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연합회, 유봉순과 진복자 두 여인의 끈끼있는 봉사정신
-올해로 창립 10주년 맞은 조선족연합회 기념 인터뷰
[서울=동북아신문]소은선 특약기자= 지난 4월 25일 일요일 오후 창립 10주년 행사를 개최하는 조선족연합회를 찾아갔다. 홍제동에 위치한 조선족연합회에서 운영하는 방문취업동포 쉼터인 '우리집' 에서 부지런히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유봉순회장을 만났다. 그녀는 우리 이주· 동포정책연구소 일행을 반갑게 행사장으로 안내했다. 행사장인 '우리집' 부근에 위치한 노인대학 2층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마다의 얼굴에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득한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는 조선족연합회 기념 브로셔를, 맞은 손에는 노래집을 쥐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평균 중년 이상으로 보이는 170여명의 중국동포들이 모두가 앉기에는 비좁아 보이는 방에서 일찌감치 찾아온 더위도 잊은 채 행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동포(조선족연합회 회원) 당사자들이 오늘의 주인공이지만 이들과 수년을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 내빈으로 초대되어 창립 10주년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각, 진복산 부회장의 개회선언과 함께 회원들의 '열렬한' 박수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내빈으로 초대된 오충일 목사, 前재외동포재단 이구홍 이사장,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가 차례로 강대상에 나와 축사를 하였다. 이어서 1시간여 동안 연합회 역사가 담긴 비디오를 감상하며 지난 날 중국동포들에 대한 법적 차별에 맞서 투쟁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이 자못 결연해 보였다. 뒤이어 소박하지만 마음을 담은 축하공연 후, 조선족복지선교센터 임광빈 목사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기다리던 동포들의 최근 동포정책 설명회 시간에는 이주· 동포정책연구소 곽재석 소장이 방문취업제의 입국규모 제한 이후 법무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중국동포에 대한 재외동포 자격(F-4)부여 제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동포들의 적극적 참여를 촉구하였다. 아울러 지난 날에 동포사회에 만연된 정부 제도 및 정책에 대한 불신과 불법행위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였다. 동포들이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국내 법질서를 준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곽재석 소장의 충고 메시지를 경청하는 동포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동포들이 결성한 단체로 가장 오랜 역사를 지켜온 '조선족연합회'- 창립10주년을 맞은 연합회는 언제, 왜 생겼고, 누가 운영하며,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위해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지난 5월 10일 <미드리>의 소은선 연구실장은 조선족연합회를 방문하여 유봉순 회장, 진복자 총무, 김정희 회계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 투쟁의 시작 종을 울리다
연합회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문서의 설립 목적에는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 조선족동포들의 단결과 우의를 다지며 한중친선을 위해 노력하고 조선족 동포의 위상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라고 적혀있다.
진 총무가 덧붙이기를, "2000년 '우리는 왜 모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종로4가의 어느 식당에서 관계자들이 모여 식사하며 절박한 토론 끝에 동포들이 뭉치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으며 어려운 사람을 함께 도와서 더불어 잘 살아보자는 결맹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모임을 <조선족연합회>라는 명칭으로 정하고 정식으로 출범하였지요." , "같은 해 10월 15일 조선족복지센터가 설립됨으로써 회원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어요."
10년 인고의 세월을 서로 나눠지고 걸어온 사람(유봉순 ․ 진복자)
"감회가 새롭습니다. 10여 년을 무료봉사하며 심적 ․ 물적으로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하는 일에 매우 자부심을 느끼며 또 기쁩니다." 창립10주년을 맞이하는 유봉순 회장이 소회를 밝혔다. 그 곁에 있던 진복자 총무는 "그동안은 연합회 행사에 외부인사를 초대할 수 있는 위치나 역량이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많은 내빈이 자리를 빛내주어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사실은 더 많은 손님을 모시고 싶었지만 장소섭외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역경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봉순회장은 연변 안도(安圖) 출신으로 1994년 한국에 왔다. 1999-2000년 즈음 종로 거리에서 좌판을 늘어놓고 다른 5명의 중국동포들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경찰단속반의 번번한 집중 단속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코리안드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질 즈음, 조선족복지센타 임광빈 목사의 ‘뭉치고 힘을 합하여 동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에 생명의 불꽃이 피어났고, 드디어는 모임을 결성하기로 결단하였다. 회원모집과 동시에 진복자 총부와 함께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상대로 상담(임금체불, 초청사기, 체류 관련) 시작하였다.
개인 상담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가져올 수 없음을 깨달아 포기하고 싶을 즈음,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바로 동포차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재외동포법 개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족복지센터와 함께 개정운동 시작하였다. 와중에 연합회에서 유일한 국적취득자인 유회장은 경찰서 방문면담, 외국인보호소 방문면담 등 공적인 일을 도맡아 섬겼다. 하지만 연합회 초기 활동할 때는, 개인적인 신분과 관련하여 경찰조사의 단속에 걸려 번번이 마음을 졸였다. 연합회에서는 유일한 국적취득자로서 통장개설이나 핸드폰 등록 등 외국인에게 제한된 권리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주고는 경찰단속을 당하는 곤혹도 여러 번 치렀다. 또한 개인생활을 위한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동역자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진복자 총무의 든든한 지원과 격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유회장은 힘주어 강조한다.
진복자 총무는 82년도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장기간 입원치료를 하면서 있던 집까지 팔고 가세가 점차 기울었다고 한다.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된 총무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 연길에서 한국에 왔다. 1989년 혼자의 몸으로 2개의 큰 짐을 짊어지고, 연길에서 심천, 홍콩을 통해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중국동포에 대한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어렵사리 통과하고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3개월짜리 비자로 당시 중국 돈 4만원어치의 건강보조식품, 약을 모두 팔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였다. 다행히 운이 좋아 3개월 만에 가져온 물품을 모두 팔았지만 그 후 당시 여느 동포들처럼 불체자 신분으로 장기 체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사 수완이 좋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중국에 집도 사게 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 내에서 진 얼마의 빚은 일해서 모두 갚았고 99년 완전 귀국을 하려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 내에서 오히려 지인에게 빌려준 돈 78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채 포기하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기다리다가 또 다시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 즈음 그전부터 알던 유회장의 소개로 임광빈 목사를 파고다공원 한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조선족연합회가 걸어온 발자취
이제 동고동락하면서 개인의 꿈이 아닌 재한동포 모두를 위한 큰 꿈을 향해 문을 두드리게 된 두 여인은 2000년 4월과 5월 두 달간 연합회의 이름으로 동포들이 주로 거주하는 종로, 청계천 등지에서 발품을 팔며 회원모집 전단지를 열심히 배포하였다. 그러나 두 달 동안 단 한명의 가입자도 없었다. 막막하고 엄두가 나질 않아 그만두고만 싶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고민한 끝에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한다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시 시작했다.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먼저 내 가족과 친척, 가까운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여 회원가입을 유도한 것이다.
2000년 연합회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은 중국내 초청사기피해자 자녀교육 돕기 운동이었다. 당시에 중국내에 한국초청사기피해자가 10만 명이나 되었는데,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피해자의 자녀교육조차 포기하게 될 지경이었다. 당시 연합회 회비가 5000원 이었는데 회비 모은 것과 동포단체에서 후원 받아 가져온 옷을 밤새도록 손수 빨아서 함께 중국으로 보냈다. 보내는 배송비용을 아끼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중국 연길로 가는 승객을 일일이 찾아 도움을 요청했었다. 이 같은 활동은 2002년까지 이어졌는데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게 했다. 남을 돕는다는 일이 이렇게 보람되고 기쁠 줄이야!
하지만 체류여건이 매우 불안했던 동포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365일 매일같이 고충상담을 해야 하는 반복된 일상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자괴감이 찾아와 그만두고 싶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독려하여 다시금 회복하고 힘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 때는 중국 동북지역의 겨울추위보다 남쪽 한국의 추위가 더 춥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재외동포법 개정을 위해 수십 일간 벌였던 시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겨울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쪼그리고 자는 것이 기본이고 오랜 집회로 교회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게 되면서 거의 매일 교회 행정실에 불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동포단체들 간 운동의 목표가 조금씩 달라 갈라지게 되었는데,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의 국적취득운동과의 상충으로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편 조선족연합회는 종교문제로 임광빈 목사와 어색하게 되었고 결국 의주로교회로부터 사무실을 독립하게 되었다.
조선족연합회는 무슨 일을 했는가(자유왕래 ․ 자유취업를 위해)
1. 재외동포법(1999년 8월12일 제정) 개정 운동 참여
2004년 600만 재외동포를 위한 재외동포법(재외동포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2월9일 대한민국 국회를 통과 했다. 재외동포법은 1999년 8월23일 당시 중국동포의 집(김해성 목사) 중국동포 3인의 이름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해, 2001년 11월29일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2003년 연말까지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 폐기될 운명이었다. 1년간의 치열한 집회와 시위 끝에 드디어 동포법 개정안이 2월4일 법사위원회를 통과하고 2월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기에는 조선족연합회도 함께 힘을 보탰다. 조선족연합회는 창립 후 1년 만에 중국동포 지위개선을 향한 공식적 활동을 재외동포법 개정을 위한 총동원회 개최(2001년 5월27일)로 열었다. 총 100여일, 2차에 걸친 긴 농성으로 끝에 2004년 2월 재외동포법 개정안 통과 소식을 농성 현장에서 접하는 기쁨을 맞보면서 마침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 불법체류자 합법화 운동 참여
2001년 재외동포법 헌법불일치 판결문이 나왔지만 당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내체류 중국동포들은 여전히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언제든 강제추방을 당할 수 있는 불안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러던 중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3월12일 법무부는 '불법체류자 종합방지대책'을 발표해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을 ('02.3.25~5.29) 설정하여 자진신고자에 한하여 2003년 3월31일까지 출국을 유예해준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여기에 25만6천여 명이 자진신고를 했는데 이중 중국동포가 10만 명을 넘게 차지했다. 그 이후에도 법무부는 자진신고 불법체류 외국인 중 체류기간이 3년 미만인 자에 한하여 출국기한을 2004년 3월30일까지 재유예해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2005년 3월15일 법무부에서는 제1차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일명 3.15조치)을 시행했는데 자진출국했던 불법체류 동포들의 재입국이 허가되었다(약 6만 명 합법화). 그 후 2006년 법무부는 2차로 자진귀국프로그램을 시행하였는데, 4월24일~8월31일까지 자진출국시에는 출국일로부터 1년경과 후에 재입국과 취업을 허용하기로 하였다. 이 시행으로 약 2만6천명 동포가 합법화 혜택을 입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변화는 국제정세와 국내경제여건을 고려한 것이겠지만 국내 중국동포 관련단체의 적극적인 권리 요구와 참여활동의 반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동포 관련단체의 하나인 조선족연합회도 늘 그러한 활동의 중심에 있는데, 불법체류자 합법화를 위한 수많은 운동에 주체적으로 또는 후원의 자격으로 사력을 다해 참여해왔다. 연합회의 두 여인은 사명감 하나로 열심히 뛰었는데,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연대하여 힘을 모아 활동하는 단체로 거듭난 것이다.
3. 더불어 잘 살기위한 센터운영
조선족연합회는 방문취업제 실시 한 해인 2007년 5월6일 방문취업비자로 입국한 동포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쉼터 운영 동기는 방문취업제 실시 후 입국한 무연고동포들에게 한국의 취업 정보와 숙식제공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숙식비만 받았고 무연고자로서 당하는 곤란함이나 어려움을 상담해 주었다.
2009년 6월28일에는 드디어 동포들의 쉼터인 '우리집'을 개원하게 된다. 50여명의 동포와 몇몇 임원의 후원금으로 현 건물 보증금 4500만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집 계약 후, 전화, 팩스, 컴퓨터, 가스렌지는 모두 지구촌동포연대 배덕호 위원장이 개인 저축액으로 도와줬다. 그 지원금은 10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지만 가치로는 1000만원이 훨씬 넘는 귀한 돈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2-3층을 모두 빌려 센터로 운영하고 있지만, 개원 초에는 1층 방만 세를 얻었는데, 그 2평 남짓 작은 방에서 13-14명이 함께 자기도 했다. 지금도 가스비만 100만원 드는데, 회비와 식비 2000원/끼, 숙박 3000원/일 등의 사용료만으로 센터를 운영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회원 470여명에 회비가 월 만원이라지만 매월 납부하는 사람이 드물 뿐 아니라, 최근 들어 한국내 계절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일이 없는 겨울 시즌에는 모두가 중국으로 들어가니 회비를 낼 리가 만무하다. 그리하여 고안해 낸 방안이 '신용호조부' 운영이다. 2006년 2월 신용호조부를 처음으로 작성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용호조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을 의도도 없이 동포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조선족연합회가 보증인이 되어 큰돈이 급하게 필요로 한사람에게 여유 돈을 가진 동포들로부터 여기저기 수배하여 꾸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금의 이자를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아직 한 명도 빌려준 돈을 떼이거나 빌린 사람이 종적을 감추거나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재한 중국동포의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조선족연합회는 정식으로 신용호조부란 이름을 짓고 공식적으로 운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자금을 빌린 사람이 2%의 이자를 매월 지불해야 하고, 빌려준 사람에게는 1.5% 이자액이 돌아간다. 나머지 0.5%에 해당하는 금액은 연합회가 수금하여 쉼터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아직 넉넉한 운영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부지런히 홍보하고 발전시켜서 안정적인 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앞으로 10년 안에 10억의 기금을 조성하여 중국동포를 위한 안정적인 금융시스템을 설치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와 기본 정보가 없어 방황하다가 정착에 실패하는 경우를 최소화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도 조선족연합회는 입국 초 정착 기반을 잡아주고 경제적 밑받침을 해주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기관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할아버지 나라로 온 나, 조선족은 '우리집'에 살고 싶다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끼도록 '우리집'이라 지었어요.” '우리집'이라는 이름을 명명하게 된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과거 70-80년대 한국민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일본으로, 미국으로 세계 각국을 향하여 떠났고 이국땅에서 고된 이민생활을 시작하였다고 들었어요. 지금 중국에 있는 많은 동포들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한국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갑니다. 예전에 한국민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더욱이 우리는 같은 한민족이 아니겠어요. 서로 보듬고 품어주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한국에서는 동포로 살아가지만, 앞으로 남북통일을 위한 역할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어요. 또한 이후에 만약 한국민이 중국으로 그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올 날이 온다고 할 때, 우리는 한민족으로 함께 도와가며 살게 되길 바랍니다.” 두 분의 마지막 당부의 말이 우리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취재를 진행한 한사람만의 착각일까?
이주동포정책연구소 미드리/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단, 공익 목적 출처 명시시 복제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