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서빙하던 나날들(5)
전향미 수기
식당 일일 파출부, 둘째 날은 백운호수에 있는 묵집으로 파견되었다.
9시 반부터 오후 2시 반까지 반나절, 3만 5천원 받으면 된다고 했다.
9시 반이라 하니 생각난다. 한국에는 보통 몇 시 반이라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9시 30분이라 한다나?
그 껌 절반짜리 주세요 했더니, 이럴 때는 반짜리라고 한단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헷갈린다. 이게 바로 현지 언어라는 걸까?
인덕원까지 가서 백운호수 쪽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려도 좀체 오지 않는다. 늦을 거 같아 택시 타고 식당에 전화를 걸어 택시기사와 통화를 시켰는데도 길을 못 찾아 한참 헤멨다.
호수 있고, 산 있는 곳에 위치한 약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안겨주는 식당이었다. 식당 옆에 훈훈한 시골냄새 풍기는 밭에는 고추가 탐스럽게 달려있었고 이름 모를 야채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입구에는 계단마다 예쁜 화분들을 예술작품처럼 배치해 놓아 손님들의 눈을 황홀하게 해주고 있었다. 식당 안에도 사모님이 들판에서 꺾어왔다는 꽃들이 구석구석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년 뒤, 이 식당에서 두 개월이나 고정일당으로 일한바 있기에 이토록 감회가 깊은 것이나, 그 당시에는 입구에 있는 화분이 예쁜지, 실내에 장식되어있는 꽃들이 아름다운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장만 했던 날이었다.
홀언니 4명, 모두 쉰 살 정도는 되어보였다. 그중 짧은 생머리를 한 언니가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친절해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싫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서있는 꼴을 못 본다는 듯이 이것저것 쉴 새 없이 시키신다.
내가 첫날이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무분별한 지시와 고리타분한 잔소리식의 말이 싫다. 남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라는 기분에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도 꼭 당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인가보다.
언니들이 주방 쪽을 향해 서서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손님들을 향해 서있었다. 손님들이 손으로, 몸짓으로, 혹은 눈빛으로 원하는 바를 요구할 때, 그것을 바로 읽어내고 서비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태찌개집 훈련이였다.
그런데 한참 웃고 떠들던 생머리 언니가 놀란 듯이 나를 툭 쳤다.
"얘. 그렇게 서있으면 어떻게 해? 사장님에게 눈치 보이니까 주방에 들어가 컵 닦는 척이나 해."
컵 닦으려면 반찬 놓는 좁은 통로를 지나 주방에 가야 한다. 컵 닦은지 얼마 안되서 닦을 게 몇 개 없을텐데~ 다른 언니는 모아서 닦으라고 못 닦게 하더니만,
"몇개 안되도 닦는 척 하고 있어. 우리 다 같이 서있으면 사장님께 눈치 보여 그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 쪽으로 등을 민다.
그럼 손님 서비스는 당신들이 알아서 잘 하시고 전 주방으로 갑니더~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도 표정관리는 잘하느라 애쓴다.
닦는다? 이것도 현지 언어다. 우리는 컵 씻는다. 옷 씻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은 컵 닦는다. 옷 빨다 이런 식으로 말한단다. 어느 한족이 "나 머리 빨았어."했다. 중국말로는 옷을 빨든 머리를 감든 모두 씻을 洗자를 쓰니 한국어 걸음마를 따는 사람에게 그럴 만도 하겠다.
상 치울 때 손님이 사용했던 물티슈는 깨끗한 것으로 모아서 퐁퐁과 락스 탄 물에 담그어 놓았다가 빨아서 청소걸레로 쓴다. 그것도 모아서 빨면 좋으련만, 사장님께 눈치보이니, 한 두 개 있어도 장갑 끼고 헹구는 척 하란다. 무슨 눈치가 보이고 무슨 척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사장님이 의젓하시고 품위 있어 보이는구만 뭐가 무서워 벌벌 떨어?
나는 생머리 언니가 더 시키기 전에 손님상에서 컵 하나 나와도 닦고, 물병 하나만 나와도, 주방 뒷문으로 나가 둥글레차, 보리차, 현미녹차를 함께 우려낸 물을 담아왔다.
잠시도 서있는 꼴을 보여주지 않으니, 눈치 빠르고 일 잘한다는 칭찬 받았으나, 다시 오고 싶은 생각 없어지는 식당이다.
묵집이라 내가 처음 보고 듣는 요리들이 많았지만, 거기에 눈 팔 겨를도 없이, 언니들에게 적응하다나니 반나절 지났다.
일 끝나고 식사까지 하고 버스 정류소에 나오니 오후 3시다. 역시나 마을버스는 잘 오지 않는다.
여름 한낮의 햇볕이 머리위에서 뜨겁다.
"이종환의 쉘부르 어디에 있나요?"세련된 옷차림의 여자가 물어왔다.
손님상에 나가던 시원한 도토리 냉채묵을 떠올리던 나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녜? 무슨 셀버루요? 전 아무 것도 몰라요." 사람을 찾는 건지, 길을 묻는 건지 어리둥절하다.
미안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뒤돌아서는데, 어마야. 버스 정류소 바로 뒤에 "이종환의 쉘부르"라는 건물이 있지 않는가! 흥분해서 길 묻던 여자를 찾았지만, 어느새 길 건너 저 멀리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종환의 쉘부르, 뭐 하는 곳인지는 몰랐어도, 1년 뒤, 비오는 날, 역시 이 버스 정류소에서, 빗속을 울리며 감미롭게 흘러나오는 "그대 이름 바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을 넋을 잃고 들었었다.
라이브카페, 생음악이라 한다.
오후 3시였으니, 이종환의 쉘부르가 조용히 꿈나라에 빠져있었던 거 같다.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이른 것 같아, 빵 사들고 환승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생태찌개집에 들렀다. 내가 월급쟁이로 몸담고 일하던 곳이다.
사장님은 친정에 온 각시 같다며 먹이지 못해 또 안달을 하신다.
주방장언니랑 빵 먹으며 수다 떨고 있는데, 파출부 소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오후 반나절은 횟집에 가라고 한다. 한번 거절하면 일거리 주지 않을 가봐 싫은 대로 다시 버스타고 파출부 소장님이 오라는 곳에 갔다.
소장님이 직접 식당으로 데려다 주겠다는데, 소장님도 길을 못 찾는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골목사이를 누비다가 찾은 집이 바로 독도횟집이다.
테이블은 4개, 사장님과 회 뜨는 젊은 남자, 둘이서 일하고 있었다. 옷 갈아입으려 화장실 찾으니 옆문으로 나가 지저분한 창고 옆을 가리켜준다. 한사람이 서있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화장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지린내만 잔뜩 풍겨 겨우 옷 갈아입고 나왔다.
"화장실에 전기 나갔어. 고쳐야 대."사장님이 회 뜨는 직원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한국 온지 얼마 되냐? 한 달에 얼마나 적금하냐? 남편은 뭐하냐? 궁금한 것도 많았다. 날 유심히 쳐다보시더니 한쪽 입귀가 다른 쪽 보다 약간 치켜 올라가 있다면서 건강문제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질병에 대해 아시나봐요?"
의학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들을 많이 읽으셨다고 한다.
내 건강문제를 걱정해주시는데 나는 깔깔깔 웃고 싶어서 참느라 진통을 겪었다.
사장님은 흥에 겨워하시며 노래도 불렀는데 나는 그것을 연변노래라 했고 사장님은 한국노래라 하면서 한참 실랭이 벌였다. 그 노래가 지금 죽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테이블이 4개밖에 안되니 홀정리 끝내고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도 하고, 시키는대로 배달용 양념세트도 준비하고 했다.
저녁손님이 들어 올때쯤 되자 길 건너 슈퍼 옆에 원형테이블 4개를 놓고 손님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손님들은 밖에 있는 테이블을 즐겼다.
요리 나를려면 차량이 오는지 좌우를 살피고 길을 건너야 했다.
살아 꿈틀대는 낙지가 무섭고 징그러워 못 나르겠다고 뒷걸음치니, 회 뜨는 직원이 와서 날라준다. 꿈틀대는 낙지를 입에 넣고 오무작거리며 먹는 아가씨들 보기도 무섭다.
그럭저럭 손님도 많은 편이였고 바삐 움직이니 시간은 잘 가고 어느새 저녁 11시가 넘었다.
그런데 퇴근하라는 말도 없고, 나도 몇 시에 퇴근해야 하는지 모른다. 파출부 소장님께 전화해서 물어보려니 새삼스럽고, 남편이 걸어오는 여러 통 걱정전화는 근무시간이라서 받을 수 없고, 조바심을 내며 일했다.
사장님은 그러한 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맛있는 매운탕을 꼭 맛보게 하겠다면서 족히 20분은 끓이시는 듯 했다. 식사하면서도 얼마나 말을 시키는지, 밥술 놓고 퇴근할 수는 없고 속만 바질바질 태웠다. 내색을 내지 못하고 벽에 붙여놓은 글을 읽으며 웃었다.
"좋은 글이네요."
<하늘아래 해가 없는 날이라 해도 나의 점포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가게 문을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정확히 11시 35분, 길을 물어가면서 전철역으로 냅다 뛰어 막차를 잡아탔다.
"정말 내가 괜찮을까요.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네요." 김범수의 노래, "하루"가 자꾸 귓가에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