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수기공모 장려상] 소원
김명- 천파주시 금촌동
다섯 시 반 알람소리가 귀찮게 일어나라고 한다. 내 나이 54살 벌써 한국에 온지 5년이 되었다. 매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인력사무소로 향하는데 오늘은 또 일이 있을까?.
5년 전 딸이 한국으로 시집오면서 나는 딸의 초청비자를 받고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막상 한국에 왔지만은 내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잠시 딸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매일 딸 집에서 한숨만 나왔었다. . 평생 농사일만하고 별 기술재주도 없었던 나는 그냥 중국 토박이로 살아 보려 했었다.
7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나 홀로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여유로운 삶을 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끝내 암 투병 끝에 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 너무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좀처럼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몇 일후 나는 고향 지인의 소개로 방을 구했다. 보증금 없는 방 한달 월세 10만원 전기세 수도세 포함이 되었다. 방은 좁지만은 여기서 시작을 해야 하겠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고향 지인이랑 처음으로 인력사무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장님은 나를 쳐다보면서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떨린 목소리로 ‘’중국‘’ 이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나가 보세요’‘ 나는 떨린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너무 긴장했다. 다행이 동행하는 두 명이 있어서 천만다행으로 그렇게 한국에서의 첫 버스 경험이 시작됐다. 첫날은 아파트 공사 현장 이였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다. 비록 가끔 말 알아듣지 못해서 좀 긴장했지만 그래도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어떤 분이 오시더니 ‘’아저씨 일 똑바로 하세요. 여기는 중국이랑 많이 틀려요, 한국말은 알아들어요?“ 나는 겁이 잔득 났었다. 갑자기 너무 당황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가난했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이를 꽉 물고 하루하루 버텨왔다. 그냥 이대로 돌아 갈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일을 했지만은 적응하기 너무 힘이 들었다. 가끔 버스를 타면서 집 정거장을 지난 적도 많았다. 헤메다 딸에게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불빛조차 없고 굳게 닫은 자물쇠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나는 한국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다섯 시 반 기상하였다. 대충 세수를 하고 일터로 향했다. 아침밥은 나한테 너무 호화스러운 일이었다. 매일 아침에 현장에 도착하면 안전교육을 받았다. 사람들이 항상 내가 한 일을 비웃었지만 나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힘든 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비 맞고 온 몸이 다 젖은 적도 있었다. 안전화에 빗물이 스며들어 발이 퉁퉁 부은 적도 있었다.
얼마 후에 외손녀딸이 찾아왔었다. 한 달 사이에 너무 많이 컸다. 포동포동한 얼굴 동그란 눈 너무 예뻤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외손녀 딸 에게 용돈을 주었다. 순간 내 코끝이 짠하였다. 한 달 두 달을 지내다보니 어느새 일이 익숙해졌고 너무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2005년 8월의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였다. 너무 기쁘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들떴다. 한편으로는 대학은 붙었지만 대학등록금 수많은 짐 고스란히 나의 어깨에 실렸다. 아내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아내는 그토록 아들이 대학 입학하기를 바랬었다. 나는 그 때부터 다짐했다. 열심히 해야 할 것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는 무조건 인력사무소 앞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수많은 땀방울 끝에 아들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아들의 졸업식을 참석하기 위해 나는 몇 년 만에 고향땅을 밟게 되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몇 년 사이에 아들이 이미 훤칠한 청년으로 자랐다. 힘들고 외로웠지만 자기 스스로 대학공부를 해낸 아들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2009년 6월 3일 그토록 미루었던 딸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시청에서 주최하는 합동결혼식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이 너무 예뻤다. 그동안 딸에게 못해준 것이 너무 많았다. 순간 나의 마음이 짠하였다. 딸의 행복한 모습이 나에게도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나의 소원도 역시 이루어 졌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일자리가 너무 많이 사라졌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나한테도 너무 큰 타격이었다. 포기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는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한국 경제가 좋아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서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한국의 봄은 너무 아름다웠다. 개나리도 어느새 활짝 피었다.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알람소리가 울렸다. 안전화를 신고 터벅터벅 인력사무소 앞에서 기다렸다. 소장님은 제일 처음으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도 역시 나는 그 다음의 소원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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