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남 여행르포 1] 나의 미국 방문기

2011-04-26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나는 딸의 초청으로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딸은 전화로 미국에 오면 영어를 모르니 다니기도 불편하므로 두 분이 심심하지 않게 운동복과 운동화를 가져 와서 신체단련이나 많이 하라고 했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딸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후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우리의 영어 가이드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왕 미국으로 가는데 딸이 쪽 팔리지 않게 하려고 우리부부는 백화점에서 '나이키', '푸마'등 유명 브랜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내복까지도 명품으로 사 입었고, 푸마커플운동복과 운동화를 샀다. 나는 중국에서 한국과 러시아를 몇 십번씩 드나들었지만 이번처럼 들떠서 옷차림에 신경 써보기는 처음이었다.

일단 보름 후에 떠날 예산으로 큰 여행사에 왕복 항공권을 예약하니 인천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까지 대한한공 편은 왕복 티켓이 220만원이라 두 사람이면 440만원이다. 아이구! 우리는 옷 좀 사고 용돈을 좀 가져가고 하려니 한화 1000만원이 깨지게 되었다. 이에 아내는 나 혼자 가란다. 딸은 보고 싶지만 일짜리 뺏기고 2-3개월 벌지 못 하고 현금이 1천만 원이 깨지니 말이다.

사실 나와 딸애가 몇 달 전부터 작전하여 저의 엄마를 일 못하게 하려면 미국 초청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미국에 몇 달 있노라면 일자리도 빼앗기고 돌아오면 나이도 많으니 일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딸애가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미국 유나이티트 항공권이 대한항공보다 절반 가까이 싸기에 우리는 갈 때는 직항이고 올 때는 일본 나리따 공항에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조건으로 일인당120만원 구매하여 2010년 12월8일 오후 18.35분에 떠나서, 당지시간 2010년 12월 8일 오전11.25분(7시간시각차)에 도착하여 장장 12시간을 타고 미국 서부의 유명한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공항 출입국 검색대를 지나는데 내가 앞에서고 아내가 뒤에 서서 나를 검사하더니 흑인 청년 검사원이 바로 아내를 불러서 먼저 손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 하여 바삐 딸애가 쓴 초청장을 보여주었다. 초청장에는 “나는 어디 학생인데 부모님을 초청하여 미국 구경을 어느 어느 곳에 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 청년은 그 초청장을 보더니만 “오 스탠퍼드, 스탠퍼드!”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웃으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마냥 속으로 “쓸 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도장을 찍어 내보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을 뿐이었다. 밖에 나와서 딸애와 이야기 하였더니 함께 오는 사람이라 여사가 우선이 되어서 엄마를 먼저 검사하고 손도장을 찍은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비행기에서 샌프란시스코(旧金山) 도시를 보려고 창구 쪽 자리를 택하였는데 비행장이 바로 바다 옆이라 곧 바로 내리기에 아무것도 보지 못 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중부의 서해안에 있는 상공업 도시로 미국에서 14번째로 큰 도시이며 캘리포니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또한 미국 대도시 중에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 밀도가 많은 도시이다.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금융의 중심지이다. 시구면적은 116km2이고 인구는 80만 명이며 시교까지는 350만 명이다. 그중 백인이40%.화인(華人), 흑인이 각12% 차지하고 나머지는 필리핀, 일본, 스페인, 이태리, 웰남인 등 10여개 나라 사람으로 백인 황인 흑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도시이다.

시내와 주변의 도시는 교량으로 이어졌으며 시내 안은 43개 높은 언덕 고개로 형성되어 초보운전자들은 이 시내에서 운전을 엄두도 못 낸단다. 특히 아홉구비길(九道湾)은 각도가 20-45도 각으로 갈지자 형태로 길이 되여 있는데 특수 장비를 갖춘 차들만 그곳을 오르내리므로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로는 당연 '금문대교'를 꼽을 수 있다. 1937년에 건설된 금문대교 총 길이는 2737m이고 두 개의 교각 높이는 227m이며 기둥사이의 거리는 1280m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당시 이 다리를 건설할 때 사고로 사망한자 수는 14명인데 2008년까지 이 다리에서 자살한 사람은 1002명이고 구조된 사람은 11명이란다.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은 중국계미국인인데 금년에 민주 투표로 당선이 되었다. 이 도시는 미국 전체에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은 도시로 유명한데 남자가 여자보다 많으며 35세 이상 남자 5명중 한명은 동성애자란다.

그날 딸애는 승용차로 우리를 자기의 세집에 데려다 놓고 바로 실험실로 가서 저녁에야 왔다. 저녁을 먹고 나니 또 가야 한다기에 우리도 실험실 구경을 할 겸 몇 년간 서로 보지 못 한 이야기도 할 겸 하여 함께 갔다가 밤11시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세집은 객실 하나, 침실두 개. 주방 하나 하여 80-90평방이 되는 것 같았다. 주방은 상당히 널찍한데 냉장고, 네 개짜리 가스렌즈와 빵 굽는 전자렌지(烤箱)는 주인집 것이란다. 집세는 1750달러인데 1000달러만 보증금으로 걸고 매달 낸다고 한다. 사실 애들은 이렇게 큰 방이 필요 없는데 2년 전 사돈들이 오셨을 때 맡은 것을 우리가 올 때까지 사용하였으니, 아내는 돈 계산부터 하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도착 3일후에 딸애가 뉴욕에서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해야 하므로 우리보고 어디 다니지 말고 자기가 올 때가지 꼼작 말고 집에서 TV나 보란다. 우리는 밥 먹고 집안에서 한국 방송 한 개와 중국 방송 한 개가 있어서 채널을 돌아가며 보는데 간단한 뉴스이외는 광고만 나오니 심심하기가 그지없어서 스탠퍼드 대학구경을 가기로 하고 밤에 차타고 10분 거리인 실험실도 찾아보기로 하고 오후에 찾아 떠났다. 첫날은 학교 정문을 찾아서 갔었는데 가는 도중 횡단보도가 몇 개 되는데 종래로 인도 행에 파란불이 들어오지 않아서 우리는 첫 번째 횡단보도에서 10십여 분을 서있었다. 이때 마침 한사람이 오더니 전선대에 달려 있는 신호코드를 누르니 인행도의 파란불이 켜지는 것이었다. 오! 미국은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적으니 빠른 교통을 위하여 이런 신호등 체제로 운영을 하는구나! 고 생각하였다.

큰길에서 학교 정문으로 가는 양옆은 아름드리 야자수가 쫙 벋었는데 족히 2km가 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근 2km를 가는데 건물과 사람은 보이지 않고 승용차들만 여러 갈래로 뻗은 길을 오갔다. 아름드리 나무숲이 꽉 우거져서 시야 50m정도 밖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2시간 넘게 헤매다가 말도 모르는데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냐?, 하고 저녁 어둠이 깃들기 전에 서둘러서 돌아왔다.

이튿날은 작심을 하고 오전 9시에 떠나서 우리가 가봤던 실험실을 찾아 떠났는데 건물들은 높은 것이 없고 대부분 3-4층 건물이고 건물마다 크고 웅장하여 건물을 싸고 에돌면 비슷한 건물이 많아서 찾기 힘들었고 나무숲이 우거져서 동서남북을 가르지 못하였다. 우리는 장장 7시간을 헤맸는데 두 번이나 가보았던 실험실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스탠퍼드 대학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정원을 가진 대학이란다. 길이 7km, 너비 5km로 학교 정원이 38km이란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서 장장 7시간을 돌아서도 다보지 못 한 것이었다. 후에 딸애보고 이야기 하니 학교 안에 무료 셔틀버스가 다니는데 아무나 탈수 있단다. 사실 그날도 버스를 여러 번 봤지만 승객이 한 두 명밖에 없고 영어도 모르니 누구하고 물어 볼 수도 없어서 중시하지 않았다. 2만여 명의 학생과 교직원은 승용차가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걷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피부색은 백인 황인 흑인으로 다양 한데 동양인이 생각보다 많아 보였다.

스탠퍼드 대학은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중 하나로 세계적으로도 초일류대학이다. 현재 학생 수는 6700여명, 연구생 8000여명, 그리고 1750명의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중 노벨상(诺贝尔奖) 획득자가 10명이며 퓰리처상(普利策奖) 획득자가 5명이고 142명이 미국 예술과학원 원사이며 84명이 국가 과학원 원사이며 14명이 국가 과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1891년 10월 1일 캘리포니아주 철도대왕인 (로)리란‧스탠퍼드가 외독 아들인 (소)리란‧스탠퍼드가 이태리 관광을 갔다가 돌아와 전염병으로 사망한 아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이들 부부는 자기의 농장 8180영무(英畝)(335km2) 내놓으면서 이 땅을 팔지 말도록 유서에 밝혔다고 한다.

1959년에 대학 동사회는 유서에 장기임대를 불허한다는 조건이 없기에 대담하게 농장부지1000영무(40여km2)를 99년 게기로 기업과 본 학교 졸업생들에게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 임대를 주면서 스탠퍼드 공업원구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최고 기업들과 과학 집단이 입주하면서 현재의 실리콘벨리를 구성하였다. 때문에 이름이 없던 향촌대학이 이때부터 이름이 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명실상부한 초일류 대학으로 발돋음 하였다. 만약 하버드대학이 미국 전통의 인문정신의 대표주자라면 스탠퍼드 대학은 21세기 과학정신의 상징이다.

샌프란시스코도시에서 약 60여km 떨어진 이곳은 이 대학을 중심으로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주변은 중국의 鎭(진)과 같은 마을이 샌프란시스코까지 붙어있는데 교통이 아주 발달되어 있고, 도시 마을 전체가 공원 속에 있는 듯 아름드리나무로 숲을 이루어서 말 그대로 도시속의 공원이요 공원속의 마을이다. 주택 대부분이 1-2층으로 되었으며 집 높이는 키 큰 미국사람들인데도 중국이나 한국 집보다 30cm-50cm가 낮았다. 집집마다 토지점유 면적은 1000평방미터 이상으로 집 앞 정원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졌으며 꽃나무와 과일나무가 집집마다 있으며 담장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울타리는 꽃나무가 잘 다듬어져 있어서 겨울이지만 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도 유자나무가 있고 몇 그루의 꽃나무가 있는데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등이 피고 지고 우리가 돌아올 때가지 계속되고 있었다.

춘절을 계기로 스탠퍼드 대학의 중국유학생회가 조직하는 춘절연환회에 갔었는데 약 1000명이 들어가는 극장에 중국 유학생과 부모들로 꽉 찼다. 절목들은 다채로 왔는데 유학생들의 환희, 사랑, 고독, 슬픔, 성공 등이 교차되는 인간의 본능심리를 소품으로 구성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동안 매일 같이 상점을 쇼핑하는데 많은 중국인들은 볼 수 있었지만 조선족은 한 사람도 보지 못 하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 10.30분이되면 근처의 어린이 공원에 간다. 그곳은 중국인들의 집합지였다. 우리처럼 자식 보러 온 퇴직한 대학교수들과 손자. 손녀를 보려온 부모와(박사생과 박사후 자녀), 가정부로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듣고 본 동네방네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가 되면 모두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중국 길림시 중학교 체육교사로 있다가 5년 전에 딸아이 대학 뒷바라지를 하려고 미국에 온 이 여사는 세살 남자 아기를 돌보고 또 집에 소학교를 다니는 남자 아이 둘을 돌보면서 중국집(부부가중국인) 가정부로 일 하는데 월급이 약 2500$ 좌우인 것 같았고, 천진에서 온 장 여사는 2살 난 여자애(미국아빠, 중국엄마)를 하루 10시간씩 돌보는데 3000$은 받는단다. 서장에서 5년 전에 왔다는 30대 후반여성은 세 살 난 미국아이(부부가 미국인) 한 명을 시간당 16$씩 받고 보는데 휴일에는 중국어 과외를 하면서 월 평균 5000$ 이상을 받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주인집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못하게 하고 알아듣던 못 듣던, 중국어로 대화를 하라는 것이다. 또 요구는 아이들을 단속하지 말고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놀게끔 하는 것이 이들의 책임이며, 아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사실 아이들은 울타리가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실큰 뛰어놀다가 제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정부의 하루 일이였다.(다음에 계속)

[저작권자(c)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가는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