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수기 공모 우수작]눈물 끝에 웃음

- 글 유비

2010-05-25     [편집]본지 기자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백사장과 해안선, 부드럽게 출렁이는 바닷 물결과 그 위를 날아가는 갈매기들... 그리고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깜빡이고 나의 가슴은 탁 트인다. 바다가 왜 파란색인지 아시나요? 왜냐하면 하늘이 바다를 사랑하에 하늘의 파란색을 닮은 것이다.

나는 신발을 벗고 해변으로 뛰어갔다. 이 장면은 바로 한국동해의 모습이다.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도착한 이곳은 이처럼 너무나도 평안하다. 지금 나의 귓가에는 오로지 “철썩~ 철썩~”하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마음과 바다가 맞닿아 있으면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고, 마음과 하늘도 맞닿아 있으면 마음이 하늘 처럼 순수해 진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파도를 베게 삼아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꿈속에서 난 3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3년 전 나의 고향...너무나도 추운겨울, 그리고 중국의 장춘공항... 나의 앞에 서계신 어머니는 너무 많이 우셔서 눈이 빨갛게 되어 있었고 옆에 계신 아버지도 두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여 있었다. 딸과 헤어 지는게 너무나도 서운하신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 밝은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저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건강하게 잘 지낼께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나는 부모님께 손을 흔들며 큰 여행가방을 끌고 비행기 대합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참으려고 했지만 비가 오는 것처럼 계속 눈물이 쏟아져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뒤에 계신 부모님께서 나에게 신신당부 하시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지만 나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의 마음은 다 똑같다. 어떤 부모님도 항상 곁에 두던 자녀와 쉽게 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장면, 바로 이 때의 기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날 키워준 부모님과 고향의 땅을 떠나왔다. 내 마음속은 동경심과 기대심으로 부풀어 있었고 신기함과 새로움을 가득안고 한국에 도착했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한국은 완전히 새로운, 낯선 국가이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낯선 환경, 낯선 풍습들... 낯설음...

왜냐하면 나는 한국인 친구가 한명도 없었고, 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낯설음이 처음에는 무서움으로 느껴졌고 또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서 한국인 친구를 만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컴퓨터로 중국에 있는 나의 친한 친구들과 자주 인터넷으로 대화를 하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의 마음이 변화하게 되었다. 인터넷상에서는 정말로 마음을 터놓고 진실 된 이야기를 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타국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는 나를 이해해 줄 친구가 없는 것이었다. 매번 형식적인 안부와 잡담만을 주고 받다보니 나는 점점 더 모든 것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졌다.

조용한 어느 날 밤, 나는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서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조용히 슬픈 음악을 들으니 마음속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그저 조용한 밤 하늘 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이국타향에서 나의 방황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힘들었다. 만약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따뜻한 우리집과 내 침대가 있는 고향에 도착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계속해서 그리워 하다 보니 나의 방황과 그리움은 날이 갈 수록 더해져만 갔다.

해질 무렵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그 집에 불이 켜졌다. 그 불빛이 너무나도 따뜻해 보였다. 나는 ‘부럽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평범함’ 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너무나 쉬운 단어이지만 가족끼리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집안 청소를 하며,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따뜻한 생활속의 ‘평범함’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 또한 예전에 이러한 생활을 했었지만 지금은 누릴 수 없는 ‘평범함’ 인 것이다.

갑자기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그 번호를 눌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속에서는 너무나 너무나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리고 너무나 슬프게 울어버렸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서 “저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건강하게 잘 지낼께요 걱정마세요” 라고 말하며 부모님을 안심시켰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에서의 초기생활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국가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중국어 학원 선생님이다. 한국에 와서 첫 번째 수업을 하던 날 나는 긴장과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첫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내 머릿속은 온통 수업을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생각과 그리고 첫인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날 좋아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 교실을 잘못 들어가고 말았다. 마음은 급하고 교실을 찾아 한참을 헤매다보니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결국 나는 어색한 미소를 띤 얼굴로 학생들에게 인사를 첫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학생들을 살펴보니 학생들 모두가 정말 너무 진지하게 나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종종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혼잣말로 “응 , 그래 맞아” 그리곤 필기를 하곤 했다. 학생들의 눈빛 속에서 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느껴졌고 또 학생들의 따뜻한 미소 속에는 너무나 큰 격려가 담겨 있었다. 나는 곧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고 수업시간은 매우 순조로웠다. 학생들과 나의 웃음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고 모두들 즐거워 했다.수업이 끝날 때 다들 만족하는 표정이었고 또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학생여러분들도 모두 수고했어요 파이팅!”

그리곤 다 같이 하하하 웃었다. 유쾌했던 나의 첫 번째 수업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중국어학원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에 같은 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고 신분차이(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주부,회사원 등)도 매우 다양한 각양각색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다.

매우 인상 깊고도 재밌었던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중학생의 책가방 이었다. 어느 날 나의 학생이 엄청 큰 여행배낭 같은 가방을 메고 학원에 왔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엄마아빠랑 여행가니?” 하고 물었고 그 학생은 “선생님 이거 제 책가방 인데요”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반 모든 학생들이 웃었고 나도 웃었다. 나는 한국 학생들이 학교수업 이외에도 학원을 몇 개씩 여러개 다닌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많게는 여섯 개를 다니는 학생도 있다고 들었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가방이 컸구나’ 한국학생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다음은 회사원 학생 이야기 이다. 회사원은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어떤날은 밤늦게 까지 야근을 하기 때문에 주로 아침시간을 이용해서 수업을 듣는다. 나의 첫 수업시간인 아침 6시 50분에 회사원들이 많다. 언젠가 한 번 물어봤다. “어제 몇시에 주무셨어요?” 그러면 보통 다들 12시 전후라고 대답을 한다. 그렇다면 보통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밖에 못자고 아침 일찍 수업듣고 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생활하는 것 같았다. 불과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경제와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이유를 바로 그들의 몸과 정신, 생활 속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사실 한국은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학생들이 언제나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절의 굉장히 중요시 하며 나를 선생님이라고 매우 존중해 주었다.

학생들은 종종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을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먼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먼저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학생들에게 새로운 단어와, 어법, 문장형태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친다면 내가 가르치는 이 언어로 각자의 사상과 사랑을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반드시 공평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학생들에게 조롱과 단정하지 못한 언행을 피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찬 행동을 해야 한다” 이 말과 같이 학생들에게 대했을때 비로소 학생이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유명한 교수님도 또 학교 선생님도 아닌 그저 중국어학원 선생님일 뿐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의 수업시간에 이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한국학생들도 나의 이러한 마음을 조금은 알아 주는 것 같아서 매우 기분이 좋다.

나이가 어린 학생이든지 나이가 많은 학생이든지 나의 수업을 갈수록 좋아해주는 것 같아서 너무 기쁘다. 학생들은 나와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나 또한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매달 말에 수업이 종강할 때 쯤 우리는 같이 회식을 한다. 학생들이 말하길 책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는 의미의 회식 이라며 ‘책거리’ 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때에는 학생들이 나를 데리고 등산도 가고, 여행도 간다. 그리고 맛있는 한국음식점이 있으면 나를 데려가서 소개도 시켜준다. 그리고 종종 “선생님 선생님 너무 이뻐요 선생님 너무 좋아요” 라는 말을 자주 해준다. 매번 들을 때마다 나에겐 너무나 큰 감동이고 나 또한 학생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처음엔 너무나 생소했던 한국 그리고 한국생활이 이렇게 매번 학생들의 도움과 따뜻한 마음을 통해 하루하루 지날수록 익숙해져 갔다. 남 모르는 나의 눈물은 점점 줄어서 사라지게 되었고 웃음과 행복한 마음이 넘쳐 흐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기쁜 일은 나의 학생들이 중국어 실력이 발전할 때 이다. 매번 수업할 때마다 자꾸 틀리던 발음들이 어느 순간 매우 정확한 발음으로 내 귀에 들려왔을 때, 또 내가 빠른 속도로 말을 했는데도 의외로 다 듣고 이해하고 있을 때 그 때의 그 흥분감과 기쁨, 그리고 성취감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 이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비로써 내 존재의 의의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그 때의 나의 느낌을 ‘행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수업하면서 쌓인 피로와 고통을 모두 날려버릴 수가 있다.

나는 매일 같이 한국 학생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한국의 정신을 배워가고 있다. 나또한 한국에 와서 중국어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통해 중국의 언어 뿐만 아니라 문화와 역사 그리고 중국의 정신까지도 소개하고 있는 개인 외교관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중국어선생님 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처음에는 큰 자부심이 없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또 학생들을 많이 양성할 수록, 더 많이 한국을 알아갈수록 나의 선택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 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걸어가야 하고 미래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앞을 보고 성실히 생활하고, 노력한다면 고향을 그리워하던 예전의 연약한 마음이 굳세 질 것이다. ‘유성’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한 순간에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마는 그런 존재이다. 사람의 인생이 유성과 같다고 생각한다. 유성이 떨어지는 속도처럼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유성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생활하는 것에 달려 있다. 자신의 삶은 하늘도 정하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 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삶을 이 곳 한국에서 새롭게 펼쳐나가 보고 싶다. 해변에는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지금 나의 귓가에는 오로지 “철썩~ 철썩~”하는 파도소리만 들릴 뿐이다. 오늘 밤에는 내 마음과 파도가 같이 잠들었던 것 같다. 파도를 베게 삼아 잠들었던 나의 꿈 속에서 나는 두 팔을 뻗어 나의 미래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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