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핀 사랑초꽃

신길우의 수필 209

2011-03-22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1월 어느 날 잠시 쉬고자 의자를 젖혀 반쯤 누웠는데 사랑초꽃이 눈에 띄었다. 하얀 꽃송이들이 거무스름한 잎들 사이에서 여러 개 보였다. 믿기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이 틀림없었다. 지난해 5월에 피웠기에 연구실 한 쪽 서랍장 위에 놓아두었었는데 이 한겨울에 꽃이 피다니. 아무리 실내라 한들 엄동설한이고, 온난화가 이어지는 이상기온이라 하더라도 정월달 개화라니….

이 화분은 지난봄에 한 여류시인이 가져온 것이다. 처음 보는 화초인데 콩나물보다도 더 가느다란 잎자루를 따라 그 끝에 잎이 달려 있다. 잎자루 끝마다 잎이 3개씩 달렸는데, 잎은 모두 나비의 날개처럼 생겨 양쪽으로 펴고 있다. 색깔은 약간 자줏빛을 가진 검붉은 빛이다.
밤이 되면 잎이 접은 나비의 날개처럼 살짝 오므라지는데, 세 잎의 꼭지 부분을 잎줄기에 마주 대고 있어서 마치 함께 쉬고 있는 모습 같다. 첫날에는 시든 줄로 알고 화분에 물을 주기도 했지만, 밤이면 언제나 그런 모습을 하였다. 낮과 밤을 따라 번갈아 그러기를 계속했다.
한참 지난 뒤 화분에서 가느다란 새 줄기들이 솟아올랐다. 끝에는 작은 봉오리들이 달려 있어, 새로운 잎들이 돋아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5월 어느 날 아침나절, 하얀 꽃들이 환하게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다가가 보니 꽃줄기들이 다 꽃송이 몇 개씩을 달고 있었다. 조그마한 흰 꽃송이들은 검붉은 빛의 잎들 사이사이에 피어나 대조가 되어서 유별나게 신선해 보였다. 잎줄기로 여겼던 것이 바로 꽃줄기들이었던 것이다.

꽃은 개나리 꽃송이보다도 더 작은 나팔 모양의 통꽃이다. 5가닥으로 벌어진 꽃잎은 가장자리가 둥근데 활짝 핀 모습은 마치 굵은 큰 대[大]자 모습이다. 꽃빛은 아주 연한 보라색을 풍기는 흰색인데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검푸른 세로 줄이 서면서 초록빛이 된다. 그 안쪽에는 연초록 머리를 한 꽃술과 노란 머리의 더 작은 꽃술이 각각 5개씩 솟아 있다.
꽃송이들을 하나씩 보면 작고 볼품도 별로 없으나, 한 꽃줄기 끝에 서너 개의 꽃대에 하나씩 매달려 모여 피어 작은 꽃무더기를 만들고 있어서 제법 다복해 보인다. 검붉은 잎들과 어울린 하얀 꽃송이들은 산뜻하면서도 특이한 맛을 느끼게 한다.

꽃송이도 밤에는 시든 듯이 다 오므라든다. 그래서 피지 않은 꽃송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크기가 된다. 쪼그라들어 축 처진 모습은 낮의 화사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볼품이 없다.
낮에는 꽃잎도 잎들도 모두 싱그럽게 피어난다. 하지만 밤이면 둘 다 오므라든다. 그렇게 사랑초의 꽃과 잎은 밤과 낮을 따라 변신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한 겨울에 그런 사랑초꽃이 다시 핀 것이다. 더구나 지난해 5월에 피었기에 아직 필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더욱 뜻밖이다. 나는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매일 들여다보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인 두어 분이 찾아왔다. 한 시인이 사랑초꽃을 발견하고는 향내를 맡는다.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꽃향이 은은하다고 한다. 다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잎새가 낮에는 펴고 밤에는 접은 모양이 마치 나비 같은데, 꽃과 어울려졌으니 ‘꽃과 나비’라 사랑초라 한다. 낮에는 잎과 꽃들이 펴고 밤이면 모두 오므리니 마치 부부가 밤이면 합하는 합환(合歡)을 뜻하니 사랑초다. 잎새 하나만 보면 사랑의 표시인 하트 모양이니 그것도 또한 이름과 어울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 마디씩 축하해 주었다.
“정초에 꽃이 피었으니 새해에 복을 받은 겁니다.”
“더구나 사랑초꽃이 폈으니 좋은 징조이지요.”
나는 그 말보다 그런 말을 하는 그들의 마음이 더 사랑스럽고 고맙게 들렸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듯이, 아름다운 말을 듣는 것도 또한 즐거운 일이다.
사랑초꽃은 이 한겨울에 나에게 몇 가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사랑초꽃’, 그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즐겁고, 꽃이 피어 나비 같은 잎새들과 어우른 모습도 보기 좋고, 새해 좋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축하의 말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미 이 세 가지 즐거움을 한겨울 정월에 다 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남다른 복을 받은 셈이다. 내가 받았듯이 올해에는 남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더구나 정초에 고희를 넘겼으니 이제부터는 주고 베푸는 삶을 해야 하겠다.
한겨울 정월에 핀 사랑초꽃, 그 꽃은 내게 즐거움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여생을 살아가는 지혜까지 안겨 준 셈이니 이 또한 복이다. <2009>

[저작권자(c)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가는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