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
[김정룡 칼럼리스트가 바라보는 중국동포사회]
[본문은 연변여성(2010.5)에 실린 것을 아래와 같은 순서로 4기에 나누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현재 조선족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남아프리카나 브라질에까지 세계 각국에 진출해있다. 정확한 통계수자는 없지만 한국에만 40만 명, 미국과 일본에 각각 5만여 명, 기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까지 합치면 대략 60여만 명의 조선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만이 조금 안 되는 조선족이 60여만 명이나 해외에 진출했으니 이는 실로 굉장한 수치이다. 또 청도에만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니 중국 관내에 널려있는 조선족을 합치면 어림잡아 40여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내 조선족인구류동특징을 살펴보면 본래 주로 농경민으로 살아오던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아 상업민으로 전락한 것이며 따라서 조선족의 인구 대유동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 곧바로 한국이다.
청도의 실례를 보면 개혁개방 전에는 3,000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인관광객이 늘면서 조선족이 여행업에 따른 음식점과 유흥업소를 운영하게 되였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기업이 청도에 많이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이 급속히 모여들었다. 한국기업이 많이 생기면 회사 내 여러 부서에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의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따라서 한국인학교가 생겨나게 되여 조선족의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였다. 10여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생활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는데 필요한 여러 업종에 역시 조선족이 많이 종사하고 있어 현재 10여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유동 중에 있는 조선족들의 운명은 각이하다. 필자의 사촌형은 리비아에 진출해 3년, 조선 금강산에서 현대 관광버스기사로 3년 있으면서 조금 모았다. 그 돈을 광서 북해 다단계판매에 다 밀어 넣는 바람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딸애가 서안교통대학을 졸업하고 광주 도요타회사에 근무하여 번 돈으로 아빠에게 42인승 버스를 사주었기에 청도 한국인학교에서 한국아이들의 등교와 퇴교를 책임지고 학교경비까지 맡아 8,000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또 형수가 학교 구내식당에 근무하면서 부부 노임을 합치면 만원이 넘어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만약 한국인의 중국진출이 없었다면 사촌형부부는 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필자의 친구인 곽씨는 사진작가였는데 1990년대 초반에 백두산천지사진을 한국인관광객에게 팔고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일찍 눈을 떠 연길에서 초창기에 노래방을 꾸려 번 돈을 갖고 1990년대 중반에 청도에 진출해 현재는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대형 음식점과 유흥업소를 꾸려 한다하는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대련, 위해, 연태, 상해, 북경, 천진, 광주 등 여러 도시들에서도 청도의 상황과 비슷하게 수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이 한국기업, 한국인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고향에서 농민출신과 도시 밑바닥에 있는 사람 혹은 잘 나가지 못하거나 관내진출이 어렵고 또 관내진출에서 실패를 맛보았거나 아무튼 이래저래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조선족들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대량으로 코리안드림에 나서게 되였다.
그때 한국에 온 조선족은 공무, 상무, 관광, 투자, 친척방문, 위장결혼, 밀입국, 여권 위조, 변조 등 수단으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절대다수가 불법체류에 속했다. 하도 불법체류자가 급증하여 한국법무부에서 2002년과 2003년에 합법화시켜주었고 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게 되여 신분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뒤 노무현정부가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동포자진귀국정책을 실시해 불법체류자를 대량 사면하였다. 당시 재입국을 둘러싸고 3년 체류를 허락하였다가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시일 내에는 입국 시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다 한국에서의 소비, 중국내 가족의 생활비를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으므로 2년을 더 연장해주면 불법체류하지 않고 돈을 벌어 고향에 갈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부에 청원하여 2007년 3월 4일부터 5년 비자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었다. 동시에 한국어시험을 거쳐 5년 비자 방문취업제도를 병행하면서 무연고조선족들도 선후로 코리안드림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였고 이래저래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4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관내에 진출하거나 해외에 나간 조선족(유학생을 제외함)의 일차적 목적은 돈벌이이다. 그들은 외지 혹은 해외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오순도순 유족하게 살아보려는 꿈을 안고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등지고 낯설고 물 선 곳으로 떠났다. 하지만 조선족인구유동이 생겨난 지 20여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살펴보면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몇 년간 돈을 벌어 연길시 신흥소학교부근에 설렁탕집을 꾸려 부자가 된 장씨 부부, 한국에서 번 돈으로 화룡시에서 양돈업을 크게 벌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박모 여인과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극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 왔다가 고향에 돌아간 조선족은 나이가 많아 일을 할 수 없거나 본래 고향에서 막노동을 해보지 않다가 한국에서 수년간 건설현장에서 강도 높은 막노동을 하여 병이 생겨 더는 일을 할 수 없어 돌아간 자, 공직에 복직하려고 돌아간 자, 불법체류 혹은 형사 범죄로 하여 강제송환 된 자들을 제외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이 속병이 없고 사지가 멀쩡한 조선족이 자진으로 고향에 돌아간 사례는 매우 드물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일에 지쳐 피곤하다고 돌아갔다가는 얼마 안 지나 또 재입국하려고 모지름을 쓴다. 불법체류 혹은 형사 범죄로 강제송환당한 자들도 입국규제 5년을 기다리거나 그 시간을 참지 못해 신분증을 위조해 또다시 한국행에 나서고 있다.
연길시 공원가의 한 다방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는 최모 여인(38세)은 6년 전 한국에서 3년간 체류하다가 불법단속에 걸려 강제송환 되였다. 지난 2009년 11월말 필자가 만났을 때 그녀는 “지난 8월에 5년 입국규제가 풀렸고 한국국적을 딴 언니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왜 남들처럼 이름을 바꿔 재입국에 서두르지 않고 5년을 기다렸는가고 물었더니 그녀는 “머리를 바꾸면 또 불법이라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를 일이고 그렇게 속이 두근거리면서 불안하게 보낼 거면 차라리 인내성 있게 5년을 기다렸다가 당당한 신분으로 한국에 체류하려고요.”라고 대답했다.
용정시 남씨(46세)는 1995년 밀입국으로 한국에 왔다가 1997년 6월 검거되어 강제송환 되였고 이름을 바꿔 가짜공무비자로 1999년 2월 간신히 재입국했는데 2001년 7월에 재차 단속에 걸려 쫓겨나자 2003년 8월 또 이름을 바꿔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여 현재까지 버티고 있다.
조선족은 왜 이토록 코리안드림에 열광하고 또 한국에 오면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불과 3년 전까지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들에서 조선족이 한국행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하게 돈벌이를 위해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합법화시키면서 3년에서 2년 더 연장해주었고 5년이면 돈을 벌어 중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추정해서 5년 방문취업제도를 마련하였다. 물론 조선족도 처음에는 한국에서 몇 년간 열심히 돈을 벌어갖고 고향에 돌아가 살겠다는 생각과 타산으로 한국에 왔다. 그런데 최근 3년 동안의 재한조선족의 동태를 살펴보면 한국체류가 단순한 돈벌이목적을 넘어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 근거로서 5년 이상(2005년과 2006년에 있은 동포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에 의해 혜택을 받은 조선족은 다수가 한국경력이 10년이 됨.) 한국에서 체류한 조선족은 다수가 중국의 대련, 청도, 연길 등지에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한국에서 본래 가리봉, 대림, 안산, 건국대입구 등 지역의 쪽방을 찾아 소박한 살림을 하던 데로부터 2~3년 사이 전세로 이동하고 월세라 해도 보증금 수천만 원(한화)에 월 20만원(한화)을 웃도는 쾌적한 집을 구해 여유롭게 지내고 있다. 일자리도 되도록 월급이 높은 직장을 선택하고 매달 4일씩 휴무가 있어야 하는 직장을 고르고 있으며 과거에는 휴일이 아까워 파출부로 뛰면서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하였으나 현재는 휴일이면 친구도 만나고 쇼핑도 하고 심지어 등산도 하고 헬스클럽에도 다니면서 여유롭게 살아가길 원하고 있다.
합법체류자들만 이런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 불법체류 당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도문시의 이모 여인(51세)은 1996년 6월에 한국에 왔으니 올해로 만 14년, 한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녀는 불법체류신분이면서도 강남에 5천만 원(한화) 보증금에 월세 25만원(한화)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가장집물도 구전하게 갖춰놓고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단속을 피하는 요령이 생겨 잡혀갈 걱정이 없고 또 기왕 한국에서 살 바엔 즐기고 살면서 뻗칠 때까지 뻗치는 것이고 잡히지만 않는다면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제3차 동포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이 있으면 갔다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비자신청기간이 1년이면 너무 길어 갈 생각이 없고 6개월 이내면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1년 비자신청기간에 중국에서 먹고 놀고 소비하는 돈이 적어도 천만 원(한화)이고 1년 동안 벌지 못한 것까지 따지면 앞뒤로 2천만 원(한화)을 손해 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고 마작에 손을 대면 얼마를 까먹을지 모른다. 이런 주먹구구 때문에 2006년에 있은 “제2차 동포자진귀국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이 많았다. 이모 여인이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대다수 조선족은 과거에는 과일을 사먹어도 인민폐와의 환율을 따지고 중국물가에 비하면서 손을 주춤하던 데로부터 최근에는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쩍하면 친척모임, 동창모임, 고향모임 등 여러 모임을 갖고 먹고 마시고 노래방까지 가서 마음껏 즐기고 있다. 실제로 대다수 재한조선족은 고향에 비해 현재 한국에 와있는 친척이나 동창들이 훨씬 더 많아 모임이 잦다. 또 방문취업제도에 의해 왕래가 자유로워짐에 따라 명절이면 중국에 가서 보내다가 오던 데로부터 지난 설에는 거꾸로 중국에 있는 자식들이 한국에 설 쇠러 오는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훈춘에서 온 원씨 부부는 설에 고향에 다녀오려고 항공티켓을 문의했더니 성수기라 왕복항공료가 1인당 100만원(한화) 가까이 되고 친인척들한테 줄 선물, 용돈, 명절소비까지 따져보니 적어도 500~600만원(한화)이 깨져야 하기에 아예 딸애를 한국에 오게 하여 설을 보내니 경제적이고 딸애가 한국구경을 하게 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 셈이라 매우 흡족해하고 있다.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재한조선족은 왜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소박한 삶에서 즐기는 삶을 보내면서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에서 10년 정도 체류한 조선족은 물론이고 3년쯤 머물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면 마땅히 할 일이 없고 가령 일자리를 찾아도 소득에 비해 소비지출이 더 많은 것이 문제일뿐만아니라 고향생활에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불편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안착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경제수입과 소비지출 문제
연변의 경우 음식점, 공장, 일반사무직, 가정부 등 직업에 종사하면 받는 월급이 천원(인민페) 정도이다. 연길시에서 생활하려면 난방비, 가스요금, 전기요금, 물세, 위생비 지출 및 먹고 사는 데만 매달 천원이 넘게 든다. 게다가 연변은 부조바람이 얼마나 성행하는지 매달 평균 수백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에 자식공부비용까지 합치면 매달 평균 2,500~3000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연길시의 경우 물가가 하늘을 치솟아 오르고 있어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가리봉 연길미식성 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지난 설에 중국에 있는 어머님이 친척들을 30명 집에 불러 모아 설을 쇠였는데 음식 장만에 쓴 비용만 2,000원이 들었다고 한다. 2,000원이면 보통시민의 두 달 월급이다. 두 달 월급수입을 설을 쇠는데 밀어 넣고 나면 나머지 생활이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2,000원이면 한화로 35만원이 된다. 한국에서 만약 30명이 집에 모여 음식을 해먹을 경우 35만원이면 먹고도 남는다. 한국과 중국의 수입격차를 따지고 또 양쪽 실제지출물가를 따져보면 연길의 경우 서울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싸다는 계산이 나온다.
쉽게 말해서 한국에서 한 달 벌어 용돈 남기고 중국에 생활비를 보내주고도 적금이 가능한데 비해 중국에서 한 달 벌어 적금은 고사하고 단순히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계산이다. 간단한 실례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조선족이 집을 맡아 소박한 살림이 가능할 정도의 가장집물과 전기기구를 사는데 한 달 월급이면 족하다. 이에 비해 연길의 경우 한 달 월급을 갖고 살림도구를 갖춘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실제사정이 이렇다보니 누가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기후문제
한국은 삼면이 바다를 끼고 있고 위도가 삼팔선 이남이여서 온대대륙성기후와 온대해양성기후가 혼합해있으며 중국 동북삼성에 비해 따스한 편이며 산이 많고 물이 좋고 공기가 맑아 사람 살기가 참 좋은 곳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 체류하다가 연길에 가면 특히 겨울철에 고향에 가면 흔히 감기몸살과 비슷한 증상으로 시달리게 된다. 필자는 한국에서 감기 한번 앓지 않았는데 이 몇 년래 겨울철에 고향에 가면 번번이 “홍역”을 치른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 대다수가 기후 때문에 나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린다고 한다.
연길에서 온 강씨(39세)는 전립선염이 심해 젊은 나이에 마누라와 잠자리조차 하기 힘들었는데 10년 전 한국에 와서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병이 나아 성생활이 무난한 건 물론 건설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 오상에서 온 심모 여인(29세)은 중국에 있을 때 젊은 나이에 쩍하면 폐렴에 시달려 고생했는데 한국에 온 후로 공기 좋고 물이 맑아서인지 병을 모르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한다.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문제
한국에서 다년간 머물다가 고향에 가서 도심의 큰길을 건너려면 신호등이 있는 데로 가서 기다리기 마련이다. 한국 생활 질서가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도가 당지사람들한테는 바보로 보인다. 왜냐? 중국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큰길을 가로질러 건너기 때문이다.
2009년 8월초 필자가 한국인 3명과 함께 단체관광팀에 합류해 장백산에 간적이 있다. 등산입구에 이르니 수백 명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이드가 관광객을 모아놓고 새치기로 짚차를 타야 하기에 눈치 있게 서두르라고 말한다. 우리 일행 넷이 단체가운데서 가장 먼저 정상에 올라갔다. 천지를 보고 사진을 대충 찍고 서둘러 줄을 서 기다려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우리 단체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딴에는 여유를 갖고 쉬면서 기다렸는데 반시간이 넘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한테 전화했더니 모두 폭포를 구경하고 온천욕 쪽으로 움직이는 중이라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없으니 폭포와 온천욕 가운데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우리를 빼고 나머지 38명이 모두 정상에서 줄을 서지 않고 용케도 스스로 알아서 새치기로 짚차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렇게 사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득을 보는데 반해 한국생활이 몸에 배여 정도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이 어쩌면 중국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성수기 때 장백산을 찾는 관광객이 매일 적게는 3000명이고 많게는 5000명이라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치기를 잘 시키는 가이드가 우수한 가이드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사회치안문제
한국에서 가끔 연쇄살인사건, 납치사건, 절도사건, 소매치기사건 등등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의 치안질서는 매우 좋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은 치안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별로 없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살던 조선족이 고향에 가면 치안문제로 피해를 입거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연길에서 온 백모 여인(40세)은 지난 설에 고향에 갔다가 공공버스에서 가방을 칼로 찢기고 5,000원을 절도 당했다. 연길시에는 아직도 공공버스에 절도범들이 쏠락거리고 있다. 한국에서 편히 다니던 습관이 있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찰로 빚어진 일이기는 하나 한국에 비해 너무 치안이 안 좋아 다시는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에는 연변처럼 상고머리하고 눈을 희번득거리며 괜히 사람을 째려보고 걸고들면서 싸움을 거는 젊은이가 아예 없다. 거리에 나서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공공장소에 가도 마음이 편하다. 이에 비하면 고향은 아직도 불안한 요소가 적지 않다.
환경문제
연길시의 경우 도시건설이 자고 깨면 변화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겉보기에는 참으로 가관이다. 허나 도시기능시스템이거나 호화로운 건물 뒤에 숨겨진 꼴불견들이 문명사회와 거리가 멀었구나 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길시의 건물수준은 여느 선진국보다 전혀 손색이 없고 한국의 중소도시에 비하면 오히려 더 낫다는 느낌이다. 허나 건물 안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와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를 찌르고 여기저기 담배꽁초와 휴지 및 과일껍질이 널려있다.
자질문제
한국에서 6년간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던 허씨는 돈을 벌었으나 허리를 다쳐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어 귀국하여 연길시 북산가에 비디오대여가게를 꾸렸다. 깔끔한 환경을 마련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 바닥에 장판을 깔았는데 고객들이 장판에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꺼버려 구멍이 수두룩하다. 금연이라 써 붙여도 전혀 관계치 않고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고객들한테 뭐라 하면 이 집에 다시는 안 온다고 을러멘다고 한다.
필자가 지난 11월 말경 심양에서 연길행 열차를 탔는데 밤중에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소리가 마치 싸움이나 하는 것처럼 어찌나 높던지 잠마저 말짱 깨고 말았다. 새벽이 되여 또 다른 손님이 역시 자기 아내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렇듯 고향에서는 열차든 버스든 음식점이든 모든 공공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든다. 이것도 중국의 하나의 문화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 아무리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도 모두 조용한 분위기에 적응된 조선족은 고향의 시끌벅적한 환경에 불편을 느끼기 마련이다.
서비스 품질문제
고향의 은행, 우체국, 정부공공기관 등의 서비스 질이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져있다. 아직도 공무원들이 마치 자기네한테 뭘 빌러 간 것처럼 고객을 쌀쌀하게 대하고 고객을 앞에 두고 자기네끼리 이말 저말 한담을 하기가 일쑤이다. 전기요금, 물세, 도시가스요금을 수금하는 직원들의 서비스 질은 더 말할 것 없이 차하다.
필자가 작년 10월 초경 연길에 갔을 때 공항변방검사대에 이르니 한 “멋쟁이아주머니”가 줄 뒤 부분에 서 있다가 검사원에게 손짓을 하니 검사원이 뛰어 와 여권을 갖고 가 맨 앞으로 내보냈다. 또 카운터외의 검사원들은 혹시 면목이 있는 사람이 없나 하고 목을 빼들고 살피다가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무실에 데리고 들어가 새치기로 통과시키기도 한다. 한국공항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목격할 수가 없다.
공항에서 이런 불미스런 일을 목격하고 기분이 언짢은데다 택시를 타면 부르는 것이 값이고 택시도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기사가 이어폰으로 마누라 아니면 친구에게 한바탕 큰소리로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한국택시는 깨끗할 뿐만 아니라 기사들은 휴대폰이 울리면 낮은 소리로 한두 마디 요점만 말하고 운전 중이라 끊는다고 하고는 운전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몸에는 관성과 리듬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국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이 고향에 가면 관성과 리듬이 깨지게 되여 적응에 애를 먹기 마련이다. 그래서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웬만하면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최종적인 답은 한국이 살기 편한데 비해 고향이 살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
남자든 여자든 처음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등지고 외국에 갈 때는 모두 한결같이 돈을 벌어와 여유롭고 화목하게 살려는 꿈을 안고 떠난다. 허나 정작 외국생활이 오래다보면 변해가기 마련이다. 특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줄기차게 전화를 하고 돈도 보내주다가 1~2년이 지남에 따라 기별도 뜸해지고 송금하지 않는 사례가 허다하고 처음에는 자식이 사무치게 그립고 남편 혹은 아내 생각이 나지만 점차 고비를 넘기고 나면 자신을 챙기는 데만 신경을 쓰고 살아간다. 거기다 20-40대 사이 사람들은 성적욕구 때문에 혹은 외로움 때문에 한국에서 임시부부를 맺고 살아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남편을 버리는 아내와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이 흔하게 생겨나고 있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꺼려하고 있다.
흑룡강성 라북의 맹모 여인(45세)은 남편이 8년 전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하다 보니 고향에 가지 못해 아내와 8년 동안 이산가족으로 지내왔다. 맹모 여인은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8년 동안 정조를 고스란히 지키다가 올해 1월초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찾아왔다. 남편이 집이 없다 하기에 언니 집에 머물게 되였다. 남편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간혹 아내를 찾아오면 잠자리가 아주 어색해 부부 같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젊은 여자와 동거하고 있어 아내를 멀리하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할 수없이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얼마 전에 귀국하였다.
왕청의 김씨(56세)는 아들애가 14살인 1997년 7월 아내가 한국에 출국하였고 그동안 김씨가 아버지이자 엄마 구실을 하면서 아들애를 대학까지 보냈다. 허나 아내는 한국에 온지 3년이 되던 해부터 아들애의 학비와 생활비만 보내고 남편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다른 조선족남자와 붙어살고 있다고 한다. 김씨가 지난해에 한국에 와서 아내를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헛물켜고 말았다.
부부사이가 갈등이 생기고 있을뿐더러 자식과도 멀어져가고 있고 심지어 자식을 버리고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부모들도 더러 있다. 또 일부 엄마들은 어김없이 자식한테 돈을 보내주고 하다가 집에 가서 아들애가 훌쩍 커버리고 엄마와 감정이 없고 공부는 뒷전이고 보내준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아예 곁에서 보지 않는 것이 약이라 하면서 서둘러 한국에 온다. 또한 일부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엄마와의 상봉이 너무 기뻐 엄마가 좀 오래 머물렀으면 하지만 엄마는 고향의 체류가 불편하다면서 서둘러 한국에 온다. 그렇게 서두르는 엄마가 자식은 이해되지 않는다. 벌만큼 벌었을 텐데 왜 출국하지 못해 안달일까? 정말 자식을 위해서일까 하는 의문이다.
우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 조선족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류동상황이 심각해 조선족공동체의 붕괴가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경제가 많이 상승하면 한국에 온 조선족이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젠 단순한 경제차원을 넘어 여러모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조선족은 고향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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