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영화 '황해'-민족과 계급의 이방인 狗男
박우 박사
[서울=동북아신문]“... ...개병이 돌았다... ...어른들이 그날 밤 잡아먹었다... ...다시 개병이 돈다.” 구남의 내레이션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개 같은 생의 서막을 울리는 남자 狗男이다.
구남은 노모와 딸이 있다. 아내는 한국에 돈 벌러 갔고 연락이 끊긴지 꽤 된다. 모두 바람 피고 있다고 쑥덕거리고, 구남은 저녁마다 아내랑 딸애랑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모습이 아니라 아내와 다른 남자가 육체적 관계를 맺는 악몽에 시달린다. 진 빚을 갚기 위해 구남은 번 돈을 거의 모두 빚 갚는데 쓰고, 또 일부를 도박에 탕진하고 高麗棒子라고 무시당한다. 어찌 보면 찌질하게 산다. 개장수 면가가 등장하여 청부살인건이 들어왔는데 빚을 모두 갚을만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구남이한테 돈을 빌려준 “은행장”은 한족이었고 구남이를 고용한 “자본가” 면가는 조선족이었으며 면가를 고용한 “대자본가”는 한국인이었다.
구남은 밀입국을 한다. 젊은 청장년 남성과 여성이 음식물과 오물에 뒤섞여 황해를 건넌다. 한국인 선박으로 갈아타면서 구남은 함께 탄 여성의 시체가 차가운 바닷물에 내팽개치는 장면을 본다.
구남이가 죽여야 하는 사람은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99-1번지에 있다. 구남의 아내가 있을 듯한 곳은 안산이다. 죽이려고 하는 자와 찾고자 하는 자는 한국사회의 극과 극에서 “정처 없이” 살고 있다. 구남이가 죽이려고 하던 사람은 그 운전기사에 의해 살해되고, 구남은 “살인자”가 되어 쫓겨 다닌다. 와중에 면가가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여 구남이 죽이기 작전에 가세를 한다.
한사람은 밀입국하고, 한사람은 편히 비행기로 입국하고... ... 민족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의 차이였다.
살벌한 육탄전이 벌어지고 보이는 장면마다 피바다이다. 구남은 기사회생 식으로 매 순간을 파헤쳐 나가고, 면가는 구남이도 죽여야 하고 자신을 고용한 한국인도 손봐야 했다. “대자본가”는 점점 일이 꼬이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간절할수록 살아갈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열려 있다.
구남은 아내를 찾는 일을 병행하였다. 아내가 살고 있다고 “판단된”, 한국 속의 조선족 집거구. 설상가상으로 조선족여성이 토막살해 당했다는 뉴스와 함께 구남은 아이러니에 봉착한다. 시체 확인 사기를 당하고 구남은 “아내”의 뼈가루를 안고 귀국행 배에 오른다. 시체가 되어 그는 며칠 전 차가운 황해에 버려진 여인처럼 황해에 버려졌다. 구남이를 품은 황해는 조용하다. 파도소리마저 조용하다. 누구 하나 그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관심이다. 중국과 한국 사이의 황해. 그 사이에 조선족 하층 민초는 그렇게 버려진다. 개 같은 인생의 종결이다.
시장지향적 중국의 개혁개방은 능력을 빈부격차의 이유로 합리화 하였다. 최하층에서 살았던 구남의 가족에게는 계층상승의 대안으로 잘사는 고국-대한민국-이 있었다. 하지만 구남에게 코리안 드림은 장밋빛이였다. 피로 질퍽한 흑홍색 장밋빛 말이다. 구남은 우리 조선족사회의 어두운 면이고, 동시에 조선족의 눈으로 본 중국과 한국의 어두운 면이다. 이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기존 조선족들 사이의 담론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구남의 존재에 적응하는 조선족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불협화음으로, 혹자 칭찬일색으로... ...
많은 조선족들의 뇌리에 구남은 조선족이 아니다. 혹은 왜곡된 조선족이다. 하지만 구남은 조선족이 맞다. 또한 많은 조선족들의 뇌리에 구남이 살던 동네는 연변이 아니고 중국도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연변, 지금의 중국은 비까번쩍한 건물이 즐비하고 사통팔달한 거리에서 자가용이 질주하는 연변이고 중국인 것이다. 하지만 구남이 살던 곳은 연변이고 중국이 맞다. 그리고 구남이가 아내를 찾아 온 곳은 한국 속의 조선족 집거지 맞다. 구남이의 존재를 인정하자, 아니면 구남은 네 번 죽는다. 중국에 의해, 한국에 의해, 조선족에 의해,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 의해.
분명 최하층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익이 매일 그 누군가에 의해 수탈당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허다한 위선자들과는 달리 구남은 살기 위해 몸부림 친다. 그의 사유도, 실천도.
그러나 이 몸부림은 한갓 허공에 승화된 기체 혹은 물속에서 부패된 사체가 될 뿐이다. 자본의 먹이사슬에서 구남은 여전히 狗男이다.
구남의 “살아있는” 아내가 기차에서 내린다. 고향에 돌아왔다. 구남의 아내가 탄 기차는 잠시 서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서 또 소란스런 기차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를 태웠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기차일가... ...
개병은 계속 돈다. 자본주의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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