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명수 백결선생-박문량(朴文良)(414~478)
한민족의 위대한 위인들(7)
[서울=동북아신문]'삼국사기'에 의하면 백결은, 5세기경 신라 20대 왕이었던 자비왕 때의 사람인데 매우 재능 있는 음악가였으나 극심한 가난 속에서 불우한 한생을 마친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백결이라고 부르게 된 연원도 집이 하도 구차하여 옷을 백군데나 누덕누덕 기워 입었다는 데서 생긴 별호라고 한다. 백결은 자기의 가난을 탓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하루 세끼 아내가 뜯어 다 무쳐주는 산나물에 물을 마시면서 모든 낙을 거문고에만 담았다.
백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그에 대해서는 유명한 「방아타령」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섣달 그믐날 집집이 떡방아소리로 흥성거리는 속에 백결선생의 집안은 아내의 푸념 속에 쓸쓸하기만 하다. “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질없는 줄 아나이다. 그러나 낭군님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나 하며 저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리기나 하나이까?”
찌그러진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면서 백결은 껄껄 소리를 내어 크게 웃고 또다시 거문고를 손에 잡았다. “우리도 지금부터 설맞이를 합시다. 떡방아를 찧지 못해 그렇게 상심이 된다면 우리 집에서도 떡방아를 찧으면 되지 않겠소.” 백결은 거문고소리로 떡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쿵쿵 쿵덕궁 쿵덕쿵덕 쿵덕궁
쿵쿵 쿵덕궁 쿵덕쿵덕 쿵덕궁…
거문고소리는 갈 데 없는 떡방아 찧는 소리였다. 이렇게 탄생한 떡방아의 선율이 쉼 없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서라벌 서울에 온통 퍼졌고, 궁중에서도 우식곡을 대신하여 즐겨 부르게 되었다. 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펴니 이것이 후세에 「낙천낙」이라 하여 전해졌고 「대악」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전해졌다. 그 원형은 알아낼 길이 없으나 「시용향악보」에 「상저가」라는 이름으로 방아타령이 수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현재까지의 방아타령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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