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34]조선인 이주사
주성화 저
제5절 조선인의 체육
조선인은 예로부터 체육을 즐기였다. 만주에 이주 후 조선인의 체육은 학교에서 사회로 보급되었다.
청나라 말, 학교출현과 더불어 학"먄셈걋� 동보발전되었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해마다 육상을 위주로 하는 교내운동회를 개최했다.
1914년 단오절에 국자가에서 간도 조선인사립학교연합운동회가 열렸는데 50여 개소 조선인학교 선수 499명과 관중 2만명이 집결되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번 운동회에서 1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악대가 응원하였다고 한다. 당시 운동회에서는 경기시작 전 《광복가》를 먼저 불렀고 경기가 시작되면 《응원가》를 불렀다. 《응원가》가사는 다음과 같다.
응원가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아야
황황한 대한혼 발휘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달았네
반일대적 연습하여
후일 공훈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이 아닌가
그외에도 《학도가》, 《한산도》를 불렀다.
초기에는 《학우회》, 《청년회》 등 단체들에서 체육경기를 조직하였으나 1926년 용정에 《간도체육회》가 설립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연길에 《체육회》가 나왔다. 이는 자발적인 군중조직이었다. 1935년에 이르러 《만주체육연맹 간도성사무국》이 세워졌다. 이는 일제에 순응하는 조직이었다.
축구는 우리 민족이 즐기는 체육종목의 하나이다. 간도지구에 처음으로 김약연 교장의 지도밑에 1908년에 설립된 명동학교에 명동학교축구팀이 탄생하였고 이어 1908년에 설립된 연길 와룡동의 창동학교에서 소련 울라지보수또크에서 온 박문호씨가 축구를 가르쳤으며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온 로상렬씨를 지도로 하는 화룡장동학교축구팀이 나왔다. 명동학교와 장동학교에서는 해마다 두차례씩 축구친선경기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간도사립학교들인 해성중학, 동흥중학, 명동중학, 구산중학, 은진중학, 영신중학 등 학교팀이 참가한 축구경기를 가졌다. 용정 은진중학교팀이 우승을 하였다.
1923년 6월에 대립자에서 화룡현축구운동대회를 가졌다. 명동학교, 화룡현립제1소학교, 해성소학교, 덕흥소학교, 화룡현립 제7소학교 등 학교축구팀이 출전하였다. 화룡현립 제7 소학교(장동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25년 5월, 국자가에서 사상처음으로 되는 간도축구운동대회를 개최하였다. 경기는 청년조와 소년조로 나누었다. 용정 영신소학교팀이 소년우승을 하였다. 당시 선수들의 연령으로 청년조와 소년조로 나눈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키를 표준으로 하였다. 결국 운동경기의 실제수준을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1945년 해방직후까지 지속되었다.
1925년 6월, 《청우장학회(青友奖学会)》가 용정에서 간도축구운동회를 열었다. 영신 소년팀, 보광소년팀, 예수교영신소년팀, 동흥소년팀 등 4개 팀이 참가했다. 영신소년팀이 소년조우승을 하였다.
1926년 단오절에 용정시민체육장에서 제2차간도축구운동회가 열리였다. 출전한 소년팀은 동산소년팀, 장남운동부소년팀, 국자가 숭신소년팀, 광일소년팀, 동아소년팀, 영신소년팀, 연일소년팀, 영실소년팀, 동룡소년팀, 현립제2소학교팀이였고 청년팀으로는 영신학우회팀, 대동학교팀, 경성동우친목호팀, 동흥학교팀, 은진학교팀, 국자가사범팀이다. 장남운동부소년팀이 소년조우승을, 동흥학교팀이 청년조우승을 따냈다.
1926년 6월 13일, 용정동흥중학교 25명 축구단일행(감독 김영화. 간사 김구현)은 평양관서체육회에서 주최한 조선제2차축구대회에 참가하고저 용정을 떠났다. 6월 22일, 첫 경기에서 평양 광성고등학교축구팀께 1대 3으로 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안주, 정주, 선천, 신의주 등 지방에서 친선경기를 치렸다. 축구단일행은 신의주에서 한정규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한테서 190여 원의 후원을 받았다. 동흥중학교축구팀의 조선행은 연변축구사에서의 첫 출국방문이었다.
20세기 20년대, 간도지구의 축구경기는 현대축구의 륜곽은 있었지만 첫시작에 불과했다. 이름난 선수들로는 《수캐》라는 별명으로 소문난 정수원과 《호랑이》라는 별명을 지닌 박주환이다.
1930년에 위 만주국 간도성축구팀이 나왔는데 대표인물은 최동현, 강학윤, 최세홍, 황동수, 리길덕, 김춘식, 정수일, 최창선, 박경민, 박광춘, 박동규, 김응호 등이었다.
간도의 축구시설을 보면 용정에 운동장이 16개가 있었고 화룡에 10개, 도문에 5개, 왕청에 5개, 훈춘에 3개, 안도에 12개. 연길에 2개가 있었다.
1932년 10월, 간도체육회에서는 용정시민체육장에서 제1차축구대회를 소집하였으며 천도학생대표팀을 포함하여 5개 축구팀이 출전하였다. 10월 15일에는 용정체육회에서 중소학교축구경기를 주최하였다.
사진1-09-09 위 간도성제1차축구대회 개막식(1932년 용정)
1935년 제1차위만주국도시체육대회와 1936년 7월 11일 제2차대회에서 조선건아들로 무어진 위간도성축구팀이 불패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1937년 8월 4일, 위 만주국도시축구대항경기(장춘) 에서 간도축구팀이 또 우승했다.
1938년 8월 위만주국중학생축구대회(장춘)에서 용정동흥중학교팀이 우승했으며 1939년 7월, 위만주국제2회중등전문학교축구대회(장춘)에서 연길국민고등학교 축구팀이 불패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1940년 제3회대회에서 용정광명중학교팀이 우승했다.
1937년 2월, 간도빙상운동대회에서 용정의 김장현씨가 500m 우승을, 은진중학교 오기섭씨가 1500m 우승을, 홍득록씨가 5000m 우승을, 오기삽씨가 1만m 우승을 따냈다.
1940년 2월, 길림성빙상운동대회에서 이철호씨가 5000m 우승을, 지원백씨가 500m 2등을 하였다. 같은해 7월, 용정광명중학교축구팀은 위만주국체육대회 축구 경기에 출전하여 불패의 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다.
1941년 6월, 위만주국도시대항체육대회 축구경기가 봉천천대전체육장에서 진행였는데 조선건아들로 구성된 간도축구팀은 불패의 기록으로 또 한번 우승을 기록했다.
1942년 7월, 위만주국은 신경에서 선수권대회를 열고 일반부와 중학부로 나누어 축구경기를 벌리였다. 중학부 경기에서 용정 은진중학교팀이 우승을 하였다.
20세기 30년대 간도에서 활약한 축구명장들은 많았다.
최동현은 1917년 연길 와룡동에서 출생, 1933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시 공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거기에서 체계적인 축구훈련을 전수 받았다. 연길서 축구팀선수로 활약했으며 1935년부터는 간도성축구팀에 뽑혀 위만주국도시대항경기에 참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연길시축구팀을 대표하여 제3차연변체육대회에 참가하여 연길시팀이 우승을 따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50년대에 이르러 축구선수생애를 마쳤다. 1951년에는 중화체육총회 연변분회위원으로 있었다.
정수일과 김응호는 1938년에 만주국축구팀선수로 일본 명치신궁대회에 참가했으며 이치호와 박돌은 1939년에 만주국축구팀선수로 선발되여 일만대항체육대회에 참가하였다. 1940년, 최승준, 김상은, 윤성창, 리석용, 김병호 ,류시민이 만주국축구팀선수로 선발되여 일본제3차국민체육대회에 참가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일제투항 3주년 되는 날에 간도제1기운동회가 연길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그후부터 1955년까지 해마다 한번씩 연변에서 종합체육운동회가 거행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