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뚱보 김씨아저씨의 서울때밀이<4~6>

김성호 글

2009-09-26     동북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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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사장은 나에게 전날 일한 일당으로 5만원을 넘겨주며 자기 친구가 세차장을 하는데 곧 구정이라 손님이 많아 잠은 계속 사우나에서 자면서 며칠 도와줄수 없는가고 물었다. 서울로 돌아가 봤자 역시 할일없는건 마찬가지라 쾌히 응낙을 했다. 그런데 세차도 《학문》이 많아 배우기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녁에 사우나로 돌아오니 새로 온 연변때밀이도 사장한테 불합격 맞아 되돌아가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이튿날 그가 먼저 떠나가고 며칠이 지난 후 나도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다시 대림마사지전문학원을 찾아갔다. 이 학원에서는 수강생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책임지고 여러번 알선해주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고시원에서 잠자리를 해결하였지만 이번에는 학원의 지하실에서 머무를수밖에 없었다. 정원장은 50만원 담보금에 의정부일대에 일감이 생겼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돈도 없어서 결국 다른 수강생이 파견되여갔다.

나중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드림한증막으로 떠나게 되였다. 대형사우나인 드림한증막은 장사가 유난히  잘되였다. 뽀얀 증기속에서 한창 때밀이를 서두르고있던 오야지 전운호는 새로 《배캠되여 온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인사 한마디도 없이 타올을 던져주며 바로 때밀이를 시작하라고 명령한다. 나는 정신없이 손님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바빠서 프로나 아마추어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첫날 때밀이는 저녁 10시가 다 되여서야 끝났다. 나는 깜작 놀랐다. 땀벌창이 된 내가 혼자서 26명 손님의 때밀이를 한것이다. 전씨는 오늘 수고했다며 찬 음료수 한병을 사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마음씨 좋은 오야지를 만났다고 속으로 한창 기뻐하고있는데 웬걸 《일은 열심히 하는데 솜씨가 서툴구먼》 라고 하면서 월급을 처음에 결정한 180만원은 안되고 150만원밖에 줄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되돌아가라는 식이였다. 돌아가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곧바로 길가의 로숙자로 나앉아야 할 형편인데. 늦가을 서리를 맞은 가지처럼 축 처진 나는 헐값으로 된 《인신매매계약서》에 동의할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어린 전운호는 한국인인데 때밀이하여 돈도 적잖게 버는것 같았다. 이전에 때밀이 오야지를 하려고 1억을 담보금으로 냈다가 사기당한적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인지 아니면 나한테 돈이 있다고 자랑을 해댄것인지는 알수 없다. 한증막에서 때밀이 오야지를 하는 외에 전씨는 또 주식도 놀고 있었다.  때밀이를 오래 해서인지 그의 팔뚝근육은 보기 좋게 울퉁불퉁 튀여나와있었다. 내가 갓 왔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고 묻기에 나는 좀 어리게 보이려고 서른한살이라고 말했더니 그는 자기가 한살 우라며 이후부터는 자기를 전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나보다 훨씬 어린 전씨를 곰상스럽게 두손을 싹싹 비비며 《전형》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한증막의 장사는 여전히 잘되여 눈코뜰새없었다. 때밀이를 제일 많이 한 날은 손님이 90명도 넘었다. 정말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동안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하고나면 온몸은 만신창이 되여버린다.  힘들 때는 커피를 연거퍼 타마시군 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는 한국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하겠구나 하며 자기 나름대로 분석도 해보았다. 밤 11시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것만 같은 지친 몸을 겨우 가누며 퇴근해 그 자리로 너부러져 잘 때는 귀신이 내려와서 잡아가도 모를 정도다. 그래도 잠을 잘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행복했다. 힘들고 고달픈 나날은 이렇게 계속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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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오래동안 사우나안에 갇혀있던 나는 한 손님이 밖에 큰눈이 내렸다고 하길래 구경을 나갔다가 그만 찬바람에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껴  벽을 지탱하며  겨우 사우나로 들어왔다. 따가운 물에 몸을 한참 담가서야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너무 무리하게 때밀이를 한것이 허리병을 초래한것이다. 그냥 힘을 써야 하는 오른팔도 약간 부어나며 아파났다. 오른팔 통증이 완전히 없어지는데는 약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나를 긍정해주는 손님이 있었다. 한 손님은 고맙다며 팁으로 5천원을 주었다. 이를 지켜보던 《전형》이 2천원을 가로채여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나한테는 3천원만 뿌려주었다. 그후부터 그 손님은 전씨가 없을 때 몰래 나에게 팁을 건네주군 하였다.

까다롭게 구는 손님도 더러 있었는데 힘이 너무 약하다, 너무 아프게 민다, 풋내기다 하며 별별 소리를 다 내뱉으며 트집을 잡았다. 그제야 나는 서비스업이 이래서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저녁 쉬는 참에 나는 중국으로 전화를 했다. 장인의 생일이다. 월급이 안 나와 장인생일이지만 송금도 못해 무척 미안했다. 장인은 파킨슨병을 앓고있어 바깥출입도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약으로는 별로 호전이 안되는 병이라서 수술해드리고싶었지만 돈이 원쑤였다. 일년후 병마로 고생하시던 장인은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이 학교유리를 깨서 벌금을 냈단다. 걱정거리가 한두가지 아니다. 집사람과 통화하고나면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탈의실안의 텔레비죤뉴스에서 이천랭동창고 화재로 인한 참사를 보도하고있었다. 모두 40명이 사망하였는데 그중에 조선족이 13명이나 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항일독립운동가 김규식장군의 후손도 사망자 명단에 올라있었다. 한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 우리는 할아버지시대의 《독립운동갬, 《월간(越왐)민》으로부터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겨우겨우 《할아버지 나라》를 찾아서 《더럽고 어지럽고 힘든 3D 막벌이족》으로 뛰고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손자세대에는 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 해도 그때에는 제발 지금의 우리처럼 루추한 모습으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나라》에 나타나지 말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한다.

음력설 전날 전씨는 설 쇠러 집에 가고 나 혼자만 우두커니 남아서 사우나를 지켜야 하였다.  명절이라 손님이 없어 한가했으나 이럴 땔수록 가족과 부모형제들이 더욱 사무치게 그립다. 한국에 나와있는 친구들이 전화가 와서 모임을 가지니 만나자고 했으나 나는 출근해야 한다면서 핑게를 대고 거절하였다. 그들은 유감을 표시하며 나에게 불행한  소식 한가지 알려주었다. 내가 잘 알고있는 고향선배 한분이 에이즈로 얼마전에 사망했다는것이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한국어선에 올랐다가 어떻게 되여 에이즈에 걸려 목숨마저 잃고만것이다. 아직도 한창 할 40대 나이에 실로 너무나 큰 대가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멋쟁이 사나이여서 련애도 많이 했으며 후에는 또 파혼도 많이 해본 사람이다. 옷도 항상 정갈하게 차려입고 다녔으며 일도 깐지게 하였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에이즈로 잘못되였다니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우리 주변에서 지금 출국으로 인한 에이즈가  점점 늘어나고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와 거리가 멀어보이던 에이즈가 점점 가까와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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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숭례문 방화사건이 한국을 뒤집었다.숭례문은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나는 반달전에 남대문시장에 구경갔다가 숭례문을 본적이 있다. 별로 웅장한 건물이 아니여서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그번이 마지막일줄은 몰랐다.

인천의 채종기로인의 고의 방화로 5시간만에 조선시대 건축의 대표가 되는 국보 제1호가 전소(全燒)하다싶이 되였다. 경찰들이 채씨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태연하게 고스톱(화토)을 치고있더란다. 채씨는 10년 징역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불행한 일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나는 말미 3일을 얻고 한국산업공단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취업이 불법이다. 고시원에 살 때 교육받는 날자를 예약한적이 한번 있는데 간밤에 설치해놓은 휴대폰알람이 아침에 울리지 않아 창문이 없는 캄캄한 방에서 기상하여 엄벙덤벙 달려갔으나 이미 한시간이나 지각이였다. 그래서 한국인력공단의 선생님들에게 수없이 빌었지만 안된다며 딱 잡아떼기에 하는수없이 다시 등록하여 교육기일이 그만 한달뒤로 미루어졌다. 교육받기 전에 신체검사가 있는데 나는 고혈압진단을 받았다.

집에서 돌아온 《전형》이 달라졌다. 때밀이는 딴전에 치고 컴퓨터에 매달려 주식을 연구하며 일확천금만을 꿈꾸고있었다. 손님이 몰려 내가 미처 못 밀어내자 손님들이 류실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드림한증막 부근에 더 큰 사우나가 생겨 장사가 영향을 받게 되였다.

하루는 보다 못해  호의로 한마디 권고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되여 조선족이 버릇없이 사장보고 이래라 저래라 시킨다며 나에게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붓는것이였다. 내가 한마디 대들자 그는 나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안경이 날아갔고 코피가 터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전씨는 황급히 제지하고 나서며 돈으로  해결하자는것이였다.  나는 배상은 필요없으니 깨진 안경을 바꿔주고 월급을 당장 지불해 달라고 했다. 그는 나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날로 나는 미련없이 드림한증막을 나왔다.

우선 잠자리를 마련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조선족교회를 찾아가면 하루 2천원에 먹고 자는것을 해결할수 있어서 가봤는데 초만원을 이루어 되돌아섰다. 지하철 어구에서 다시 무가지를 집어들었다. 광고란에 남구로 3번 출구의 중국동포타운센터 신문사 빌딩 4층에 하루 5천원하는 동포쉼터가 있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신대륙이나 발견한것처럼 흥분되여 무작정 그리로 달려갔다. 쉼터는 통간집이였는데 휑하게 커서 살것만 같았다. 칸막이가 없는 장판구들우에 침대 한층이 더 설치되여 있어서 마치 80년대 내가 다녔던 조선족중학교의 기숙사를 방불케 하였다. 방세를 한달치씩 지불하면 하루 3천원으로  할인된단다. 그제야 나는 여기가 조선족들에게 유명한 가리봉동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거리에는 화교들이 꾸리는 상점과 분식점들이 수두룩했다. 할일 없는 로인화교들이 상점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중국장기를 두고있었다. 중국찐빵(包子), 콩물, 꽈배기(麻花)  등을 손쉽게 사먹을수 있었다. 중문시스템을 깐 pc방도 있었다.

pc방에서 QQ메신저로 중국친구와 대화를 나누고있는 한 한족녀자를 만난적 있는데 심양에서 한국의 화교에게 시집온 그녀는 부모를 다 한국에 초청하여 가리봉동에서 분식점을 차리고있었다. 말 그대로 가리봉동은 한국의 당인가(唐人街)였다.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