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초기 대표적 서예가 지승원
중국 한글서예의 맥을 이어준 서예가 지승원 [서영근의 서예야 놀자]
池昇元선생님은 1930년 생으로 17세인 1946년에 吉東日報 창간 시절부터 미술편집으로 재직하였으며, 광복 이후 東北朝鮮人民報로 되었다가 延邊日報로 변경 된 후 1971년까지 연변일보사 미술편집으로 재직하였으며 그 후 20년 동안 연변박물관 미술설계원(연구관원)으로 재직하다가 1991년에 미술부 주임연구원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53년에 그의 회화작품은 길림성 제1회 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수여 받았으며 1957년 전국미술전람회에도 입선되었다. 지승원선생님이 40여 년간 창작하여 신문에 실린 서예, 도안설계와 연속화, 만화는 그 수량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조예도 매우 깊다. 선생님은 동양화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저녁 무렵>, <밭머리에서>, <손가락 권총>, <풍속도> 등 많은 동양화작품을 창작하였는데 특히 1972년에 창작한 ‘밭머리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창작한 것으로 ‘화약 냄새’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주제가 선명하고 구도가 엄밀하며 기세가 당당하다. 필치가 유창하고 표현기법이 익숙한 이 그림은 70년대 중국의 시대적 정신을 비교적 선명하게 반영하였다.
지승원선생님은 당시 모택동 필적을 모방하여 동북조선인민보의 표제(한자)를 직접 썼으며, 연변일보의 표제를 한글로 직접 썼는데,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서예 자료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체는 궁체와 흡사하며, 1960년대에 쓴 서체는 다소 북한의 서체에 가까웠다. 이것은 서예를 접한 초기였을 광복 직후 한국에서 출판한 습자교재로 초등학교에서 궁체를 배웠고, 일보사 미술편집으로 재직 당시에는 북한의 인쇄물을 접하면서 북한 서체의 영향을 받아 서풍의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서체가 궁체에 가까운 것에 대해 선생님은 친구가 준 서예책을 보고 공부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책이 한글궁체 책인 것 같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스승이 없이 스스로 서예를 연마하여 건국 초기의 한글서예의 공백을 메우셨다. 선생님은 신문 표제뿐만 아니라 각종 기사나 문학작품의 제목을 직접 쓰셨으며 인쇄술이 낙후한 당시 상황에서 사진까지도 그림으로 다시 그려서 설계하였다고 하였다.
지승원선생님은 중국에서 한글 컴퓨터 폰트인 해서와 명조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그 사적은 박병천 경인교대 교수에 의하여 한국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1982년에 연변미술가협회 부주석으로 선출기도 하였다.
지승원선생님은 전공이 미술이고 신문에 발표한 제목 글씨 외에 발표한 서예작품이 별로 많지 않지만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한글서예의 맥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선생님께서 건국 초기의 산 증인으로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일이다.나는 선생님과의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님의 작품을 10월 한글날에 한중한글교류전에 출품하여 이후 도록을 갖고 다시 찾아뵙기를 약속하고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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