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이긴 장수
-담판으로 80만병 물리친 서희-【신길우의 수필 206】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어떤 분위기와 표정으로 어떠한 음성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언어의 총 전달효과는 말하는 표정이 55%, 표현하는 음성이 38%로 영향을 주는데, 담긴 내용은 겨우 7%밖에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하는 효과에는 논리와 이치도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논리를 정연하게 세워 알맞은 표정과 적당한 음성으로 말을 하게 되면 ‘천량 빚도 갚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에 말로 80만 대군을 물리치고, 잃었던 옛 땅을 되찾은 사람이 있다. 고려 성종 때의 서희(徐熙)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서희는 고려 태조 25년(942)에 개성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힘써서 광종 11년(960)에 19세로 문과 갑과에 급제하였다. 성격이 위엄이 있고, 언행이 바르며 삼가고, 상대방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31세 때에 단절되었던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바른 행실과 언변으로 감동시키고, 태조 황제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명예직을 받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거란이 강해져 송나라를 위협하고자 할 때 미리 고려를 잡아두기 위하여 성종 12년(993)에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 봉산군(蓬山郡)을 점령한 거란이 항복을 요구해 오자, 조정은 항복하자는 무리와 서경[평양] 이북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파로 갈렸다.
이때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목표한 것임을 간파하고는 거란과 담판할 것을 주장하고,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마침 소손녕은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했으나 대도수(大道秀)와 유방(庾方)이 잘 막아 패한 때여서 회담을 받아들였다.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서희에게 상하 관계의 예로 뜰아래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서희는 “군신의 관계가 아니라 나라의 대신끼리이니 서로 대등한 예로 대좌함이 마땅하다”며 거절하였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뜻을 올바른 이치로 막은 것이다.
소손녕은, ①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는데 거란 소유의 고구려 땅을 침식하였고, ② 거란과는 국경을 땅으로 접하고도 멀리 떨어진 송나라를 섬기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하면서, 땅을 바치고 조빙(朝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서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거란)의 동경도 우리 지경에 있는데 어찌 침식했 다고 하는가, 또한,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점거하고 있어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하여서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빙이 통 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귀국의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거란은 서희의 주장과 방안이 옳다고 인정하고, 고려가 조공의 뜻이 있음을 알고서 퇴군하였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에 동의해 주었다. 80만 대군을 타당한 설득 논리와 안심시키는 언변으로 물리치고, 잃어버린 압록강 유역의 옛 땅을 되찾은 것이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서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손자병법 모공편)이라는 것을 서희는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 담판은 우리나라 역사상 외교상 실리적으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업적이 되었다.
서희는 성종 13년(994)에 서희는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되어 3년 동안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의주]을 비롯한 강동 6주를 우리 영토로 편입하는 실무를 수행해냈다. 서희는 종1품 태보내사령으로 승차되었으나 바로 성종 15년(996)에 병이 들어 목종 1년(998) 7월 14일에 요양 중이던 개국사(開國寺)에서 57세의 춘추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고려는 강동 6주를 개척한 후에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귀화[곽산] 안의[정주] 등지에 강동 6성을 쌓고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거란이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원한이 남아 있기에 풀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고, 국왕이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거란은 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고, 듣지 않자 1018년(현종 9) 이래 3차례 침입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냈다. 제3차 침입에서 소배압(蕭排押)이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게 대파당했다. 이후 거란은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강동 6주의 반환 요구를 철회하였다.
우리나라의 실질 영토가 오늘날과 같이 압록강까지 넓어진 것은 바로 서희 장군의 거란과의 외교적 담판에서 성공하고, 강동 6주와 6성의 개척에서 결과된 것이다. 타당하고 조리 있는 논리와 언변, 지혜로운 외교 활동의 위력이 천군만마보다도 더 큰 것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이렇게 적었다.
“먼저 싸운 뒤에 화친을 요구하면 화친이 성립된다. 만약 그 기세만 보고 놀라 화친만 하려고 일삼는다면, 적은 우리를 한없이 농락하고 능멸할 것이다. 이때에 만약 대도수의 승리와 서희의 굴복하지 않는 의기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적의 끝없는 요구를 채우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니, 이 일은 후세에 거울로 삼을 만하다.”
『여사제강(麗史提綱』을 지은 유개(兪棨)도 이렇게 말했다.
“거란이 고려를 대우할 때 교제상의 예절을 이처럼 단호하고 엄하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려가 거란을 섬길 때에는 서희, 강감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기발한 계책을 세워 승리를 제압하여, 먼저 군대를 쳐부수고 그런 뒤에 교제를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적이 감히 우리를 경멸하지 못했던 것이니, 후세에 그 덕을 본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는 신하로서 몽고를 섬기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려는 기세가 없는 채, 오직 몽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굽히는 것만으로 고식적으로 면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몽고가 우리나라를 대우함도 또한 종이나 노예를 대하듯 하여서, 매번 사신이 하나 오기만 하면 온갖 것을 다 요구하여 온 나라가 떠들썩했으니, 또한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서희의 외교적 승리를 생각하면서, 가슴에 담아 깊이 새겨 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