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서빙하던 나날들(3)

전향미 수기

2010-10-11     [편집]본지 기자

돈 벌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또 벌고, 배움을 통한 지혜와 좀 더 넓은 안목으로 또 다른 변화를 창조해 볼 수 있는 것,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면, 식당 입문 할때의 날들이 새삼스럽다.

현지의 정서와 문화를 피부로 경험할 수 있는 식당 서빙을 해보겠다는 것이 처음부터의 생각이었으나, 남편이 질색하고 반대했으므로, 식당 입문하기까지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 1년은 남편과 한 회사에 다녔다. 사소한 일로 지지리도 많이 싸웠다.

2008년 말, 경기침체로 회사 오다가 줄어들고 잔업이 일체 취소되어 적금계획에 차질이 있게 되자 남편은 내가 식당 일 하는 것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교차로신문 보고 찾아간 첫 식당이 24시도마다리뼈다귀였다. 식당 앞에서 기웃대다가, 용기 내어 출입문을 밀었더니 끄덕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김에 이곳저곳 마구 밀어보는데 안에서 사람들이 의아하게 내다보는 것이 의식되어 잠시 어쩔바를 몰라 허둥댔다. 다행히 열리는 곳이 있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들어가 외국인등록증 보여주며 통성명을 했더니 사모님이 놀라시면서, "왜요? 보험 들어줘야 해요? 우리는 그런 거 해주지 않는대요."한다. 초보니까 월 3회 휴식, 135만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한다.

사흘이나 어떻게 집에서 놀아? 급한 마음에 얼떨결에 "내일부터는 안되요?"했다.

"글쎄요. 그렇게 급하면 다른 일자리 알아보고 못 찾으면 월요일 여기로 오세요."

엥!? 무슨 말씀? 다른 일자리 알아보라고? 갈 곳 없으면 여기로 오라고? 천만에요. 절대 안되는 말씀입죠. 제가 비록 출입문도 못 찾는 멍청이 바보지만 말입니다.

그 길로 바로 면접 간곳은 조마루뼈다귀였다. 저녁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많았고, 서빙도 서너명 있었다. 사모님은 자상하신 분이였다. 당장 집을 빼고 사모님 소유로 되어있는 셋집에 들게 되면 훨씬 싸고 여차여차해 좋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합격여부는 일요일 날 통보해주겠다고 하셨다. 교차로에 돈 주고 구인광고 냈으니깐 일요일까지 면접 오는 사람들 모두 만나보고 결정을 하겠다면서, 이해해달라는 말까지 잊지 않고 해주셨다.

그것도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음에 들면 당장 출근하라고 할텐데, 역시 어리버리한 내 꼬락서니가 맘에 안 들겠지. 나는 면접을 보면서도 서빙 도우미로 왔다는 키가 늘씬하고 예쁜 여자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저 많은 손님들 앞에 부끄럼 없이 떡 서있을 수 있을가? 난 저렇게 못해, 주눅이 들어 시끌벅적한 뼈다귀집을 뺑소니치듯 빠져나왔다.

못해, 못하고말고. 손님들과 눈길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워, 손님들이 무서워, 주방설거지가 나에게 맞아.

식당일 찾는 첫날부터 뼈다귀인지 뼉다귀인지 하는 곳만 면접 갔다가 개빼다구에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교포가능, 설거지로 검색해서 면접간 곳이 바로, 구리시에 있는 콩나물국밥집, 내 생에 첫 경험을 선사해준 식당이다.

서빙을 잘할 수 있다면서 자신감이 없는 나를 선뜻 받아주시고, 믿어주시던 사장님,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들 앞에서 허공만 쳐다보며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던 사모님,

산자락에 있는 컨테이너 숙소에서 자다가 “어서 오세요. 상 치워드릴게요”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며 헛소리도 곧잘 치고 비명도 질렀으니, 그 공포 속에서도 잘 주무시고 너그럽게 웃어주신 언니들,

이는 2009년 법무부 수기공모에 제출했던 글에서 이미 썼던 내용이다.

힘든 하루하루, 전쟁터 따로 없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왕초보 딱지를 떼고, 당당하게 손님들 앞에 나서고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몸을 혹사시키며 일했다.

그 수기 마지막부분에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빙을 하면서 서비스마인드와 자세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웃지 않으면 서비스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꾸밈없는 웃음으로 손님들을 대하다가도, 몸이 피곤하거나 지겨움을 느낄 때는 얼굴이 무표정해지고 까다로운 손님이 있으면 진저리를 치면서 눈초리가 사나와지는데 표정관리를 전혀 못한다. 서비스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내가 하는 서빙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단순하게 손님들 심부름 역할밖에 안 되는 것 같다.

확실히 그랬다. 나에 대한 손님들의 불만족을 읽을 수 있었고, 나 스스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한결같이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친절과 열정을 유지할 수 없단 말인가? 피곤에 절은 몸을 퇴근 전철에 던지고, 두 눈을 퀭하니 뜨고 앉아 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

취침시간이 문제긴 문제다. 중국에서 늦게 자던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은 펼쳐놓고 있다. 한국 와서 나에게 유용한 참으로 좋은 책들을 발견했다. 내가 흥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퇴근 후 책 펼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무의미하게 낭비한 느낌으로 이튿날 몰려오는 그 허탈함과 회의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늦게 자고 이튿날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웃음이 나올 수 없다.

내 문제가 크지만 식당문제도 없지 않다. 서빙 둘을 쓰면 인력낭비가 되고, 그렇다고 나 혼자 하려면 너무 힘에 부친다. 혼자 감당이 안될 정도로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소리소리 지르고 손님들을 내쫓고 싶어진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을 할 때의 그 절망감과 분노, 중국에서도 그랬다. 감당이 안될 정도로 번역오다가 들어오면, 십상팔구는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번역사로 등록한 사람들 중 마음 드는 번역사는 거의 없고, 좋은 번역사에게 의뢰하려면 또 단가가 맞지 않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며 혼자 몇날 밤을 지새우며 번역을 완성해야 했다. 재롱부리는 딸애에게는 조용하라고 을러메고, 침대로 끌어당기는 남편에게는 미쳤다고 소리소리 질렀었다. 납기준수를 위해 1분1초가 전쟁과 다름없었다면 믿겠는가! 지금 생각만 해도 진저리 날 정도로 아찔하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생태탕을 끓여 손님상에 들고 나르는 생태찌개집, 취직한지 벌써 석달이 되어간다. 나는 이제 내가 한 곳에서 꾸준히 일하는 인내력 한계가 석달인줄 잘 알고 있다. 떠날바엔 손님이 적은 여름에 떠나야지. 찬바람 불어오면 밀려들 손님들을 생각하면 끔찍스럽다. 그런데 그만두면 어디로 가나? 다른 곳 가봤자 또 석달 초과하지 못할 것 아닌가! 주인들에게 미안하고 사직할 때의 변명거리도 궁색하다. 한 곳에서 1년 이상 일하고 퇴직금까지 받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심심한 경례를 드린다!

그럴 즈음, 내 눈을 반짝 뜨이게 하는 날이 있었다.

가게 오픈 처음으로 식당도우미를 불러 쓴 것이다.

"일당으로 일하는 거야. 일 끝나면 그날 바로 돈 받는거지. 아침에 집에서 전화로 일 받아서, 가라는 곳에 가면 되"

"당연 좋지. 월급쟁이는 매여 있는 몸이라, 일당으로 일하는게 자유롭고 좋아"

커피 마시며 내 궁금증 풀어주고는 설거지를 후닥닥 해 치운다.

화장실 들어가 담배도 한 대 피우고 나온다.

저녁 10시가 되자 땡 소리나기 무섭게 옷 갈아입는다.

그런데 카운터에 계시던 사장님이 주방으로 쑥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정리하시는게 아닌가!

일당 언니는 돈 받으려 카운터에 한참 서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얘. 사장님 왜 저러시는거야? 돈 줘야지."

존경하옵는 사장님 속셈을 내가 모를리 없다. 사장님은 칼 퇴근을 싫어하는 것이다.

일당 언니가 문 나서기 바쁘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뭔 사람이 저래? 시간 되자마자 총알같이 나가버려."

그날 그 후로, 나는 월급쟁이에서 일당쟁이로의 전환을 생각했다. 며칠동안 합당한 사직이유를 생각하며 생각을 굳혔다.

"사모님, 저 어떻거죠? 아무래도 병 있는거 같아요. 강박증 같은 그런거요. 손님들이 막 밀려들어도 차분하게 처리하면 되는데, 욱 하고 짜증이 밀려들어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아요. 손님 들어온 순서도 기억못하니까 손님들이 화를 내잖아요. 손님에게나 사장님, 사모님에게나 모두 미안해요. 중국에서도 그랬어요. 남편은 절 보고 갱년기라 했어요. 돈도 벌고 환경도 바꿔본다고 한국 왔는데, 병이 더 심해지네요. 푹 쉬다가, 일당으로 일하든지, 그러다가 병이 발작하면 또 쉬고 하든지 해야겠어요."

"그래요? 향미씨가 정말 갱년기 맞는거 같아요." 사모님은 안쓰럽게 날 바라본다. 어렵게 사직의향을 밝히면서도 착하신 사모님의 그 눈빛이 진정한 동정심과 이해심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이 나온다.

"녜? 설마 진짜 갱년기 증상일가요?"

"그럼요. 지금은 사십 전에 갱년기 오는 여자도 꾀 있다던데. 병원 꼭 가보세요."

나는 진짜 환자처럼 눈을 멍청하니 뜨고, 짜게 먹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가냘프게 추기면서 사모님과의 대화를 원만하게 마쳤다.

그리고 월급쟁이 구할 때까지 20일 더 일했다.

2009년 7월 20일, 월요일, 월급쟁으로 근무하는 마지막 날,

해방을 맞는 여 전사처럼 개선가를 부르면서, 흐물흐물 웃으며 집이라고 왔더니,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낸다.

"새끼는 중국에 버려놓고 머하는 짓이야? 노랑지 같은게, 일하기 싫어 맨날 임신한다는 말만 하고, 임신 테스트 하는건지 먼지 하는거나 들고 영청질하고, 일당? 하루살이 하는거야? 일거리 없을 때는 어찔려구? 돈은 언제 벌어 중국 가나? 내가 미치겠다!"

아! 내가 미친다. 억장이 무너진다. 이놈의 3년이 언제 지나려나?

과연 나의 일당쟁이 생활은 어떠할 것인가? 남편이 낙담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은 천길 나락으로, 그만 앞이 막막해진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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