종 宣傳道具로 사용되어 왔다. 대개는 회사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맡아 꾸렸다. 특히 많은 학교들에서는 지금도 宣傳欄을 꾸리고 있다.

2) 文革時期 書藝의 特徵

文化大革命(이하 文革)시기에는 藝術活動은 불가능하였다. 藝術家와 知識人은 打倒의 표적이 되었으므로 감히 서예작품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중요한 서예자료들은 불태워버려 현재 찾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또한 교육은 뒷전이어서 체계적인 서예교육은 있을 리가 없었다.
大字報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예술적이거나 전통적인 면과는 거리가 먼 낙서에 가까운 글들이어서 書藝資料的인 가치는 없다. 文革 중 일부 사람들은 大字報를 쓰는 틈을 타서 붓을 만지고 필법을 익혔으며 훗날 朝鮮民族 서예계를 주도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기에는 北韓의 千里馬時代와 마찬가지로 革命英雄을 主題로 한 영화가 성행하였는데 그 덕에 영화 포스터 제작이 인기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田靑松이 젊은 나이에 많은 포스터를 그리면서 멋진 활약을 하였다. 포스터에는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목글씨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田靑松은 이때 벌써 漢字를 잘 썼는데 한글도 제법 잘 써서 훗날 池升元의 뒤를 이어 延邊日報社에서 미술편집으로 재직하면서 邊書體를 形成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池升元은 延邊日報社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일을 하면서 文革 이후 한글 서예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書風은 1950년대의 서예에 비하여 筆劃에 무거움을 강화하고 박력을 더하여 힘 있는데 이는 항일전쟁시기에 형성된 강인한 민족성의 영향을 받은 원인 때문이다. 결구에서는 宮體의 단정하고 고르며 균제 된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소위 延邊書體의 양상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毛澤東은 草書作品을 많이 남겼는데, 林蒼春은 그 영향을 받아 文革 以後의 延邊書藝界를 주도하게 된다.

建國 이후의 사회변동에 이은 文革을 거치는 동안 朝鮮民族의 문화예술은 여지없이 짓밟혔으며 문화예술인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항일전쟁을 겪으면서 강인한 민족성을 형성하였던 朝鮮民族은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하듯이 풀씨와도 같이 그 어떤 환경에서도 움트고 살아남을 수 있는 柔軟한 민족성이 산생되었다. 이러한 민족성은 文革 이후의 書風 형성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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