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이동렬 장편소설 연재 36)
36
두 녀인이 입을 막고 돌아섰다. 저만큼 앞서가며 소근거린다. 남수의 와이프가 돌아보며 어서 따라오라 손짓한다. 그녀의 존재가 거짓 그 자체같았다. 흰것에 감싸인 녀인의 고만한 몸매도 나부죽한 얼굴도 왼쪽입술 사이로 보일까말까 하는 덧이나 저런 제스처마저도 내 눈에는 허상에 불과했다. 친구의 결혼식에 갔을때 유난히 눈에 사물거렸던것은 그녀의 덧이였다. 뽑아도 좋을만큼이 아니고 고런것이 그런 자리에 생겨나 자연스레 터울진것, 눈길이 자꾸 가면서 요상스레 속을 간질러놓았었다. 그런 덧이가 불현듯 가슴속에 살아났으니 아아,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아닌가? 나는 긴 탄식을 내뿜었다.
나는 우선 의심이 갔다.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가 이상스러웠다. 서울 올라오면 인차 련락을 주겠다더니 줄곧 소식 없잖았는가? 핸드폰마저 늘 꺼져있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곳에서 이렇게 만날줄이야!
나는 친구 보기 안스러웠다. 자식, 알면 놀라겠네, 중환자들의 숨터라했지?
쉼터는 별로 크지 않는 목조건물이였다. 유진이의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은 포수막자리라고 했다. 개발 허가를 얻기 쉽지 않기에 몇십년간 조금씩 늘궈온것이 고만한 정도, 그러니 십여명이 들수 있는 방이 여섯칸 정도, 가운데 홀은 꽤 컸었다. 바닥에 널을 깔았고 여기저기 방석들이 가쯘하게 깔려있었다. 북쪽벽에는 뻬치까가 있고 정수기와 커피자판기가 놓여있었다. 목조건물에 어울리는 유화 한폭이 한쪽 벽면을 은은히 장식했다. 나는 무슨 그림인지 판별이 서지 않았다. 어디서 본듯 한데 딱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경자씨가 커피 두잔을 뽑아서 건네왔다. 말소리 톤이 많이 죽어있었다.
이곳이 어때요, 진정 쉼터 같지요?
네, 여긴 언제 왔지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유진이가 대뜸 눈을 껍쩍거렸다. 일종 신호였다.
눈치 빠른 그녀가 인차 흰덧이를 드러내보였다.
얘, 괜찮어, 난 저이를 오빠같이 생각하고있다. 우리 그인 자꾸 시동생이라 부르라지만 난 그래도 저이가 오빠같아. 하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구, 속일거야 없잖어? 우리 그이만 모르면 될것을, 안그러냐?
허, 괜찮아요, 나야 뭐…
얘가 말이에요―유진이는 난감하듯 입맛을 다셨다. 측은한 눈빛으로 친구를 돌아봤다. ― 얼마전에 가슴이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해봤더니 유방에 문제가 생겼다나? 그래 이곳에서 한동안 정양하고있습니다.
그럼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지 왜 이런데서?…괜찮겠죠뭐, 양성이면 괜찮아요.
아니, 악―성이랍니다…
경자씨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주름잡힌 가는 눈이 자못 진지했었다.
나는 숨을 후욱 들이키였다. 가슴에 널장이 떨어져나갔다.
뭐, 뭐라구요?…남수는 알고있나요?
아니요, 제가 부산에 있는가 해요,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평온한 그녀의 눈빛에 질의가 반짝이였다.
아니요, 잠시는…
나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났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너무 걱정안해도 괜찮아요. 이곳은 공기가 좋은데다가 약도 잘먹고하니 많이 나아진것 같아요. 이젠 가슴의 동통도 멎은것 같구…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자연속에 묻혀있으니 그리 편할수가 없네요.
유진이가 다가가 친구를 살갑게 끌어안았다. 눈에 이슬이 비껴있었다.
고마워, 니가 그런 맘 갖고있으니…괜찮아 질거야, 곧 나을거라구.
얘는? 니가 그러면 내가 더 혼란스러워진다.
미안, 안그럴게, 그런데 복자언니는 어디갔어, 좀 괜찮은거야?
음, 그렇지뭐…며칠전에 갔어요.
뭐, 갔어?…
나는 유진이가 왜 놀라는지 몰랐다. 동그란 눈에 붕어입이 우서웠다. 저들만의 밀어를 주고 받는것 같았다.
나는 그녀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구락부와 약방을 돌아보았다. 역시 목조건물들, 칠팔십평쯤되는 구락부에는 마춤한 네모상 여럿에 나무걸상들이 놓여있다. 화토나 마작도 놀수 있고 뜨게나 종이접이같은 추억을 되새기겠끔 장만해 놓았다. 약방은 귀틀집, 크지 않은 약궤에는 구급약들을 넣어두었다. 이인용나무침대가 공간 반을 차지했다.
혹 손님이 오시면 이곳에 머물게 하거던요. 오늘저녁은 여기서 주무셔야 해요.
랑만적일것 같은데요, 허.
나는 말문을 닫았다. 랑만을 운운할 곳은 아니였다.
나의 인상에 쉼터는 전문성이 부족했지만 반짝 아이디어는 있었다. 관리인원이라야 한사람,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해야했다. 그러지 못하면 떠나야 한다. 아무리 중환자라도 차별은 없다. 주식은 제공받고 환자들은 자기 힘에 따라 숲을 가꾸고있었다. 토목공정사는 나이 지긋한 녀성분이였다. 자궁암인데 이곳을 온지 삼년해를 잡고있었다. 숲에서 할일은 많았다. 정자를 만들고 탑을 쌓고 주위 자람새들을 보아 벌목을 하거나 가지를 치고 잡목을 깎고 나무나 꽃들을 심고 가꿔갔었다. 산책에 편리하게 오솔길도 내고있었다. 물론 숲은 절대 파괴하지 않는다. 빛나는 숲나라뜻을 알듯 싶다.
나는 유진이와 어깨 나란히 걸어갔다.
물론 사장님은 좋은분이지요, 그래도 나름대로 계산만은 갖고있거던요. 아주 적은 투자를 들여서 자연공원을 만들 생각이지요. 허가가 안떨어지니 좋은일부터 하는겁니다. 숲은 숲대로 보존하면서 나름대로 경관을 만들어가는거죠.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언론에 나가기 시작하면 환자나 손님들이 몰려오고 장차 개발허가를 얻어내기 한결 쉬워지겠죠….
발상이 좋네요, 미래투자인셈인군요.
나의 앞에는 여러개의 돌탑이 나타났다. 자잔하고 납죽한 돌들로 쌓여진 탑들은 사람 키만큼 높거나 좀더 높았다. 밑이 넓고 둥글고 우가 뾰족했다. 나무들 사이에 불쑥불쑥 치솟은 돌탑들은 억세게 쌓이고 뭉친 약소한 잔돌들의 힘을 보여주고있듯 싶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속에서 뼈같은 기운을 모으는 제단 같았다. 숲의 정신을 모으고, 자꾸 허물어지는 삶의 지주를 쌓기 위해서이리라!
경자씨가 저만큼 우리를 보고 손짓했다.
이 탑이거든, 복자언니거야.
아, 그럼 이 밑에?…
응, 이 자리가 맘에 든다나? 돌들은 손수 모아다 놓았고…우리 몇이 쌓았어….
그녀들은 다시금 밀어를 주고받았다.
좀 알아듣게 말해봐요, 이 탑이 어떻다는건지?
그건…알필요 없는데요…
유진씨가 당황해서 얼버무리였다. 삽시에 얼굴이 굳어져 갔다. 만지면 섬세한 각선미마저 감각될듯, 그에 비해 경자씨의 표정은 흔연히 풀려있다. 까슬까슬한 입술을 감빨다가 나를 정시하며 입을 떼왔다.
정 알고싶으세요? 호, 탑아래에 그분의 유해가 묻혀있거던요.
뭐, 뭐라구요?…
나는 돌탑에서 냉큼 한발자국 물러섰다. 가슴이 섬뜩해났다. 잔등에서 찬바람이 썰렁 지나갔다. 돌들은 차거운 죽음의 감각을 남기고있었다. 나는 주위 돌탑들을 돌아보았다. 하나하나가 시체인양 굳어져 차겁게 솟은듯 했다.
오머, 겁도 내시네.― 유진이가 담담하게 입을 뗐다.― 여기 있는 큰나무들 밑에도 더러 골회가 묻혀있거던요.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의 소원이지요.
나무밑에도요?
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숲을 꿰지르다 가지에 찢기고 매달리는 소리가 등골을 서늘케한다. 해빛이 오히려 그늘인양 설레이는 숲의 절주에 맞춰 비쳐오면서 흔들리였다. 나는 이단과 저단의 엇갈리는 명암속에서 방황하고있었다. 흡사 공동묘지에 잘못 찾아든것 같은 불쾌감과 두려움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탑이 무덤이라면 고구려사람들의 석장묘(石葬墓)와 다를바 뭔가? 탑마다 골회가 묻혀있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아무튼, 어서 숲을 벗어나고 싶었다.
두 녀인은 소곤거리며 조용히 숲속을 산책했었다. 자연식물원이라도 돌아보듯, 가다가 섰다 하며 나무나 지형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갔다. 두려움따위는 좀도 없었다. 나도 그런 정서에 차차 감염되여갔었다.
나는 이깔이나 측백, 홍송, 떡갈나무 따위들은 가려낼수 있었다. 아름드리 이깔과 홍송들이 심심찮게 보이였다. 주위의 잔목들을 쳐내고 잔디를 깔거나 꽃을 심거나 돌로 쌓아 뿌리의 흙이 씻겨내려가지 않게 작업한 흔적들이 력연했었다. 가다가 앉아쉬게 편리하도록 큰돌들을 장식삼아 놓아두기도 했다.
불현듯, 줄기 발그스럼한 소나무 한그루가 시선을 끌었다. 술취한 나그네가 몸을 틀듯 올리뻗다가 두가닥으로 나뉘여 급격히 휘여져갔고, 가지의 침엽들은 선연한 비취빛을 뿌리며 줄기와 묘한 색채감을 이루었다. 선과 색채 조형미가 일품인 한국송은 지저분한 가지나 잎들이 한점없이 정연하고 깔끔하고 우아하고 도고했었다. 앞에 꽂아놓은 작은 패쪽에는 빛나는 숲에 숨은 소나무의 뜻을 누가 알리오?― 한국송, 1900년 생.글이 씌여져있었다. 붓글씨가 제법 눈에 익고 내용이 꽤 심오했었다.
우리는 서너시간을 숲속에서 보냈다. 까마아득한 서울경관이 저쪽에 갈무리져있다. 소음은 가라앉고 청신한 공기가 심페를 여과해나갔다. 좀 피로 했지만 공포감은 가뭇없이 사라졌었다. 산은 숲과 죽음과 삶과 함께 공존하고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었다. 삶에서 죽음을 억지로 떼어버려는것은 어리석은 소행이였다. 가다보면 그냥 따라오는것을, 항상 피맥을 같이하고있는것을 어찌하랴?
나는 상상에 날개를 달았다. 노랑나비 한마리 꽃봉오리에 날개를 접고앉아있다. 내가 꿈에서 노랑나비를 본것일까, 노랑나비가 나를 본것일까? 도가 장자의 상대론성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을 산다하지만 그것은 죽음이란 영원의 한바탕 꿈일지 누가 알것인가!? 순간 내 가슴속에는 노오란 해바라기꽃밭이 들어앉듯 무아경이 찾아왔었다.
언젠가 복선화의 이야기가 귀전에 생생히 살아났다. 성이 오가란 심양출신의 지원군병사가 있었다. 3.8선부근에서 한국병사가 한쪽 눈을 찔끈 감고 총을 쏘려는것을 보자 혼비백산해난 그 병사의 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냉큼 나무가지우에 올라가 앉게 되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어딘지 모를 곳을 찾아가던 중 애 낳으려는 새각씨의 배안으로 쑥 들어가 신생아로 다시 태어났다고, 그후의 희비극마저 새삼스러워났었다…
커피를 뽑아오던 경자씨가 나를 보고 시무룩이 웃었다.
무슨 기쁜일인데 혼자 좋아해요?
안요, 그냥 좀 잡생각을…남수한테는 전화 자주하나요?
그래요, 이제 병이 좀 낫는것 봐서 들어가야지요.
정말, 괜찮아요?
환자한테 굳이 뭔가 확인 받으려는 자신이 어처구니 없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나는 무슨 맛인지 몰랐다. 모카(Yemen Mokha)의 생각이 간절해났다. 그 뒤맛, 어제날 맛들인 촉감과 미감이 어울어지면서 그리움의 스릴을 빚게 된다. 한물에서 놀던 고향사람들은 그래서 서로가 스쳐지나지 못한다.
좀 앉아도 괜찮겠지요?
경자씨가 스스럼없이 곁을 다가와앉았다.
숲의 숨결이 기막히게 푸르렀다. 산새의 울음소리가 은방울처럼 깨지고 깨진 구슬알들이 다시 숲으로 종적을 감춰갔었다. 더더욱 신비해질수 밖에 없는 숲이였다.
저…한가지 청이…아니얘요, 미안…
그녀는 소녀처럼 부끄러움을 타며 붉어진 낯을 돌렸다. 손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 쩔쩔맸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얼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와들짝 놀라더니 급히 손을 빼갔다. 무참해 난 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의 랑패상을 본 그녀가 입을 막고 캐드득거리였다. 나도 바보처럼 따라웃고 말았다.
미안해요, 호호…그 손이 말이에요, 너무 그랬거던요, 뭐라할까?…크고 보기 좋구 만지면 편안할것 같구…실례이지만, 왜 그런지 문득 한번 만져보고싶은것 있지요? 호, 남자의 손…전 몇년동안 아직 한번도 잡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오머, 망신스러워, 나 이런 말을 막해도 되는감?…호호, 용서하세요, 어쩐지 남같지 않아서…
아, 괜찮아요, 어디 남인가요뭐?
나는 가슴이 뜨거워났었다. 다시 그녀의 손을 끄당겨 잡았다. 마디가 투덜해진 녀인의 손은 느낌이 꽛꽛하고 조금 거부적이였다. 손끝에 찌든 고생맛이 잔뜩 베인것 같았다. 측은지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젠 정말 귀국하시지 그래요, 중국에 가서 치료해도 괜찮은데요.
그래야겠지요, 그이가 너무 속상해할까봐 그래요.
휴, 하긴…
나는 뭐라 말할수 없었다. 녀석이 알면 놀라 자빠질것이다. 돌아오면 쫄딱 벗겨 침대에 고이 모셔놓고 팬티까지 빨아주겠다던 놈이렸다. 밤이면 궁싯거리다 술 찾아마시고 눈앞이 알딸딸해지면 그것 잡고 한바탕 지랄을 해야 속이 편해진다 너스레를 떨었었다. 한밤중에도 가끔 하모니카 입에 대고 미친듯이 부벼댄단다. 그 소리 호곡하듯 귀전에 들리는가 싶다. 어둠이 깔린 고향 산천에 은은히 흐르는 달빛을 잡고 흔들면서 구곡간장 녹아나게 숨을 몰아쉴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그 가슴을 잘알것 같았다…
그녀가 뭐에 정신 빼앗긴 나를 흘낏 보았다. 슬거머니 손을 빼갔다.
괜찮아요, 많이 좋아졌는데요뭐.
그렇잖구요, 꼭 나을겁니다.
며칠전에 그이한테 전화했거던요― 그녀는 입술을 감빨며 볼에 살며시 홍조를 띠웠다.― 이미 집손질도 해놓았데요. 우리 집 앞뜰에는 고추가 잘 열리거던요. 금년에도 홍당무우같이 크고 먹음직한 고추들이 주렁주렁 열렸데요. 그걸 가득 따다 로친네처럼 앉아꿰서는 처마밑에 여덟타래나 달았다나? 다 먹지도 못할것을 욕심스리 뭘 그리 많이 뀄냐고 나무람했더니 길할 여덟타래랍니다. 처마에 그래도 고추타래를 걸어놓아야 농가맛이 난다나? 뒷밭은 토질이 성글어서 고구마가 잘되는데 금년에도 두마대는 넉넉히 수확할것 같데요. 겨울에 쪄먹는것 보다 군불에 구워먹으면 너무 맛있거던요…난 우리 그곳의 가을 하늘이 넘 좋아요. 시원하게 열린 파아란 하늘에 기러기떼 나는것 보면 내 마음은 어느덧 구름처럼 흘러가거던요. 벌은 얼마 넓나요? 누렇게 익어가는 벼파도를 보면 정말 신이 나요…고향은 소음 하나 없이 아늑한 보금자리 같아요. 너무 그리워…아쉽게도 많이들 이사갔다며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 살기 나름이지요. 남수는 얼마 잘하고있는데요. 더덕골에 목장도 만들고 양삼밭도 가꿀 타산입디다. 이제 별장이 한결 물이 오를걸요. 사람들이 헛돈 쓴다고쉬쉬 하지만 두고 보세요, 이제 부러워할겁니다.
글쎄요, 저두 걱정 많이 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그이 생각도 틀리진 않더라구요. 한생이 얼마이라구? 남들이 떠나면 떠났지 어떤가요? 우린 죽을때까지 고향에서 살겁니다. 암튼 전 그이를 따르기로 했어요…처음에는 악성이라니 하늘땅이 노오래지더라구요. 잘살자고 나와서 이 고생했더니?…휴, 인생이 그토록 허망하고 허탈하고 덧없을줄 어찌 알았겠어요? 다행히 곁에서 다들 돌봐주었기에 저두 맘 돌린겁니다. 사람 사는게 바로 그런거죠뭐. 병들고, 죽고…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나요? 하느님이 오라면 가야하구 좀더 있으라면 있으면 되구, 전 이미 삶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구 생각해요. 마음을 편히 가지면 삶이 이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울수 없어요.
생각 잘했어요, 그렇구말구요…
나는 그녀가 그리 고맙고 고울수가 없었다.
그날밤 나는 숨터에 머물렀다. 유진이는 경자와 함께 들고 나는 약방에 잠자리를 잡았다. 저녁이 되자 숲에 있던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삼십명이 가까웠었다. 한결같이 살갑고 친절하고, 소근소근, 조용조용했다.
숲속의 어둠은 칠흑같았다. 오줌누러 나가보니 밖은 먹물을 뿌려놓은듯 몇발자국 안도 보이지 않았다. 유독 깊은숨 몰아쉬는 바람소리만 무섭게 들려왔다. 땅에서 기어다니고 뛰여다니고 자라고 숨쉬는 벌레와 짐승과 초목의 숨결이 실려있었다. 달빛에 젖지 않은 거무칙칙한 숲나라는 까마아득 잊혀진 세상의 이단같았다.
쉼터에 전기가 없다보니 홀과 방에 굵은양초를 밝혀놓았다. 목조건물에 비친 초불빛이 신비하게 너울거렸다. 산악, 호수, 쪽배가 있는, 벽에 걸린 유화가 어슴푸레 보였다. 생명의 원초를 모더니즘화한것이다.
문득 밖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왔다. 곧 귀에 익은 은은한 선률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누구일까? 급히 밖을 나가보았다.
잔디우에 누군가 앉아있다.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나는 그녀곁에 조용히 다가앉았다.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하나, 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작은 공지에 달빛이 비쳐들고있다. 희부옇고 몽롱하게, 나의 넋은 홀연 고운 달빛을 잡고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유진이였다. 어떻게 락화류수를 알고 선곡했을까? 그녀의 음색은 부드럽고 고저장단에 능했다. 숨소리 잘고루어갔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숲의 숨결이 금시 하얀 물결이 되고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꽃다운 넋들이 분분히 락화하고있다. 류수가 닫아가는 곳에 우리 꿈이 바야흐로 고개를 넘고있다…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터지였다.
그녀가 슬거머니 나한테 고개를 돌렸다.
이 노래 좋아하죠? 경자한테 들었거던요. 경잔 또 남편한테 들었데요. 댁의 어머님이 잘 부르셨다지요? 복선녀씨도 그렇구요…건데 이상한건 이곳에 계시는 분들도 다 부를줄 알고있는겁니다. 좋은 노래라고 해요, 그런 시절이 생각난데요.
그런 시절이요?
그녀는 미소하며 다시 기타줄을 잡기 시작했다.
나는 슬거머니 일어났다. 혼자 숲속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나는 숲속에 묻혀가는줄도 몰랐다. 자기를 잊고있었다. 느낌만이 눈이 되고 귀가 되여갔다. 어데선가 박쥐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놀란 메돼지나 토끼일수도 있다. 잎새로 새여드는 달빛은 숲속에서 기묘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눈앞에 갑자기 어슴푸레하고 희끄무레한 무지가 나타났다. 향기는 어느새 페부를 향기롭고도 곱게 물들여갔다. 세상에, 이 숲속에 장미꽃밭이 있다니?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락화류수라? 꽃은 꽃으로 피고 잎은 잎으로 진다. 물은 물로 흐른다. 피고 지고 흐르는 속에 삶의 진실이 있잖는가. 나는 봉숭화 꽃밭에 앉아 풀을 뽑는 엄마의 가슴이 마음에 닫아왔었다. 지고 흐르는 비통을 감수하며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으려는 화사한 소망! 이 밤의 숲이 그리 좋을수가 없었다.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쇠부치에 돌이 부딪치듯, 발걸음은 부지중 거기로 향했다. 뭔가 움직이고있다. 소리가 더 요란스러웠다. 이 한밤중에 뭘하러 나았을까? 혹시 탑쌓을 돌을 캐느라?…나는 제 정신이 아니였다. 숲속에서 보아왔던 모든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꿈을 꾸고있는지도 몰랐다.
불현듯 희미한 불빛이 그림자 저쪽에서 가물거리는것이 눈에 띄워왔다. 이 숲에 웬 불빛이람? 등골이 섬뜩해났다. 혹시 도깨비불이?― 더 이상 생각하기 무서워났었다.
나는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등에 땀이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몸을 대충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웬지 몸이 떨리고 열이나기 시작했다. 비몽사몽간,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문밖에서 느닷없이 발자국소리가 났다. 녀인 둘이 소곤거리고있었다.
문이 빠꼼히 열리였다. 누가 내 이마를 가만히 만지였다.
오머, 열이 나네. 감기인가?
귀에 익은 목소리― 유진이? 경자? 아니였다. 복선녀같았다. 어쩜 복선화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선녀나 선화가 왜 이곳에 와 있을까? 내가 정말 병이 든것일까?
나는 누군가 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눈이 뜨이지 않았다.
차츰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갔다.