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금상]사랑은, 사랑을 불러 온다

[선양한국총영사관] 한중미담사례작문대회 중국인 금상- 함혜선

2010-06-09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인생은 공부다. 가는 곳 마다 달라지는 공부요, 만나는 사람마다 달리 받게 되는 공부이다. 서울에 왔으니 서울공부는 더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공부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날, 나는 2호선 전철을 타고 학동역에서 내렸었다. 출구를 빠져나오니 사람을 당장이라도 구워버릴 듯한 한여름의 불볕이 온몸을 굽는 것 같다. 사장님의 전화 안내를 따라 약 15분 걸었더니 e-바다횟집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내가 몸담고 뛰어야 할 가게이다.

나는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의 아니게 식당 몇 곳을 옮기면서 전전긍긍했으나, 횟집서빙은 처음이었다. 중국 연변 모 시(市)에서 교편생활을 해오던 나는 조선족학생 내원이 고갈되고 민족학교들이 하나둘 문을 닫자 부득이 학교를 떠나게 됐었다. 다행히 친척초청으로 서울에 오게 됐으나 식당일이 숙맥이다 보니 서러움 받을 때가 많았다. "저것도 못하면서 어떻게 서빙하지?"하고 곁에서 눈치를 준다. 힘들어 허리를 빌빌 꼬면 측은해 하는 것보다는, "삼십대 후반, 아직도 시퍼런 나이에 머가 힘들어 저러고 있누?"하고 뒤에서 수군수군, 아니꼬운 눈초리가 싸늘하다. 그렇다고 나는 자기가 교사했다고 말은 못한다. 그냥 참고, 웃으면서, 뒤틀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열심히 뛰고 뛰었다. 자다가 별의별 잠꼬대를 하다가도, 알람 벨이 울리면 깜작 놀라 깨어나서 또 출근을 했다. 나는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게 내가 걸어야 할 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뜨고 지는 해가 나를 이런 일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말자. 먼저 내 몸이 일판에 굳어지고, 내 마음이 스스로 낮아져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밑바닥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 가게 일을 해 보자. 나는 과거 교정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싫었고, 그래서 낯선 고장 낯선 일터에서 스스로 일어서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인생 공부한다 치고, 참다운 서울공부, "자본주의 공부"를 해보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 식구들인 듯 이모님들이 걸상에 걸터앉아 얘기를 나누며 일 차림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있는 중인 듯했다. 

  “이모님들, 안녕하세요. 전 오늘부터 홀서빙으로 온 윤아라고 해요."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착각일까, 다들 이웃집 강아지 보듯 비웃음 띤 얼굴로 건성 응부해왔었다. 사장님은 아직 출근 전인 듯 보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편하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하고 나는 게의치 않게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는 점심장사준비에 바삐 움직였다. 묻고, 눈치 보고, 그나마 대충 응부할 수 있었다. 연세 많은 주방 큰 이모가 이것저것 시키며 알려 주었다. 그나마 이틀간 인터넷 찾아 용어를 익히고 서빙요령을 배워 둔 것이 영험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분명 홀서빙 언니가 둘이라고 했었는데?…오전 열한시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근심이 생겼다.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일일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당황해 난 것이다. 주방이모님들한테 물어보고 싶었으나 체크하듯 먼저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마침 한껏 차려입은 홀서빙 언니가 가게 나타났다. "장사준비 다 됐어요?"하고 턱을 잔뜩 쳐들고 눈을 아래로 내리 깐 채 싸늘한 바람을 풍기며 나한테 물어왔었다. 30대 후반의 홀팀장 경자언니였다. 정말 안하무인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출근 한 사람한테 아침 장사이며 저녁장사 준비는 어떻게 하고, 이 가게 메뉴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떤 특성이 있으며, 가격대는 어떻다는 등등 상황을 여러 가지 알려주기는커녕 단마디명창 준비상황부터 물으니 말이다. 짬깐, 아마도 내 입이 하마처럼 벌려졌으리라. 홀팀장을 보면 내가 써내려가야 할 숙제가 보였다. 내가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저렇게 잘난 척 하는 사람과, "서울깍쨍이"이란 말의 본토에서 어떻게 함께 화평하게 보낼 수 있을까?, 였다. 사장님이나 팀장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며, 매끄럽지 못한 일손 때문에 스스로 화를 내며, 그렇게 보낼 시간들이 정말 싫은 나였다. 무엇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가야 할지는, 정말 풀기 어려운  나의 숙제이기도 했다.  

그래도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한 쪽에서 참으니 그럭저럭 별탈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느낌이었다. 

가만 보면, 나는 몇날 며칠을 팽이처럼 돌았고, 팀장은 팀장대로 아주 여유 있는 자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속이 뒤집어져도 방법이 없었다. 누가 동포했나? 누가 여기 와서 이런 일 하라고 했나? 누가 재수 없이 저런 팀장을 만나라 했나?…그게 바로 나의 운명이고 바다 건너온 우리 동포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참을 인자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는데, 참자!- 이렇게 나는 자기 위안을 했다.

어느 날, 내가 한창 땀을 뚝뚝 흘리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여태 청소를 끝내지 못하고 뭐했어요?”하는 팀장의 노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했다니?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나의 심장이며 속에서 뭔가 활활 불태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 받은 머리가 부풀고 또 부풀어서, 풍선처럼 되다가 기어코 뻥 터지고야 말 것 같았다. 잘잘못을 떠나 말 하는 꼬락서니가 하인 부리듯 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봐요 팀장님, 아시겠지만, 할 일이 오죽 많아야죠! 날마다 몇 시에 출근하면서 지금 누구한테 야단치는 거나요? 언제 한번 출근시간 맞춰 제때에 출근한 적이 있나요?”하고 나는 짐짓 핀잔을 했다. 방귀 뀐 놈이 방귀야, 한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성내지 않고 차분히 깔아서 말을 했다.

그런데 팀장은 "언니하고 내가 어떻게 같아요?”하고 질문한다. 높으신 분이란다. 

“팀장님이라면, 직원보다 먼저 출근하셔서 할 일들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있게 체크해야 할 게 아닌가요? 가게는 그저 돌아가나요?”하고 내가 추궁했다.
“허, 이 언니 봐, 지금, 언니가 나를 교육하고 있어요?”하고 발끈 성을 낸다. 

나의 발밑에서는 금방 살얼음이 뿌득뿌득 깨졌다. “그니까 왜 참는 사람을 건드려요? 여직 상황이 눈에 안보여요? 둘이 할 일을 혼자 하니까 개미 채 바퀴 돌 듯 돌아도 시간이 모자라는 거잖아요?”하고 부지불식간 나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아는가, 고 묻고 있었고 상대가 정말 혼자서 해내느라 힘들었겠다고 미안해하고 이해해주길 바랐던 거다. 불만도 컸겠지만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함께 하는 날이 있겠지, 하고 믿고 있던 나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팀장이었다.

“일하기 싫으면 당장 그만둬요! 중국으로 돌아가요!” 하고 팀장은 아예 자기가 사장이기나 한 듯 축출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가란 말이 죽으란 말보다 서럽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찾아온 고국인데? 니가 먼데 나더러 중국으로 가라 어쩌라 할 수 있어? 대한민국이 니네 나라라고?…나는 경주 D시골에 모셔진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일찍 그곳에서 세상을 떴고, 할머니는 중국서 항일하다 대흥령(大興安岺)산자락에 묻혔으며, 아버지는 남조선특무로 몰려 문화혁명 때 조상의 땅도 밟아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감옥에서 세상을 떴었다. 그러고 보면 뿌리가 이곳에 있고, 어느 정도 우리 가문도 항일투사의 가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나더러 가라, 어쩌라 한단 말인가!?…나의 눈에서는 저도 몰래 눈물이 쿡 솟아났다. 

경자팀장이 카운터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껏 으스대는 꼴이 시야에 들어왔다.   “쳇, 동포들은 저래서 문제야. 상하도 모르고, 배우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크게 나무랄 수도 없고!"하고 비하하듯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가관이다. “언니, 커피 한잔 주세요.”하고 꼴사납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래, 이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경험해보자! 나는 로봇처럼 커피 한잔을 타서 공수해서 바쳤다. 속이 뒤집어졌지만, 가슴에 쓰나미 경고가 울리고 있었지만, 나는 참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언니, 커피가 너무 진해요. 물을 좀 더 타서 주세요.”하고 잔을 되 물린다. 

나는 자기가 웃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 아가씨 사람 죽이네!…혈압이 급상승해서 눈에서 불똥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용케 참고 살짝 웃었다. "그래요? 미안해요, 그럼 물 더 타야지요!"하고 나는 비겁하게 자세를 낮췄다.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는 자기가 한없이 가여워 보였다. 

이때 주방에서 큰 이모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퍼런 칼을 든 채 허겁지겁 나왔다. 둘 사이를 무마하려는 듯 짐짓 나한테 눈을 찔끔거리며, “엉? 얘들이 일 할 시간에 왜 이래? 영업도 시작하기 전에 가게 마스겠다. 둘 사이 해결 볼 일이 있으면 영업이 끝난 후에 바!”하고 나더러 참으라고, 네 맘 다 안다며, 암시를 했다. 

주방의 작은 이모도 웃는 낯에 근심 가득 찬 물 한 컵을 내밀었다. 큰 이모와 작은 이모가 그러자 나는 목이 멨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할아버지의 고향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좀 더 잘살아보자고 한국행을 택한 자신이 서럽기만 했다. 방문취업으로 홀서빙만 하고 있는 자기가 딱하기만 했다. 우리 동포들에게 혜택을 베푼 "방문취업제"는 이렇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것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처럼, 또는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한 것처럼, 우리 동포 일꾼들을 21세기 국제통용화시대 3D업종의 로봇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참고, 또 참고, 눈과 귀와 입을 막고, 꾸역꾸역 일만 하는 것이 미덕인줄 알게 가르쳐 가고 있었다. 

이때 주방에서 큰 이모가 불렀다. “막내야, 이리 와라”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재촉을 한다. 

틀림없이 신선한 회 한 점이 내 입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자, 제비처럼 입 벌려. 아-”하고, 그냥 따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작은 이모도 옆에서 입을 오물거리며 해시시 웃었다. 작은 이모의 위안에서도 벌써 해삼이 헤염 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주방이모들을 좋아하나 보다. 큰 이모는 항상 이렇게 집 떠나 먼 곳에 와서 고생한다며 작은 이모와 함께 슬그머니 나를 챙겨주신다. 큰 이모가 휴식 날에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땐 밀차 식 가방 안에는 큰 꾸러미, 작은 꾸러미가 가득하다.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집에서 장만한 먹거리들을 올망졸망 꺼내놓는다. 고향집 어머님 같으신 분이시다. 큰 이모는 가게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언제나 “동생아, 막내야,” 하고 부르신다. 그러면 나는 작은 이모랑 신을 신지 않은 채, 친청 엄마 마중 가듯 허둥대며 반갑게 일어선다.

나는 큰 이모의 친절에 기어코 눈물을 쏟고야 만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상처 받은 가슴을 사랑으로 치유해 줄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 마음이 나는 고마워, 또 그 마음을 배우고자 나는 이 가게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익은 노인 한분이 식사하러 찾아왔었다. 여러 번 가게를 찾아온 적이 있고, 그때마다 나는 깍듯이 대접을 해드렸었다. 그 분은 자기가 성은 심씨라고 하면서, 바다 건너 먼 중국에 와서 고생 참 많이 한다면서, 올 때마다 나 손을 한 번씩 잡아주셨다. 주름투성이 바싹 마른 손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어머님, 그간 건강히 지내셨죠?”하고 나도 반색을 했다. 

“아이쿠, 언니는 올 때마다 언제나 이렇게 친절하고 사근사근하셔.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정말 자주 오고 싶어요. 우리 딸년보다 백배 낫다니깐! 그놈 딸년이 잘 지내나, 이 어미가 쩔룩거리면서 와 보지 않으면 낯짝도 볼 수 없다니까. 자식이 참 웬수지, 웬수여!…그래도 이 언니 보면 속이 풀려요!”하고 잡은 손을 놓을 줄 모른다. 

올해 일흔 일곱인 이 노인이 바로 나에게 미움을 보여준 경자팀장의 어머니란 것을 나는 후에야 알았다. 그런데 나는 왜서 이 노인을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푸근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나는 가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 대접했다. 노인이 이제 살면 몇 해를 더 사시랴. 경자팀장하고 좋지 않았던 일을 그 어머니와 분풀이 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또 손을 잡으며, 경자팀장 말을 꺼낸다. 우리 경자 년이 노엽게 굴 때가 많을 거니 양해해라, 경자가 워낙 성질이 까칠하나 마음이 나쁜 건 아니니, 밉게 놀면 이 에미가 혼을 내줄테니 알려 달라. 내가 자식교육 잘하지 못한 거니 내가 책임져야지!, 하고 넋두리 삼아 말하신다.     

노인이 식사 끝난 후였다. “어이쿠-!”하고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컵을 씻고 있는 사이 밖에 있는 화장실로 가느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던 노인이 고목나무 쓰러지듯 쿵 넘어졌던 것이다. 
나는 깜작 놀라 달려가 노인을 부축했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노인은 많이 다치셨는지 일어서지를 못하시고 끙끙 앓는 소리만 내셨다. 발목을 보니 퉁퉁 부어올랐었다. 그냥 모른 척 방치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주방이모들한테 허락을 받고 체구가 작달막한 노인을 업고 대로변까지 겨우 걸어갔다. 가까스로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모셨다. 그때까지 경자팀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잠깐 신나게 술을 마이며 놀고 있을 터였다. "싸가지 없는 년!…"하고 나는 부지중 그런 말을 가만히 내뱉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경자언니가 나한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 어제 너무 고마웠어요.”하고, 초풍기절 할 만큼 친절을 베푸신다.

"어? 먼 인사지?…이제 보니 인사 잘하시네." 하는 말을 내뱉을 번했다. 저번 일이 있은 후로, 서로가 오래 동안 투명인간처럼 지내왔던 터라, 나는 인사말 받기도 거북스러웠고 부자연스러웠었다. 속에 응어리 꽁꽁 맺힌 사연들이 많았기에 나는  좋다 궂다, 대꾸를 하지 않았다. 팀장도 머쓱했던지 뒷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로부터 경자팀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때론 커피를 내 앞에 말없이 슬그머니 갖다 놓을 때도 있었고, 내 눈치를 살피며 바닥을 쓸 때도 있었으며, 술병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기도 하였다. 사람은 정말 살고 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내 속이 너무 옹졸한 게 아닐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털은 위에서 내리 쓴다고, 내가 낫살이나 있어갖고 동생 같은 애한테 너무 쪼잔 하게 구는 게 아닐까!?…나는 정말 경자팀장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고, 그러던 어느 시퍼런 대낮에, 나는 웬 낯모를 손님한테 느닷없이 욕을 먹고 있었다. 이런 욕이 한두 번 아니지만, 그래도 참기 어려웠다.   

“이게 구이라고? 언닌, 한국인인가 했더니 중국 사람이구나! 구이도 모르고 튀김도 모르는 거 보니!…중국에는 가재미구이도 없고 가재미튀김도 없나봐! 구분 못하는 거 보니까. 흐흐.”하고, 틀림없는 인격 모욕이었다.

“오빠, 제가 오지리날 한국인이구 오리지날 서울사람인데, 이건 확실히 저희 가게에선 가재미구이가 맞거든요. 근데요, 왠 인격모욕을 하세요? 그렇게 얘기하시는 건 아니잖아요?”하고 어느 사이 경자팀장이 내 뒤에서 편을 들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심을 하고 편을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곁에 같이 앉았던 두 손님이 박수를 쳤다. 언니 짱, 을 외쳤다. 제 친구가 너무 했다고 핀잔을 주면서.“솔직히 중국 동포들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인데, 그런 인격 모욕을 하면 안 돼지, 언니 용서해줘요.”하고 미안해 했다.

곁에 점잖은 타입의 사내는 짐짓 친구의 어깨를 쥐어박으며 “언니, 지구 어데 가나 저런 인간은 꼭 하나씩 있어요. 난 언니를 우리 동포라 생각하구, 같은 한국인이라 보니까 이 친구와는 신경 꺼요!”하고 말했다.

주위 손님들은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며 나에게 응원을 보냈다. 나에게 설음 받지 말라고, 당신은 우리 동포가 맞다고, 우리 독립투사들의 후손이라며, 어깨에 힘을 실어주었다. 거의가 우리 가게를 자주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이었다.

 이에 경자팀장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사장님, 이 언닌, 제 친언니거든요! 이젠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한다.나는 그만 코끝이 찡 저려왔다.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얼른 돌아섰다. 자기 잘못을 고치려고 가까이 다가서려고 애쓰는 경자팀장한테 곁을 주지 않았던 자기를, 친언니처럼 대하려고 애쓰는 경자팀장을 마냥 투명인간 취급을 해오던 속이 좁은 자기의 낯선 얼굴을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 정은 통하기 마련이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오고 변화를 바라고 온 나 자신이 외려 투명인간 같아 보였다. 나는 정말 옹졸한 자기가 싫었다.  

그날부터 우리 가게는 경쾌한 멜로디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자야, 내일 예약 팀이 몇 시지?
네 언니, 8시에요. 언니, 이거 맛있어요. 맛봐요!
큰 이모, 냉커피에요. 작은 이모, 이건 따뜻한 커피구요, 언니는, 블랙커피구요!
우리 경자는 아이스크림이지?…
호호, 이번 주말엔 어디로 산보 갈까? 
대부도로 신나게 여행가요.
좋-아, 좋았어!  
저기 앉은 손님이 뭐라는지 아세요? 한집 식구끼리 하는 가겐가 물어봐요. 생김새가 비슷하다며, 서로 어딘가 닮았다며.
그래서 뭐라 대답했는데?
당연히 한집 식구가 하는 가게가 맞잖아요!
그래그래, 정답이다. 그게 명답이다!
 …… 

나는 힘든 일도 이토록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너무 즐거워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고,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즐거우니 매일매일 신나기만 했다. 언젠가 방문취업 3년 체류기한이 만료되어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온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그래도 나는 인생 공부를 너무 잘한 것 같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의 마음은 언제든 통하게 되어 있고, 스스로 통하려고 애쓰면 기필코 통해지기 마련이다. 그전에 진정이 담긴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억울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참인간을 보여주면 꼭 감동이 따라 올 것이다. 인간은 그래서 인간이다. 고국은 그래서 더 정이 가고 피맥이 닿는 우리 조상의 나라이다.

나는 자기가 더 발전적인 직업을 선택하기 전에, 이 가게에서 즐거운 사람들과 즐거운 나날을 마음껏 보내자고 속다짐했다. 그러면 뒷 끝에 후회가 없을 거고, 자기의 인생의 앞일들도 슬슬 풀려나갈 것만 같았다. 사랑은, 사랑을 불러오고 사랑하면서 사는 인생은 너무 알차고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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